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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많은 둘째언니 장혜영 (Jang Hye-young), 동생과의 인생 텀블벅 드디어 오픈!

동생과의 인생 텀블벅 드디어 오픈!

여러분 안녕하세요~ 생각많은 둘째언니입니다.

아흐~ 장마철이에요.

올 해 유난히 가물었던 날이 많아서

비가 오는 게 반갑기는 한데

으아...

이렇게 습한 건 정말이지

토끼 띠인 저로서는 살아가기가 좀 힘드네요.

그래도!

오늘은 좋은 소식 가지고 왔으니까

기운 내서 촬영을 계속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두둥!

지난번 영상에서 여러분께 소개해드렸던

그 동생과 함께하는 텀블벅 프로젝트를

오픈↗ 했어요~

와아~ (박수)

아마 제 트위터나 인스타를 팔로우하는 분들은

이미 좀 보셨을텐데요,

'중증 발달장애인 동생과 함께 시설 밖 생존일기,

어른이 되면'

이라는 이름의 텀블벅 프로젝트를

오픈을 하였습니다.

제 채널의 구독자분들이시라면 이미 익히 알고 계시는

저의 막내동생은,

사실은 18년 동안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살았어요.

가족들하고 떨어져서,

당연히 저하고도 떨어져서.

이번에 저의 프로젝트는

이제 그런 시설에 살고 있는 동생을

제가 살고있는 곳으로

서울로 데려와서

시설이 아닌 사회 속에서 성인 발달장애인인 동생과

그 동생의 가족으로서의 저

우리 둘의 삶의 자리를 찾아나가는 것을

그 과정을 생생하게 영상으로 기록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이 프로젝트가 저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또 의미있는 프로젝트인지를

여러분께 알려드리기 위해서

음.. 진짜 오랜만에 옛날 얘기를 하나 해볼까 해요.

정말 어렸을 때 얘기.

열 살도 더 전부터 시작되는 얘기예요.

저는 어렸을 때

경기도에 있는 한 시골마을에서 자랐어요.

꽤 오래 있었죠, 몇 년 있었으니까.

그래서 어린 시절 최초의 기억도

역시 그 시골 동네에서 시작이 되는데,

하여간

최초의 기억부터 어렸을 때의 모~든 저의 기억은

동생하고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것밖에 없어요.

아마 부모님보단 제가 동생이랑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을 거예요.

다 일을 하고, 막 밖에 계시고 그랬었으니까.

그 때는 동네도 워낙 시골이었고,

또 저는 어렸으니까

이 동생이 가지고 있는 장애가 정확히 뭔 지도 몰랐고,

어떻게 불러야 되는 지 몰랐고,

우리 주변사람들은 더더욱 그랬는데

적어도 제가 동생 손을 잡고

밖에, 놀이터든 어디든 데리고 나갔을 때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는 시선을 통해서

'아…

혜정이는 뭔가 다르구나, 내 동생은 뭔가 다르구나.'

라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어른들은 뭐 혀를 쯧쯧 차기도 하고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고

이제 제 또래 친구들은

이제 물어봤죠.

"네 동생 이상해. 왜 그래?"

이렇게 물어보면 사실 저는 할 말이 없었죠.

모르니까! 다른 건 알겠는데

왜인지, 그 걸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모르니까.

그래서 엄마한테 이제 가서 물어보곤 했어요.

"혜정이는 왜 그래?" 라고.

엄마는 "혜정이는 장애인이고,

뇌성마비가 있어서 그렇다고 해." 라고 얘길 해줬어요.

물론, 뇌성마비라는 이제 단어는 가졌지만

그게 뭔지는 모르지.

어쨌거나 '혜정이같은 애를

뇌성마비를 가졌다고 하나보다.'

라고 생각을 해서 이제 어른들이나 친구들이

"네 동생 왜 그래?" 라고 물어보면,

"어, 뇌성마비라서 그래." 라고 했지만

무슨 뜻인지는 전혀 알지 못했죠.

그리고 또 정상, 비정상 이런 단어들도 알게 되었죠.

그 단어를 알고 나서는

또 엄마한테 종종 물어봤던 것 같아요.

"엄마, 혜정이는 언제 정상이 돼?"

이렇게.

그렇게 여쭤본 데 이유가 있었어요.

첫 번째,

혜정이가 언제까지나 이럴거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고

두 번째, 헬렌 켈러 뭐 이런 책을 보면

뭐 역경을 딛고 뭔가

암튼 나중에는 마지막엔 잘 되는 이런 얘기들만

어렸을 때 주구장창 읽었거든요.

그래서 당연히 '이렇게 계속 살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계속 물어봤던거죠.

"혜정인 언제 정상이 돼?"

"혜정이는 언제 정상이 돼?"

그때마다 엄마는 저한테 그러셨죠.

"네가 고등학생이 되면 정상이 돼있을 거야."

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제가 고등학생이 되기도 전에,

중학생이 되자마자 이제 어머니는 집을 나가셨고

뭐, 힘들었을 테니까 이해는 해요.

그리고 동생은 시설로 보내지고

이제 저는 또 할아버지 할머니 댁으로 가게 되었죠.

사실 그 전까지,

그렇게 되기 전 까지 제 인생에

저의 어린 저의 짧은 인생에

전부는 거의 동생을 돌보는 일이었거든요.

