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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인가 쇼인가, 제 1장 먼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예배하라 (1)

제 1장 먼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예배하라 (1)

예배를 드리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본능이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 인종이나 종족이 이 세상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런 인종이나 종족에 대해 이제까지 알려진 바는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예배는 너무나 불완전하고 잘못된 방향에 빠져 있고 순수하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예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르침이 있다면 그것은 대단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예배를 이루는 몇 가지 요소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감탄' 이다.

예배하지 않고 감탄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감탄 없이 예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감탄의 감정이 극대화되어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이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배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대상을 존경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존경하지 않는 대상을 예배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예배에는 ‘존경' 또한 필수적인 요소이다.

예배의 세 번째 요소는 ‘매혹'이다. 우리를 매혹하는 것이 아니면 우리의 예배 대상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을 볼 때 우리는 놀라움과 경의에 사로잡혀 오직 하나님만 이 소유하신 아름다움을 찬양합니다”라고 외치게 된다.

경의에는 놀라움의 요소가 포함되게 마련이다.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이라면 그것은 이미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예배하기 위해서는 감탄과 존경만으로는 부족하다.

거기에는 매혹하는 신비로운 힘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예배를 향해 열리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예배의 네 번째 요소는 ‘사랑'이다. 사실, 이것은 맨 처음에 언급되었어야 했던 요소이다.

어떤 대상을 예배하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사랑하지 않으면서 예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랑이 무한히 커지면 결국 ‘숭모'가 된다.

여기서 잠깐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를 정리해보자.

안타깝게, ‘존경', ‘사랑', ‘숭모' 같은 단어는 그 단어의 본래 용법에서 벗어나 사용되고 있다.

우리는 이 단어들을 본래 하나님에 대해서만 사용해야 하는데도

일상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그것들의 본래 의미를 퇴색시켰다는 말이다.

만일 내가 권력자라면 이런 말들은 오로지 기도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고 찬양할 때에만 사용하도록 규제하는 법을 만들겠다.

이런 단어들이 오직 하나님에 대해서만 사용되어야 하는데

우리가 그것들을 값싸게 사용하여 본래 의미를 퇴색시켰기 때문이다.

예배는 사랑하는 대상과의 연합을 추구한다.

우리의 마음과 우리가 숭모하는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메우려는 적극적인 행위가 최고의 예배이다.

예배의 대상은 물론 하나님이시다.

니케아 신경은 우리가 ‘한 하나님, 즉 천지를 지으신 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 전능하신 아버지' 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바로 이런 분을 예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그분의 모든 속성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무릎을 꿇고 그분을 숭모하며 예배할 것이다.

디모데전서 6장 16절은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33:20)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영원하시고 전지하시고 전능하시고 주권적이시며, 수많은 속성을 갖고 계시다.

이런 사실로 볼 때 우리는 마땅히 낮아지고 겸손해야 한다.

우리 마음을 안정시키고 달래기 위해서 교회에 간다는 사람의 말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예배드릴 때 우리 마음이 안정되고 평안을 얻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교회 출석의 일차적인 목적은 아니다.

그 목적은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본래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 45편에서 시인은 성육신의 하나님을 발견한다.

시인에 의하면, 성육신의 하나님은 성부와 통일한 본질 을 소유한 하나님이시요

세상이 있기 전부터 존재한 분이시요, 때가 차면 태어날 그분의 육신의 어머니의 본질도 소유하게 될 분이시다.

성육신의 하나님은 빛을 발할 정도로 아름답고 멋지고 매력적인 분이시다.

하나님이신 인간, 인간이 되신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해서 다윗은

‘아름다운', ‘위엄 있는', ‘왕다운', ‘진실한', ‘의로운', ‘온유한', ‘사랑이 많은', ‘기뻐하는', ‘향기로운' 등의 수식어를 사용한다.

성육신의 하나님은 저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엄한표정의 제우스나 토르가 아니다.

그분은 향기롭고 사랑이 많으시고 의롭고 친근한 하나님이시다.

동시에 아무도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딤전6:16) 그분의 원수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신다.

이런 분이 바로 우리가 숭모하는 하나님이시다.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할지어다! '(시 45:11).

우리가 예배에 대하여 설교하겠다고 알리기만 해도 나라의 천사들이 날개를 흔들며 목소리를 높여 찬양을 시작할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늘 나라에서 흘러나오는 대기와 미풍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다.

