남산 지하 조사실, 스물 여섯 번째-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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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지하 조사실, 스물 여섯 번째
내가 태어난 우리의 조국에 대해서 말하다나니 가슴이 벅차오르는 심정이었다. 내색하지 않기 위해 긴장을 풀고 담담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려 했으나 내 말은 자꾸만 빨라지고 있었다.
“이십 일 쯤 지나 ‘싼마루'에 있는 중국 식당에서 그 남자를 만났더니 그는 우리 어머니라며 사진 한 장을 내놓았습니다. 과연 외할아버지로부터 평소 들어오던 모습과 같았습니다. 사진을 보고 눈물을 흘리자 그 남자는 평양에 가면 어머니를 만날 수 있는데 자신이 평양 가는 걸 주선해 주겠다고 제의해 왔습니다. 다음에 만날 시간과 장소를 약속한 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헤어졌습니다. 1984년 9월에 약속한 장소로 나가 보니 그 사람은 나타나지 않고 대신 박이라는 남자가 나와 있었습니다. 나는 그를 따라 광주를 거쳐 북경까지 갔습니다. 북경에 가서 북조선 대사관에 묵으면서 천안문, 자금성 등지를 관광하고 박이 미국 돈 백불을 주어서 담배, 홍자, 와이셔츠, 손가방 등 어머니에게 줄 선물을 샀습니다. 약 4일 후 박을 따라 북경에서 북조선 비행기를 타고 중국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내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북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자 그런대로 진실성이 있다고 판단하는 것 같았다.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평양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산골의 어느 집에 수용되었는데 초대소라는 곳이었습니다. 15일 쯤 지나자 나를 평양 방직공장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어머니와 만나.....”
거기까지 말한 나는 평양에 있는 가족 생각이 앞서 말을 잇지 못했다. 더구나 어머니 생각을 하면 그리움이 사무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오래도록 진정하지 못하고 흐느껴 울자 수사관은 ‘밤도 늦었으니 그만 자라'며 방을 나갔다.
나는 침대에 누워서도 하염없이 울었다. 가족 생각뿐 아니라 이 상황에서 어떻게 버텨 나갈지 안타깝고 한심해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북에 내 가족들만 없다면 이렇게까지 괴롭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내가 살아날 길만 찾으면 될 게 아닌가. 그러나 그렇게도 사랑하는 나의 가족을 모른 체하고 곤경에 빠뜨릴 수는 없었다.
내가 사는 길은 그들이 죽는 길이었고 내가 죽는 길만이 그들이 사는 길이었으니 나는 당연히 내가 죽는 길을 택하려 들었다. 내가 주장하던 대로 부모에게 버림받은 고아였다면 나는 진작 더 이상 고통 받지 않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불어 버렸을 지도 모른다. 나날이 불안하고 두렵고 거짓말을 꾸며대느라 머리를 굴리고 하는 일에 진력이 난 지 오래였다. 어쩌다가 내가 남조선 특무 소굴까지 끌려와 고양이 앞에 쥐같이 떠는 신세가 되었는지.....
12월 22일. 바래인공항에서 음독하면서 넘어져 다친 무릎이 그동안 많이 나아졌다. 더운 물찜질을 하고 안티프라민을 발라가며 정성껏 치료한 덕분이었다. 통증도 없어지고 걷는데 불편도 느끼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심문에 시달리면서 고민한 때문인지 입술이 부르트기 시작했다. 아침 식사로 햄버거와 우유 한 잔이 나왔는데 아무것도 생각이 없어 우유만 한 잔 마시고 말았다. 어제 이야기가 중간에 끊어진 채 끝이 나서 오늘은 아침부터 고아댈 줄 알았는데 수사관들은 10시가 넘도록 회의만 계속하는 듯 했다.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해주었는데도 믿지 않는 모양이구나. ' 은근히 또 걱정이 앞섰다. 11시가 가까워서야 어제 수사관이 나타났다.
“많이 진정되었을 테니 이야기를 계속해 볼까?”
전혀 못 믿는 이야기라면 더 들으려고 하지도 않을텐데 이야기를 다시 하자고 하는걸 보니 내말을 믿기는 믿는 모양이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