그랬는데 갑자기 생각지도 않았던

자유의 시간이 찾아온거죠.

그 자유가 그 땐 되게 당황스러웠어요.

나의 세계의 전부가 동생이나 다름없었는데

갑자기 이 세계가 완전히 사라지고

마치 없었던 것 처럼 사라지고

전혀 다른 세계에 적응해야 되는 그런

시간이 찾아온거죠.

저는 꽤 잡초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금방 새로운 세계에, 동생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꽤 노력을 많이 했어요.

학교도 다니고 친구도 만나고

뭐,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해보기도 하고.

그림그리고 춤추고 글쓰고 이런 저런것들을 하고

뭐 여행도 다니고 연애도 하고

정말 세상을 경험하면서

'이 세상에는 정말 좋은 곳,

좋은 것,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됐죠.

근데 한편으로는

그게 되게 싫었어요.

왜냐면은

좋은 사람들이 모여서 좋은 얘기를,

좋은 것을 먹고 마시면서 하는 곳에는

내 동생이나 내 동생같은 사람들을 위한 자리는

전혀 없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았거든요.

이 세상에 아무리 좋은 것이고,

내가 아무리 좋은 사람들한테

아무리 좋은 대접을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실 내 세계의 절반은 동생이 있는 세계로 이뤄져있는데

내가 지금 속한 세계가 이 세계와

완전히 분리되어서 서로 절대 만나지 않는다면

사실 나는 여기에도 속하지 않고,

이 쪽 세계에도 속하지 않고 이 쪽 세계에도 속하지 않는

이제 그런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던거죠.

그냥 뭔가,

큰 거짓말 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너무 좋은 곳에서 너무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좋기도 하지만 너무 싫었어요.

역하다는 생각을 한 적도 꽤 있었어요.

물론 이 두 세계를 화해시키고 싶었죠, 전.

두 세계가 서로 왔다갔다 건너는 다리를 만들고 싶었는데,

근데

내가

'나라는 이 한 사람이 그걸 할 수 있을까?

우리 부모도

내 주변 모든 사람들 아무도

그걸 하지 않았는데, 할 수 없었는데, 내가 할 수 있을까?'

일단 저는 저를 믿을 수가 없었고

저를 아끼는 제 주변의 사람들도

'너의 인생을 네 동생에 바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 이런 얘기들을 많이 했고

저는 이제 못 이기는 척 수긍을 해왔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이제 저희 자매는 어른이 됐고

저는 이제 돈을 벌고 일을 하기 시작했죠.

근데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이 있던 시설에서 문제가 일어났어요.

이제 생활하는데 계속 이제

로테이션으로 일하는 교사분들이 계신데

이제 그들 중에 한 분이 양심선언을 하신거죠.

'일상적인 인권 침해가 존재한다.'

'언어폭력이 됐든 신체에 대해서 가하는 폭력이 됐든

일상적인 폭력이 존재한다.'

라는 제보를 해주셨고 그래서 시설이 발칵 뒤집혔어요.

그리고 그 당시의 저는, 부끄럽기는 해도

어쨌거나 학부모회의 회장직 같은 걸 맡고있었고

다른 이유는 아니고 제가 제일 어렸거든요.

저는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너무 놀랐고

피해자중에는 제 동생도 있었고

그래서 이 사건을 정말 잘 해결하고 싶었어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과를 받고 그리고 시스템을 개선하고

이렇게 하기 위해서

시민단체도 만나고

뭐 증언대회같은 것도 하고

진짜 많이 싸웠는데

음... 결론적으로는

저의 패배에 가까웠죠.

왜냐하면

대대적인 어떤 구조 개선이 있을 정도로

"끔찍한"

일은 없었고

그리고 시설 관계자, 종사자,

그리고 심지어 그 시설에

자기 자식이나 가족을 맡겨둔 보호자

모두가 이 문제가 커지는 거를

대부분 원하지 않았거든요.

왜냐하면 그분들 모두에게는

장애인들보다는, 그곳에서 살아가는장애인들 보다는

시설 자체가 훨씬 중요한,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고

그들의 삶을 지켜주는 어떤 울타리였기 때문에

저는 그랬다고 생각해요.

가장 가슴이 아픈 건, 어..

자식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보호자들이었다고 생각해요.

암튼 그 문제가 유야무야되고 나서도

되고나서 이제 저는 찍혔죠~ (웃음)

저와 제 동생은 찍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곳으로 갈 수 없으니

동생은 계속 거기서 있었고

저도 계속 동생을 보러 그곳으로 다녔어요.

이제 눈총과 등쌀을 견디며 (웃음) 다녔죠.

아직도 기억나는 건 그 일이 있고 얼마 안 돼서

다른 장애인 보호자분이 저 한테

혜정이 언니는 시설이 그렇게 싫으면 데리고 나가지

왜 여기다가 아직도 혜정씨 두고 있냐고

그런 얘길 아주 야멸차게 하셨던 기억이 아직도 납니다.

그래서 그 시설 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하고 나서

저는 되게 좀...

방황하면서 살았어요.

인간 관계도 제대로 하기 힘들고

일도 했지만 이제 암튼 계속 공허한 상태였던 것 같아요.

어딘가.

뭔가 가치있는 일을 하고싶다가도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정작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문제는

하나도 제대로 해결할 수 없었는데.

너무 절망스러웠고, 술도 많이 마셨고.

때로는 죽고싶기도 했고.