이 세상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도 예배이다.

지성을 갖춘 도덕적 피조물들이 서로 화합하여 드리는 예배는 피조물 전체의 교향악이다.

그러나 예배가 없는 곳에서는 끊어진 현과 불화만 있을 뿐이다.

구속 받은 온 우주가 다시 모여서 온전히 한 목소리로 즐겁게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는 새로운 피조세계, 즉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가 올 때까지는 아직 새로운 피조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예배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여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 할지어다"(시 45:11)라고 명령한다.

예배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이것은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의 전 인격을 다 바쳐 예배하지 않으면 우리의 예배는 온전한 예배가 되지 못한다.

신앙, 사랑, 순종, 충성, 고결한 행위와 삶, 우리는 이런 것들을 모두 번제로 드려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만일 내 안에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지 못한 것이 된다.

하나님이 불완전한 예배를 받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분은 나의 예배 또한 받지 않으실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었나니 ...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시137:2,4) 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모든 정성을 다해 최대한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 존재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로 인하여 내 존재의 모든 부분이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면, 나는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신앙인들 사이에 큰 착각이 만연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장엄함을 느끼는 것이 예배'라고 믿는다.

나는 명예신학 박사학위를 가진 어떤 이가 쓴 “자연의 신비”라는 책을 우연히 읽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책이었다.

비단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 내용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는 그 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뻔했다. 그 책에서 그는 단지 장엄함에 대해서만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그리스도의 보혈, 그분의 성육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의 말에 따르면, 쉽사리 감상에 젖는 시인처럼 집 밖으로 나가서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 보며 장엄함을 느끼는 것이 바로 ‘예배'라는 말이 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그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완전히 부패하여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산지에서 뇌우를 만날 때

폭풍우 치는 날 해변에 서서 높은 파도 소리를 들을 때, 별들이 밤하늘에서 은빛으로 찬란히 빛날 때 장엄함을 느낄 수 있다.

수많은 촛불이 끊임없이 흔들리고, 일반 사람들이 감히 들어갈 수 없는 영역이 있는 대성당에 들어설 때, 사람들은 외경심과 장엄함을 느낀다.

예배가 있는 곳에서 외경심과 장엄함을 느낀다면, 그것들이 예배의 요소일 수는 있다.

그러나 외경심을 느끼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아니다.

장엄함을 느끼면서도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시인들은 장엄함을 체감하는 능력이 어느 누구보다 더 발달해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글을 서슴없이 발표한다.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는 사물의 본질을 논하는 그의 역작에서 아주 아름다운 를 남겼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단호히 거부했다.

아무리 감수성이 예민하고 자연에서 장엄함을 느낀다고 해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분을 예배할 수 없다.

귀가 얇은 어떤 사람들은 “형제여, 잠깐만! 너무 그렇게 편협 하게 생각하지 맙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지만 예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성경에서 근거를 찾으려고 시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당신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죽음을 목전에 두었다거나 놀라운 자연현상에 직면했거나

밤의 적막 앞에 섰을 때 느끼는 두려움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반드시 영적인 것은 아니다.

적막 속에서나 폭풍우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사람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다.

스펄전은 적막과 폭풍우 속에서 만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 위대한 설교를 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그분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분을 모르는 사람은 ‘영적 예배'의 경지에 다다르지 못하고 단지 ‘자연 숭배' 에서 이런저런 다양한 감정을 느낄 뿐이다.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 안에 전혀 없을 때 까지는 어떤 예배도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게 해드릴 수 없다.

나의 이 말을 듣고 누군가 실망에 빠진다고 해도 나는 내 말을 철회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사실,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은 착각에서 헤어나기 위해 실망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

여기 한 어린 소년이 있는데 그는 자기가 슈퍼맨이라고 믿으면서 집안 여기저기를 뛰어다닌다.

그가 열 살이 될 때까지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열여덟 살이 된 다음에도 계속 슈퍼맨인 것처럼 행동한다면 누군가 그를 환상에서 깨어나게 해야 할 것이다.

환상에서 깨어날 때 그는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에게 필요한 것은 거짓 위로가 아니라 환상에서 깨어나는 일이다.

아득한 원시시대에 사람들은 태양과 별들을 숭배했다.

그들은 무릎을 꿇고 수풀과 나무를 향해 기도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원시시대가 아닌 성숙한 역사의 단계에 살고 있다.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 수천 년간 내려왔다.