근데 이제 막내 있으니까 죽을 수는 없고

그러니까 술먹고 이제 뭐랄까 가사체험하고.

이렇게 지냈었죠.

근데 헤매는 것도 많이 하니까 지겨워지긴 하더라구요.

그래서 헤매는 게 지겨워진 어느 날,

이제 마음을 다시 가다듬고

많은 욕심을 버리고

'어떻게 살겠다, 저떻게 살겠다, 뭘 하고싶다.

이런 것들 다 버리고 한 가지만 하자.

동생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자.'

라고 비록 몇 년 전에

마음을 먹은 것이죠.

그래서 요 몇 년 진짜 열심히 살았어요.

진짜 정말 열심히 일했고

그 만큼 또 즐겁게 일했고

또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

'동생하고 살아갈 여건을 만든다.'라고 생각하고 사니까

어.. 할 수 있었어요.

지치지 않고 할 수 있었고.

더더욱 사회적인 가치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죠.

개인적인 준비, 이를테면 '돈을 벌어놓는다.'라던가

'집을 갖춰놓는다.'

이런 것들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왜 그런 말이 있잖아요.

'한 명의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마을 전체가 필요하듯이

이제 한 사람의 장애인이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사회 전체가 필요하다.'라는 생각이

아주 자연스럽게 들었고 이제

'그렇기 때문에라도 더더욱

사회적인 이슈들에 대해서

도덕적인 이슈들에 대해서 관심갖고

발언해야겠다.' 라는 생각도 했죠.

'아마 그래서 유튜브도 자연스럽게

시작하게 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을 이제서야 하게 되네요.

근데 그렇게 한편으로는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정확히 언제 동생을 데려올 수 있을까?"

에 대해서 사실은 어...

'이 때 해야지!' 라고 명확하게 생각하고 있진 않았었는데

근데 이제 결정적인 계기가 됐었던 게

제가 너무나 바빴던 지난 겨울과 봄에

동생이 앞니가 깨져 온 걸 보고서

'내가 준비한답시고 계속 시간을 보내는 동안

얘는 이렇게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점점 마모되어가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네. 마음을 바꿨습니다.

'가능한 빨리, 하루라도 빨리.

우리가 한 시간이라도 어릴 때.

빨리 같이 살기 시작해서

같이 늙어가야겠다.'

라고 마음을 정했어요.

그래서 이제 지난 봄에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서

준비를 착실히 해서

동생을 이제 6월 2일?

3일? 에 모시고 서울로 오게 된 것이죠.

근데 이렇게 데리고 오고 나서 비로소 느끼는건데

예전에 제가 막 '동생을 데리고 와야된다,

어떻게 해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속을 끓일 때의 저는

사실은 동생이랑 같이 사는 일을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

굉장히 어려운 방정식을 푸는 거랑 비슷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니까 뭔가 해결해야하는 문제들이 있어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으면

이게 해결이 되서 좀 더 우리 사는 게 나아지고, 나아지고

이런 걸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일견 그런 부분이 없지 않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제가 하기로 한 일은

뭔가 그런 '방정식을 푸는 일'이라기 보다는

'동생이라고 하는 그런 특수한

고유한 하나의 존재를 나의 평생,

나와 함께 공존하는 환경의 일부로 인정을 하고

그 환경 속에서 어떻게 함께 공존하면서

이제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를 고민하는 일이었구나.' 라는 거를

전 최근 조금 알게된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전에는 사실은 데리고와서

뭐도 해야할 것 같고, 돈도 뭐 어떻게 해야할 것 같고

막 머리가 너무 아팠는데,

지금은

그렇게까지 머리가 막 아프지는 않아요.

물론 고민은 있죠.

고민은 있고 계속 말씀을 드리게 될테지만

적어도 마음가짐은 굉장히 편안한 느낌이에요.

그니까 우리는 같이 살기로 한거죠.

사는 데 필요한 게 좀 많긴 하겠지만.

'역경을 이기고 뭔가를 막 마라톤을 어떻게 하는 과정!'

이런 게 아니고

'그냥 우리는 하루하루를 잘 쌓아 나가고 싶다,

모든 사람이 늘 바라듯이

그렇게 좋은 하루하루를 쌓아나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매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얘기를 좀 길게 했는데

사실은 더 주저리 주저리 하려고 막 써놨지만

근데 또 제가 여기서 너무 주저리 주저리 얘길 했다가는

텀블벅을 읽으실 때

'뭐야 다 아는 얘기네.'하고 쓱쓱 내려가실까 봐!

열심히 쓴 글이니까!

뭐 이정도로 얘기를 하고

좀 구체적인 얘기로 넘어갈게요.

사실 동생하고 살기로 한 건 저의 개인적인 결심이었지만

이 거를 이제 지금 말씀드린 '어른이 되면'

이라는 이름의 영상 프로젝트로 만들게 된 데에는

배경이 좀 있어요.

첫 번째 배경은

이제 우리 사회에 발달장애인에 대한 이야기, 서사,

컨텐츠 이런 게 너무 없고

있다 하더라도 뭔가 감동 코드 아니면 약간 그런

동정심을 유발하는 방식의

코드를 갖는 것이 싫었고

그러니까 좀 더 일상적인 방식으로

스토리를 전하는 작업을 하고싶었고

그래서 이제 제 유튜브를 통해서 동생과의 모습을

종종 보여드려 오기도 했었던거고

이렇게 '우리 사회에

성인 여성 발달장애인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더 보태고싶었다.

라는 게 첫 번째 배경이고요.

두 번째 배경은 상당히 현실적인데

동생을 데려오는 건 데려오는거고

이제 삶을 위해서 저도 계속 일을 해야 되잖아요,

근데 일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아주 기본적으론 시간이죠.

근데 계속 동생하고 24시간 붙어있으면

일을 할 수가 없으니까 적어도 이제 주간에

뭐 이렇게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라던가

이렇게라도 동생이 이제 가 있을 수 있는 학교나

아니면 프로그램이 있다면

이제 그 때는 제가 일을 하고 그리고 다시 동생을

데리고 오는 생활을 할 수 있을텐데

그런 프로그램을 수소문을 해보니까

있기는 한데 문제는

어.. 서울 시민으로 최소 6개월 이상은 살아야

그런 정책의 기본적인 수혜 대상이라도 된다는 거예요.

근데 제 동생은 경기도에 있는 시설에 있었기 때문에

이제 제가 동생을 데려온다 하더라도

어.. 그런 서비스를 신청 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서울에서 그런 복지 서비스를 받으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동생을 끼고

어쨌거나 이 가정 안에서 6개월을 버텨내야되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그래? 그러면 그러지 뭐.'

라고 저는 생각을 한 것죠.

그래서 이제 제가 '하던 일을 6개월 정도는 휴가를 쓰고

집에서 할 수 있는 일들 정도를 하면서

동생하고 온전히 시간을 보내겠다.'

라고 마음을 먹으니까

자연스럽게 근데 이 6개월을 잘 기록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이런 과정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된다면

'어, 이건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지 않을까?'

라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죠.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 '어른이 되면'이라고 하는

영상 공유 프로젝트를

어.. 기획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프로젝트는 크게 뭐 세 부분으로

나눠진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첫 번째는 뭐 지금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본격적으로는 8월부터

제 채널의 구독자분들께서

종종 보아오셨던 것과 비슷한 종류의

저와 동생의 좌충우돌 서울 생존기

브이로그가 업로드된다.

라는 거가 첫 번째이고

두번째는 그렇게 만들어진 영상에 더해서

전문적으로 영상을 하는 스태프들과 팀을 꾸려서

저와 동생의 나날들 그리고

그리고 저희가 부딪히는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는 지

뭐 그런, 혹은 또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은

어떻게 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그런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겠다.

다큐멘터리의 완성은

2018년, 내년 2월 말로 예정하고 있고

완성이 되면 상영회를 해서

원하시는 분들과 함께

GV를 포함한 상영회를 가질 예정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세 번째는요,

텀블벅에서 후원을 해 주시는 분들을 위해서

특별히 제작한 제 동생의 사진과

그리고 제 동생의 손글씨로 만들어진

어.. 포스트 카드 3종을

만들어서 드리려고해요.

샘플을 만들었거든요, 제가 보여드릴게요.

(터벅 터벅 터벅 터벅)

(부스럭 부스럭)

우리가 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한테

하고싶지만 잘 하지 못하는 얘기가 세 가지가 있잖아요?

제 채널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은근 그런 얘기 다 하면서 살아가고 계실 것 같긴 하지만

네 진짜로 마음을 전하는 말들을

쑥스러워서 혹은 기회가 없어서

잘 하지 못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카드를 만들었어요.

짜잔~

뒷 면은 이렇게 어른이 되면

이라고 하는 프로젝트 이름이 쓰여져 있고

그리고 첫 번째 카드는 '고마워요.'

네, 어.. 어떻게 쓰냐면!

기분 좋을 때 꼬셔놓고,

"혜정아, 혜정아, '고마워요' 써 봐. '고마워요' 써주세요~"

그러면은 이제 '고마워요'

그리고 써달라고 하지 않았는데

요즘에 영어에 심취해 있거든요,

'Thank you(땡큐)'를 쓰겠다고 쓴 거에요.

그래서 'THEH(떼)' 'Q(큐)' 랄까,

나름 땡큐거든요? (웃음)

고마워요 카드, 그리고

네 그리고 '미안해요~' 카드

'I'm sorry'는 영어로 쓰지 않았네요. (웃음)

아임.. 미안해요 카드.

그리고↗

사랑해요~

아이 러브~

이라고 하는 세 번째 카드.

이렇게 3종 카드를

텀블벅에서 펀딩을 해 주시는 분들께

보내드릴 예정이에요.

그래서 구체적인 텀블벅 펀딩의 리워드나 이런 것들은

실제 텀블벅 페이지

제가 더보기 란이랑 고정 댓글로 달아놓을테니까

참조해주시고요.

제 프로젝트는 제 손을 떠나서 오픈된 지가

이제 3~4일 째가 되었구요.

이제는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와 저의 사랑하는 동생이

우리의 이 무자비하면서도 아름다운 사회 속에서

우리의 자리를 잘 찾을 수 있게

그리고 우리와 비슷한 꿈을 꾸는 사람들에게

그 과정을 생생히 공유할 수 있도록

여러분께서 힘을 보태주시기를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그러면 오늘 영상은, 아이구 더워.

네, 그러면 오늘 영상은 여기까지고요,

다음 영상에서는 다른 모습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또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생각 많~은 하루 보내세요.