과학, 철학, 교육 등의 발전에 힘입어 우리는 적어도 우리가 슈퍼맨이 아니라는 것을 알 정도는 되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 정도는 알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면서도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을 위로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여 그들을 착각에서 구출해주어야 한다.

신앙에서 마술적 힘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예수님의 이름을 수천 번 반복한다 할지라도,

당신이 예수님의 뜻에 따라 살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우리의 뜻대로 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하려면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사사기 13장 25절을 보면 삼손에 대한 특별한 기록이 나온다.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신이 비로소 그에게 감동하시니라.”

그렇다. 여호와의 신이 때때로 우리를 감동시키셔서 우리가 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이다.

동쪽을 보고 기도한 후 서쪽으로 가면서 마음이 편하기를 바리는 것은 잘못이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살면서 자신이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믿는 것은 착각이다.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은 향을 들고 성소로 들어가 휘장 뒤로 가서 향을 피웠다.

그 시대에 고무가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내가 아는 한, 불에 탈 때 가장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것이 고무이다.

그런데 대제사장이 향과 고무 조각을 함께 태웠다고 가정해보자.

향긋한 향기는 온데간데없고, 검은 연기를 풍기는 고무에서 나오는 역한 냄새가 진동할 것이다.

제사장이 향기로운 제사의 요소에 악취를 풍기는 요소를 덧붙인다면 어떻게 올바른 제사를 드릴 수 있겠는가?

우리의 마음속에 향기가 아닌 악취를 풍기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 하나님 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겠는가?

훈련되지 못하고 교정되지 못하고 정화되지 못하고 순화되지 못한 것이 우리의 본성에 남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겠는가?

그런 것들은 올바른 예배를 방해한다. 마음속에 불순한 요소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해서 부분적으로나마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올바른 삶의 태도가 아니다.

만일 당신이 일주일의 7일간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일주일에 단 하루도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것이다.

주일예배 후에 월요일 예배, 화요일 예배, 수요일 예배 등으로 삶의 예배가 계속 이어지지 않는다면 주일예배도 의미가 없다.

일주일에 오직 주일 하루, 그것도 교회에 한 번 가는 것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개중에는 주일에 교회에 두 번 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그것을 아주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한번 가든 두 번 가든, 그것은 모두 동일한 날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차피 주일은 온전히 ‘예배드리는 날'이 아닌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만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계속 삶의 예배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주일의 공예배 또한 참예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예배는 무엇인가?

나는 반드시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것만을 의미하여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책상에서, 철로를 달리는 기차 안에서, 수많은 차들 틈에 끼어 운전하면서, 설거지하면서,

다리미질을 하면서, 학교에서, 농구장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는 활동이 정당하고 선하고 올바르다면 그 활동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습관을 따라 안식일에 회당이나 성전에 가셨다.

물론 다른 날에는 목수로서 일하셨다.

육신의 아버지와 함께 대패질하고 톱질하고 못을 박으셨다.

그분 자신이 유대인이셨기 때문에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일주일에 한 번 가서 예배하셨다.

경우에 따라서 일주일 연속 예배를 드리러 가신 적도 있다. 하지만 평소에는 일주일에 하루만 성전에 가서 예배하셨다.

우리는 교회에 가서 예배한다.

그러나 주일에 교회에 가서 예배한 후 그 다음 주일이 돌아오기까지

6일 동안 계속해서 우리의 예배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주일에 드리는 예배는 참예배가 아니다.

우리 안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까지 우리는 쉬어서는 안 된다.

때때로 나는 영적으로 ‘고원 현상'을 경험한다.

거기서 나는 내가 올라갈 수 있을 만큼 최대한 올라간 것 같고,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것 같다고 느낀다.

다시 말해서 일종의 정체기에 빠지는 것이다.

나의 수용 능력은 한계에 다다랐고 더 이상의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는 계속 허공을 치고 있을 뿐이다.

그럴 때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다.

그러면 나는 새로운 단계로 올라선다.

최근에 나는 이처럼 새로운 단계에 올라섰다고 느낀 적이 있다.

이 체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최근에 나는 나의 ‘생각' 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반드시 ‘행위로' 잘못을 범해야만 죄책감을 느껴 회개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잘못된 ‘생각만으로도' 나는 하나님과의 교제, 그 분의 임재에 대한 느낌, 또한 영적 감각을 잃어버릴 수 있다.