안녕~

안↗녕↗

안↗↗녕↗↗


동생과의 인생 텀블벅 드디어 오픈! Life with my brother Tumblebuck is finally open!

여러분 안녕하세요~ 생각많은 둘째언니입니다.

아흐~ 장마철이에요.

올 해 유난히 가물었던 날이 많아서

비가 오는 게 반갑기는 한데

으아...

이렇게 습한 건 정말이지

토끼 띠인 저로서는 살아가기가 좀 힘드네요.

그래도!

오늘은 좋은 소식 가지고 왔으니까

기운 내서 촬영을 계속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두둥!

지난번 영상에서 여러분께 소개해드렸던

그 동생과 함께하는 텀블벅 프로젝트를

오픈↗ 했어요~

와아~ (박수)

아마 제 트위터나 인스타를 팔로우하는 분들은

이미 좀 보셨을텐데요,

'중증 발달장애인 동생과 함께 시설 밖 생존일기,

어른이 되면'

이라는 이름의 텀블벅 프로젝트를

오픈을 하였습니다.

제 채널의 구독자분들이시라면 이미 익히 알고 계시는

저의 막내동생은,

사실은 18년 동안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살았어요.

가족들하고 떨어져서,

당연히 저하고도 떨어져서.

이번에 저의 프로젝트는

이제 그런 시설에 살고 있는 동생을

제가 살고있는 곳으로

서울로 데려와서

시설이 아닌 사회 속에서 성인 발달장애인인 동생과

그 동생의 가족으로서의 저

우리 둘의 삶의 자리를 찾아나가는 것을

그 과정을 생생하게 영상으로 기록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이 프로젝트가 저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또 의미있는 프로젝트인지를

여러분께 알려드리기 위해서

음.. 진짜 오랜만에 옛날 얘기를 하나 해볼까 해요.

정말 어렸을 때 얘기.

열 살도 더 전부터 시작되는 얘기예요.

저는 어렸을 때

경기도에 있는 한 시골마을에서 자랐어요.

꽤 오래 있었죠, 몇 년 있었으니까.

그래서 어린 시절 최초의 기억도

역시 그 시골 동네에서 시작이 되는데,

하여간

최초의 기억부터 어렸을 때의 모~든 저의 기억은

동생하고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것밖에 없어요.

아마 부모님보단 제가 동생이랑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을 거예요.

다 일을 하고, 막 밖에 계시고 그랬었으니까.

그 때는 동네도 워낙 시골이었고,

또 저는 어렸으니까

이 동생이 가지고 있는 장애가 정확히 뭔 지도 몰랐고,

어떻게 불러야 되는 지 몰랐고,

우리 주변사람들은 더더욱 그랬는데

적어도 제가 동생 손을 잡고

밖에, 놀이터든 어디든 데리고 나갔을 때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는 시선을 통해서

'아…

혜정이는 뭔가 다르구나, 내 동생은 뭔가 다르구나.'

라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어른들은 뭐 혀를 쯧쯧 차기도 하고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고

이제 제 또래 친구들은

이제 물어봤죠.

"네 동생 이상해. 왜 그래?"

이렇게 물어보면 사실 저는 할 말이 없었죠.

모르니까! 다른 건 알겠는데

왜인지, 그 걸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모르니까.

그래서 엄마한테 이제 가서 물어보곤 했어요.

"혜정이는 왜 그래?" 라고.

엄마는 "혜정이는 장애인이고,

뇌성마비가 있어서 그렇다고 해." 라고 얘길 해줬어요.

물론, 뇌성마비라는 이제 단어는 가졌지만

그게 뭔지는 모르지.

어쨌거나 '혜정이같은 애를

뇌성마비를 가졌다고 하나보다.'

라고 생각을 해서 이제 어른들이나 친구들이

"네 동생 왜 그래?" 라고 물어보면,

"어, 뇌성마비라서 그래." 라고 했지만

무슨 뜻인지는 전혀 알지 못했죠.

그리고 또 정상, 비정상 이런 단어들도 알게 되었죠.

그 단어를 알고 나서는

또 엄마한테 종종 물어봤던 것 같아요.

"엄마, 혜정이는 언제 정상이 돼?"

이렇게.

그렇게 여쭤본 데 이유가 있었어요.

첫 번째,

혜정이가 언제까지나 이럴거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고

두 번째, 헬렌 켈러 뭐 이런 책을 보면

뭐 역경을 딛고 뭔가

암튼 나중에는 마지막엔 잘 되는 이런 얘기들만

어렸을 때 주구장창 읽었거든요.

그래서 당연히 '이렇게 계속 살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계속 물어봤던거죠.

"혜정인 언제 정상이 돼?"

"혜정이는 언제 정상이 돼?"

그때마다 엄마는 저한테 그러셨죠.

"네가 고등학생이 되면 정상이 돼있을 거야."

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제가 고등학생이 되기도 전에,

중학생이 되자마자 이제 어머니는 집을 나가셨고

뭐, 힘들었을 테니까 이해는 해요.

그리고 동생은 시설로 보내지고

이제 저는 또 할아버지 할머니 댁으로 가게 되었죠.

사실 그 전까지,

그렇게 되기 전 까지 제 인생에

저의 어린 저의 짧은 인생에

전부는 거의 동생을 돌보는 일이었거든요.

그랬는데 갑자기 생각지도 않았던

자유의 시간이 찾아온거죠.

그 자유가 그 땐 되게 당황스러웠어요.

나의 세계의 전부가 동생이나 다름없었는데

갑자기 이 세계가 완전히 사라지고

마치 없었던 것 처럼 사라지고

전혀 다른 세계에 적응해야 되는 그런

시간이 찾아온거죠.

저는 꽤 잡초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금방 새로운 세계에, 동생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꽤 노력을 많이 했어요.

학교도 다니고 친구도 만나고

뭐,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해보기도 하고.

그림그리고 춤추고 글쓰고 이런 저런것들을 하고

뭐 여행도 다니고 연애도 하고

정말 세상을 경험하면서

'이 세상에는 정말 좋은 곳,

좋은 것,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됐죠.

근데 한편으로는

그게 되게 싫었어요.

왜냐면은

좋은 사람들이 모여서 좋은 얘기를,

좋은 것을 먹고 마시면서 하는 곳에는

내 동생이나 내 동생같은 사람들을 위한 자리는

전혀 없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았거든요.

이 세상에 아무리 좋은 것이고,

내가 아무리 좋은 사람들한테

아무리 좋은 대접을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실 내 세계의 절반은 동생이 있는 세계로 이뤄져있는데

내가 지금 속한 세계가 이 세계와

완전히 분리되어서 서로 절대 만나지 않는다면

사실 나는 여기에도 속하지 않고,

이 쪽 세계에도 속하지 않고 이 쪽 세계에도 속하지 않는

이제 그런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던거죠.

그냥 뭔가,

큰 거짓말 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너무 좋은 곳에서 너무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좋기도 하지만 너무 싫었어요.

역하다는 생각을 한 적도 꽤 있었어요.

물론 이 두 세계를 화해시키고 싶었죠, 전.

두 세계가 서로 왔다갔다 건너는 다리를 만들고 싶었는데,

근데

내가

'나라는 이 한 사람이 그걸 할 수 있을까?

우리 부모도

내 주변 모든 사람들 아무도

그걸 하지 않았는데, 할 수 없었는데, 내가 할 수 있을까?'

일단 저는 저를 믿을 수가 없었고

저를 아끼는 제 주변의 사람들도

'너의 인생을 네 동생에 바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 이런 얘기들을 많이 했고

저는 이제 못 이기는 척 수긍을 해왔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이제 저희 자매는 어른이 됐고

저는 이제 돈을 벌고 일을 하기 시작했죠.

근데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이 있던 시설에서 문제가 일어났어요.

이제 생활하는데 계속 이제

로테이션으로 일하는 교사분들이 계신데

이제 그들 중에 한 분이 양심선언을 하신거죠.

'일상적인 인권 침해가 존재한다.'

'언어폭력이 됐든 신체에 대해서 가하는 폭력이 됐든

일상적인 폭력이 존재한다.'

라는 제보를 해주셨고 그래서 시설이 발칵 뒤집혔어요.

그리고 그 당시의 저는, 부끄럽기는 해도

어쨌거나 학부모회의 회장직 같은 걸 맡고있었고

다른 이유는 아니고 제가 제일 어렸거든요.

저는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너무 놀랐고

피해자중에는 제 동생도 있었고

그래서 이 사건을 정말 잘 해결하고 싶었어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과를 받고 그리고 시스템을 개선하고

이렇게 하기 위해서

시민단체도 만나고

뭐 증언대회같은 것도 하고

진짜 많이 싸웠는데

음... 결론적으로는

저의 패배에 가까웠죠.

왜냐하면

대대적인 어떤 구조 개선이 있을 정도로

"끔찍한"

일은 없었고

그리고 시설 관계자, 종사자,

그리고 심지어 그 시설에

자기 자식이나 가족을 맡겨둔 보호자

모두가 이 문제가 커지는 거를

대부분 원하지 않았거든요.

왜냐하면 그분들 모두에게는

장애인들보다는, 그곳에서 살아가는장애인들 보다는

시설 자체가 훨씬 중요한,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고

그들의 삶을 지켜주는 어떤 울타리였기 때문에

저는 그랬다고 생각해요.

가장 가슴이 아픈 건, 어..

자식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보호자들이었다고 생각해요.

암튼 그 문제가 유야무야되고 나서도

되고나서 이제 저는 찍혔죠~ (웃음)

저와 제 동생은 찍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곳으로 갈 수 없으니

동생은 계속 거기서 있었고

저도 계속 동생을 보러 그곳으로 다녔어요.

이제 눈총과 등쌀을 견디며 (웃음) 다녔죠.

아직도 기억나는 건 그 일이 있고 얼마 안 돼서

다른 장애인 보호자분이 저 한테

혜정이 언니는 시설이 그렇게 싫으면 데리고 나가지

왜 여기다가 아직도 혜정씨 두고 있냐고

그런 얘길 아주 야멸차게 하셨던 기억이 아직도 납니다.

그래서 그 시설 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하고 나서

저는 되게 좀...

방황하면서 살았어요.

인간 관계도 제대로 하기 힘들고

일도 했지만 이제 암튼 계속 공허한 상태였던 것 같아요.

어딘가.

뭔가 가치있는 일을 하고싶다가도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정작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문제는

하나도 제대로 해결할 수 없었는데.

너무 절망스러웠고, 술도 많이 마셨고.

때로는 죽고싶기도 했고.