하나님은 나에게 “나는 너의 생각 안에 거한다.

내가 거할 수 있도록 너의 생각까지 성소가 되도록 노력하라” 라고 줄곧 말씀해주셨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 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통제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의 생각을 늘 올바르게 하려고 노력해 왔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 또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생각나면 나는 언제나 그 사람에 대해 우호적으로 생각하고 즐겁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이는 하나님이 내 생각 안에 거하시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악의에 차고, 더럽고, 정욕적이며 탐욕적인 생각, 그리고 교만한 생각 안에는 거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오직 온유하고 순수하고 친절하고 깨끗하고 남들을 사랑하는 생각 안에만 거하신다. 적극적인 생각,


제 1장 먼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예배하라 (1) Chapter 1 First Believe in God and Worship God (1)

예배를 드리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본능이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 인종이나 종족이 이 세상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런 인종이나 종족에 대해 이제까지 알려진 바는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예배는 너무나 불완전하고 잘못된 방향에 빠져 있고 순수하지 못하다. But for the most part, worship is so imperfect, misguided, and impure.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예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르침이 있다면 그것은 대단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If you have any helpful teachings, that would be a huge help.

예배를 이루는 몇 가지 요소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감탄' 이다. There are several elements that make up worship. One of them is 'admiration'.

예배하지 않고 감탄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감탄 없이 예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감탄의 감정이 극대화되어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이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배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대상을 존경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존경하지 않는 대상을 예배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예배에는 ‘존경' 또한 필수적인 요소이다.

예배의 세 번째 요소는 ‘매혹'이다. 우리를 매혹하는 것이 아니면 우리의 예배 대상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을 볼 때 우리는 놀라움과 경의에 사로잡혀 오직 하나님만 이 소유하신 아름다움을 찬양합니다”라고 외치게 된다.

경의에는 놀라움의 요소가 포함되게 마련이다.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이라면 그것은 이미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예배하기 위해서는 감탄과 존경만으로는 부족하다.

거기에는 매혹하는 신비로운 힘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예배를 향해 열리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예배의 네 번째 요소는 ‘사랑'이다. 사실, 이것은 맨 처음에 언급되었어야 했던 요소이다.

어떤 대상을 예배하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사랑하지 않으면서 예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랑이 무한히 커지면 결국 ‘숭모'가 된다.

여기서 잠깐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를 정리해보자.

안타깝게, ‘존경', ‘사랑', ‘숭모' 같은 단어는 그 단어의 본래 용법에서 벗어나 사용되고 있다.

우리는 이 단어들을 본래 하나님에 대해서만 사용해야 하는데도

일상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그것들의 본래 의미를 퇴색시켰다는 말이다.

만일 내가 권력자라면 이런 말들은 오로지 기도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고 찬양할 때에만 사용하도록 규제하는 법을 만들겠다.

이런 단어들이 오직 하나님에 대해서만 사용되어야 하는데

우리가 그것들을 값싸게 사용하여 본래 의미를 퇴색시켰기 때문이다.

예배는 사랑하는 대상과의 연합을 추구한다.

우리의 마음과 우리가 숭모하는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메우려는 적극적인 행위가 최고의 예배이다.

예배의 대상은 물론 하나님이시다.

니케아 신경은 우리가 ‘한 하나님, 즉 천지를 지으신 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 전능하신 아버지' 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바로 이런 분을 예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그분의 모든 속성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무릎을 꿇고 그분을 숭모하며 예배할 것이다.

디모데전서 6장 16절은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33:20)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영원하시고 전지하시고 전능하시고 주권적이시며, 수많은 속성을 갖고 계시다.

이런 사실로 볼 때 우리는 마땅히 낮아지고 겸손해야 한다.

우리 마음을 안정시키고 달래기 위해서 교회에 간다는 사람의 말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예배드릴 때 우리 마음이 안정되고 평안을 얻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교회 출석의 일차적인 목적은 아니다.

그 목적은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본래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 45편에서 시인은 성육신의 하나님을 발견한다.

시인에 의하면, 성육신의 하나님은 성부와 통일한 본질 을 소유한 하나님이시요

세상이 있기 전부터 존재한 분이시요, 때가 차면 태어날 그분의 육신의 어머니의 본질도 소유하게 될 분이시다.

성육신의 하나님은 빛을 발할 정도로 아름답고 멋지고 매력적인 분이시다.

하나님이신 인간, 인간이 되신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해서 다윗은

‘아름다운', ‘위엄 있는', ‘왕다운', ‘진실한', ‘의로운', ‘온유한', ‘사랑이 많은', ‘기뻐하는', ‘향기로운' 등의 수식어를 사용한다.

성육신의 하나님은 저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엄한표정의 제우스나 토르가 아니다.

그분은 향기롭고 사랑이 많으시고 의롭고 친근한 하나님이시다.

동시에 아무도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딤전6:16) 그분의 원수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신다.

이런 분이 바로 우리가 숭모하는 하나님이시다.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할지어다! '(시 45:11).

우리가 예배에 대하여 설교하겠다고 알리기만 해도 나라의 천사들이 날개를 흔들며 목소리를 높여 찬양을 시작할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늘 나라에서 흘러나오는 대기와 미풍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다.

이 세상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도 예배이다.

지성을 갖춘 도덕적 피조물들이 서로 화합하여 드리는 예배는 피조물 전체의 교향악이다.

그러나 예배가 없는 곳에서는 끊어진 현과 불화만 있을 뿐이다.

구속 받은 온 우주가 다시 모여서 온전히 한 목소리로 즐겁게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는 새로운 피조세계, 즉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가 올 때까지는 아직 새로운 피조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예배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여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 할지어다"(시 45:11)라고 명령한다.

예배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이것은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의 전 인격을 다 바쳐 예배하지 않으면 우리의 예배는 온전한 예배가 되지 못한다.

신앙, 사랑, 순종, 충성, 고결한 행위와 삶, 우리는 이런 것들을 모두 번제로 드려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만일 내 안에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지 못한 것이 된다.

하나님이 불완전한 예배를 받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분은 나의 예배 또한 받지 않으실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었나니 ...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시137:2,4) 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모든 정성을 다해 최대한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 존재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로 인하여 내 존재의 모든 부분이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면, 나는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신앙인들 사이에 큰 착각이 만연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장엄함을 느끼는 것이 예배'라고 믿는다.

나는 명예신학 박사학위를 가진 어떤 이가 쓴 “자연의 신비”라는 책을 우연히 읽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책이었다.

비단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 내용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는 그 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뻔했다. 그 책에서 그는 단지 장엄함에 대해서만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그리스도의 보혈, 그분의 성육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의 말에 따르면, 쉽사리 감상에 젖는 시인처럼 집 밖으로 나가서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 보며 장엄함을 느끼는 것이 바로 ‘예배'라는 말이 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그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완전히 부패하여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산지에서 뇌우를 만날 때

폭풍우 치는 날 해변에 서서 높은 파도 소리를 들을 때, 별들이 밤하늘에서 은빛으로 찬란히 빛날 때 장엄함을 느낄 수 있다.

수많은 촛불이 끊임없이 흔들리고, 일반 사람들이 감히 들어갈 수 없는 영역이 있는 대성당에 들어설 때, 사람들은 외경심과 장엄함을 느낀다.

예배가 있는 곳에서 외경심과 장엄함을 느낀다면, 그것들이 예배의 요소일 수는 있다.

그러나 외경심을 느끼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아니다.

장엄함을 느끼면서도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시인들은 장엄함을 체감하는 능력이 어느 누구보다 더 발달해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글을 서슴없이 발표한다.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는 사물의 본질을 논하는 그의 역작에서 아주 아름다운 를 남겼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단호히 거부했다.

아무리 감수성이 예민하고 자연에서 장엄함을 느낀다고 해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분을 예배할 수 없다.

귀가 얇은 어떤 사람들은 “형제여, 잠깐만! 너무 그렇게 편협 하게 생각하지 맙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지만 예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성경에서 근거를 찾으려고 시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당신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죽음을 목전에 두었다거나 놀라운 자연현상에 직면했거나

밤의 적막 앞에 섰을 때 느끼는 두려움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반드시 영적인 것은 아니다.

적막 속에서나 폭풍우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사람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다.

스펄전은 적막과 폭풍우 속에서 만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 위대한 설교를 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그분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분을 모르는 사람은 ‘영적 예배'의 경지에 다다르지 못하고 단지 ‘자연 숭배' 에서 이런저런 다양한 감정을 느낄 뿐이다.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 안에 전혀 없을 때 까지는 어떤 예배도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게 해드릴 수 없다.