근데 이제 막내 있으니까 죽을 수는 없고

그러니까 술먹고 이제 뭐랄까 가사체험하고.

이렇게 지냈었죠.

근데 헤매는 것도 많이 하니까 지겨워지긴 하더라구요.

그래서 헤매는 게 지겨워진 어느 날,

이제 마음을 다시 가다듬고

많은 욕심을 버리고

'어떻게 살겠다, 저떻게 살겠다, 뭘 하고싶다.

이런 것들 다 버리고 한 가지만 하자.

동생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자.'

라고 비록 몇 년 전에

마음을 먹은 것이죠.

그래서 요 몇 년 진짜 열심히 살았어요.

진짜 정말 열심히 일했고

그 만큼 또 즐겁게 일했고

또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

'동생하고 살아갈 여건을 만든다.'라고 생각하고 사니까

어.. 할 수 있었어요.

지치지 않고 할 수 있었고.

더더욱 사회적인 가치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죠.

개인적인 준비, 이를테면 '돈을 벌어놓는다.'라던가

'집을 갖춰놓는다.'

이런 것들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왜 그런 말이 있잖아요.

'한 명의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마을 전체가 필요하듯이

이제 한 사람의 장애인이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사회 전체가 필요하다.'라는 생각이

아주 자연스럽게 들었고 이제

'그렇기 때문에라도 더더욱

사회적인 이슈들에 대해서

도덕적인 이슈들에 대해서 관심갖고

발언해야겠다.' 라는 생각도 했죠.

'아마 그래서 유튜브도 자연스럽게

시작하게 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을 이제서야 하게 되네요.

근데 그렇게 한편으로는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정확히 언제 동생을 데려올 수 있을까?"

에 대해서 사실은 어...

'이 때 해야지!' 라고 명확하게 생각하고 있진 않았었는데

근데 이제 결정적인 계기가 됐었던 게

제가 너무나 바빴던 지난 겨울과 봄에

동생이 앞니가 깨져 온 걸 보고서

'내가 준비한답시고 계속 시간을 보내는 동안

얘는 이렇게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점점 마모되어가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네. 마음을 바꿨습니다.

'가능한 빨리, 하루라도 빨리.

우리가 한 시간이라도 어릴 때.

빨리 같이 살기 시작해서

같이 늙어가야겠다.'

라고 마음을 정했어요.

그래서 이제 지난 봄에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서

준비를 착실히 해서

동생을 이제 6월 2일?

3일? 에 모시고 서울로 오게 된 것이죠.

근데 이렇게 데리고 오고 나서 비로소 느끼는건데

예전에 제가 막 '동생을 데리고 와야된다,

어떻게 해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속을 끓일 때의 저는

사실은 동생이랑 같이 사는 일을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

굉장히 어려운 방정식을 푸는 거랑 비슷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니까 뭔가 해결해야하는 문제들이 있어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으면

이게 해결이 되서 좀 더 우리 사는 게 나아지고, 나아지고

이런 걸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일견 그런 부분이 없지 않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제가 하기로 한 일은

뭔가 그런 '방정식을 푸는 일'이라기 보다는

'동생이라고 하는 그런 특수한

고유한 하나의 존재를 나의 평생,

나와 함께 공존하는 환경의 일부로 인정을 하고

그 환경 속에서 어떻게 함께 공존하면서

이제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를 고민하는 일이었구나.' 라는 거를

전 최근 조금 알게된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전에는 사실은 데리고와서

뭐도 해야할 것 같고, 돈도 뭐 어떻게 해야할 것 같고

막 머리가 너무 아팠는데,

지금은

그렇게까지 머리가 막 아프지는 않아요.

물론 고민은 있죠.

고민은 있고 계속 말씀을 드리게 될테지만

적어도 마음가짐은 굉장히 편안한 느낌이에요.

그니까 우리는 같이 살기로 한거죠.

사는 데 필요한 게 좀 많긴 하겠지만.

'역경을 이기고 뭔가를 막 마라톤을 어떻게 하는 과정!'

이런 게 아니고

'그냥 우리는 하루하루를 잘 쌓아 나가고 싶다,

모든 사람이 늘 바라듯이

그렇게 좋은 하루하루를 쌓아나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매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얘기를 좀 길게 했는데

사실은 더 주저리 주저리 하려고 막 써놨지만

근데 또 제가 여기서 너무 주저리 주저리 얘길 했다가는

텀블벅을 읽으실 때

'뭐야 다 아는 얘기네.'하고 쓱쓱 내려가실까 봐!

열심히 쓴 글이니까!

뭐 이정도로 얘기를 하고

좀 구체적인 얘기로 넘어갈게요.

사실 동생하고 살기로 한 건 저의 개인적인 결심이었지만

이 거를 이제 지금 말씀드린 '어른이 되면'

이라는 이름의 영상 프로젝트로 만들게 된 데에는

배경이 좀 있어요.

첫 번째 배경은

이제 우리 사회에 발달장애인에 대한 이야기, 서사,

컨텐츠 이런 게 너무 없고

있다 하더라도 뭔가 감동 코드 아니면 약간 그런

동정심을 유발하는 방식의

코드를 갖는 것이 싫었고

그러니까 좀 더 일상적인 방식으로

스토리를 전하는 작업을 하고싶었고

그래서 이제 제 유튜브를 통해서 동생과의 모습을

종종 보여드려 오기도 했었던거고

이렇게 '우리 사회에

성인 여성 발달장애인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더 보태고싶었다.

라는 게 첫 번째 배경이고요.

두 번째 배경은 상당히 현실적인데

동생을 데려오는 건 데려오는거고

이제 삶을 위해서 저도 계속 일을 해야 되잖아요,

근데 일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아주 기본적으론 시간이죠.

근데 계속 동생하고 24시간 붙어있으면

일을 할 수가 없으니까 적어도 이제 주간에

뭐 이렇게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라던가

이렇게라도 동생이 이제 가 있을 수 있는 학교나

아니면 프로그램이 있다면

이제 그 때는 제가 일을 하고 그리고 다시 동생을

데리고 오는 생활을 할 수 있을텐데

그런 프로그램을 수소문을 해보니까

있기는 한데 문제는

어.. 서울 시민으로 최소 6개월 이상은 살아야

그런 정책의 기본적인 수혜 대상이라도 된다는 거예요.

근데 제 동생은 경기도에 있는 시설에 있었기 때문에

이제 제가 동생을 데려온다 하더라도

어.. 그런 서비스를 신청 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서울에서 그런 복지 서비스를 받으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동생을 끼고

어쨌거나 이 가정 안에서 6개월을 버텨내야되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그래? 그러면 그러지 뭐.'

라고 저는 생각을 한 것죠.

그래서 이제 제가 '하던 일을 6개월 정도는 휴가를 쓰고

집에서 할 수 있는 일들 정도를 하면서

동생하고 온전히 시간을 보내겠다.'

라고 마음을 먹으니까

자연스럽게 근데 이 6개월을 잘 기록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이런 과정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된다면

'어, 이건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지 않을까?'

라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죠.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 '어른이 되면'이라고 하는

영상 공유 프로젝트를

어.. 기획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프로젝트는 크게 뭐 세 부분으로

나눠진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첫 번째는 뭐 지금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본격적으로는 8월부터

제 채널의 구독자분들께서

종종 보아오셨던 것과 비슷한 종류의

저와 동생의 좌충우돌 서울 생존기

브이로그가 업로드된다.

라는 거가 첫 번째이고

두번째는 그렇게 만들어진 영상에 더해서

전문적으로 영상을 하는 스태프들과 팀을 꾸려서

저와 동생의 나날들 그리고

그리고 저희가 부딪히는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는 지

뭐 그런, 혹은 또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은

어떻게 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그런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겠다.

다큐멘터리의 완성은

2018년, 내년 2월 말로 예정하고 있고

완성이 되면 상영회를 해서

원하시는 분들과 함께

GV를 포함한 상영회를 가질 예정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세 번째는요,

텀블벅에서 후원을 해 주시는 분들을 위해서

특별히 제작한 제 동생의 사진과

그리고 제 동생의 손글씨로 만들어진

어.. 포스트 카드 3종을

만들어서 드리려고해요.

샘플을 만들었거든요, 제가 보여드릴게요.

(터벅 터벅 터벅 터벅)

(부스럭 부스럭)

우리가 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한테

하고싶지만 잘 하지 못하는 얘기가 세 가지가 있잖아요?

제 채널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은근 그런 얘기 다 하면서 살아가고 계실 것 같긴 하지만

네 진짜로 마음을 전하는 말들을

쑥스러워서 혹은 기회가 없어서

잘 하지 못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카드를 만들었어요.

짜잔~

뒷 면은 이렇게 어른이 되면

이라고 하는 프로젝트 이름이 쓰여져 있고

그리고 첫 번째 카드는 '고마워요.'

네, 어.. 어떻게 쓰냐면!

기분 좋을 때 꼬셔놓고,

"혜정아, 혜정아, '고마워요' 써 봐. '고마워요' 써주세요~"

그러면은 이제 '고마워요'

그리고 써달라고 하지 않았는데

요즘에 영어에 심취해 있거든요,

'Thank you(땡큐)'를 쓰겠다고 쓴 거에요.

그래서 'THEH(떼)' 'Q(큐)' 랄까,

나름 땡큐거든요? (웃음)

고마워요 카드, 그리고

네 그리고 '미안해요~' 카드

'I'm sorry'는 영어로 쓰지 않았네요. (웃음)

아임.. 미안해요 카드.

그리고↗

사랑해요~

아이 러브~

이라고 하는 세 번째 카드.

이렇게 3종 카드를

텀블벅에서 펀딩을 해 주시는 분들께

보내드릴 예정이에요.

그래서 구체적인 텀블벅 펀딩의 리워드나 이런 것들은

실제 텀블벅 페이지

제가 더보기 란이랑 고정 댓글로 달아놓을테니까

참조해주시고요.

제 프로젝트는 제 손을 떠나서 오픈된 지가

이제 3~4일 째가 되었구요.

이제는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와 저의 사랑하는 동생이

우리의 이 무자비하면서도 아름다운 사회 속에서

우리의 자리를 잘 찾을 수 있게

그리고 우리와 비슷한 꿈을 꾸는 사람들에게

그 과정을 생생히 공유할 수 있도록

여러분께서 힘을 보태주시기를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그러면 오늘 영상은, 아이구 더워.

네, 그러면 오늘 영상은 여기까지고요,

다음 영상에서는 다른 모습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또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생각 많~은 하루 보내세요.

안녕~

안↗녕↗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