나의 이 말을 듣고 누군가 실망에 빠진다고 해도 나는 내 말을 철회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사실,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은 착각에서 헤어나기 위해 실망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

여기 한 어린 소년이 있는데 그는 자기가 슈퍼맨이라고 믿으면서 집안 여기저기를 뛰어다닌다.

그가 열 살이 될 때까지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열여덟 살이 된 다음에도 계속 슈퍼맨인 것처럼 행동한다면 누군가 그를 환상에서 깨어나게 해야 할 것이다.

환상에서 깨어날 때 그는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에게 필요한 것은 거짓 위로가 아니라 환상에서 깨어나는 일이다.

아득한 원시시대에 사람들은 태양과 별들을 숭배했다.

그들은 무릎을 꿇고 수풀과 나무를 향해 기도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원시시대가 아닌 성숙한 역사의 단계에 살고 있다.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 수천 년간 내려왔다.

과학, 철학, 교육 등의 발전에 힘입어 우리는 적어도 우리가 슈퍼맨이 아니라는 것을 알 정도는 되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 정도는 알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면서도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을 위로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여 그들을 착각에서 구출해주어야 한다.

신앙에서 마술적 힘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예수님의 이름을 수천 번 반복한다 할지라도,

당신이 예수님의 뜻에 따라 살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우리의 뜻대로 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하려면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사사기 13장 25절을 보면 삼손에 대한 특별한 기록이 나온다.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신이 비로소 그에게 감동하시니라.”

그렇다. 여호와의 신이 때때로 우리를 감동시키셔서 우리가 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이다.

동쪽을 보고 기도한 후 서쪽으로 가면서 마음이 편하기를 바리는 것은 잘못이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살면서 자신이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믿는 것은 착각이다.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은 향을 들고 성소로 들어가 휘장 뒤로 가서 향을 피웠다.

그 시대에 고무가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내가 아는 한, 불에 탈 때 가장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것이 고무이다.

그런데 대제사장이 향과 고무 조각을 함께 태웠다고 가정해보자.

향긋한 향기는 온데간데없고, 검은 연기를 풍기는 고무에서 나오는 역한 냄새가 진동할 것이다.

제사장이 향기로운 제사의 요소에 악취를 풍기는 요소를 덧붙인다면 어떻게 올바른 제사를 드릴 수 있겠는가?

우리의 마음속에 향기가 아닌 악취를 풍기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 하나님 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겠는가?

훈련되지 못하고 교정되지 못하고 정화되지 못하고 순화되지 못한 것이 우리의 본성에 남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겠는가?

그런 것들은 올바른 예배를 방해한다. 마음속에 불순한 요소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해서 부분적으로나마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올바른 삶의 태도가 아니다.

만일 당신이 일주일의 7일간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일주일에 단 하루도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것이다.

주일예배 후에 월요일 예배, 화요일 예배, 수요일 예배 등으로 삶의 예배가 계속 이어지지 않는다면 주일예배도 의미가 없다.

일주일에 오직 주일 하루, 그것도 교회에 한 번 가는 것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개중에는 주일에 교회에 두 번 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그것을 아주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한번 가든 두 번 가든, 그것은 모두 동일한 날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차피 주일은 온전히 ‘예배드리는 날'이 아닌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만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계속 삶의 예배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주일의 공예배 또한 참예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예배는 무엇인가?

나는 반드시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것만을 의미하여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책상에서, 철로를 달리는 기차 안에서, 수많은 차들 틈에 끼어 운전하면서, 설거지하면서,

다리미질을 하면서, 학교에서, 농구장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는 활동이 정당하고 선하고 올바르다면 그 활동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습관을 따라 안식일에 회당이나 성전에 가셨다.

물론 다른 날에는 목수로서 일하셨다.

육신의 아버지와 함께 대패질하고 톱질하고 못을 박으셨다.

그분 자신이 유대인이셨기 때문에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일주일에 한 번 가서 예배하셨다.

경우에 따라서 일주일 연속 예배를 드리러 가신 적도 있다. 하지만 평소에는 일주일에 하루만 성전에 가서 예배하셨다.

우리는 교회에 가서 예배한다.

그러나 주일에 교회에 가서 예배한 후 그 다음 주일이 돌아오기까지

6일 동안 계속해서 우리의 예배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주일에 드리는 예배는 참예배가 아니다.

우리 안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까지 우리는 쉬어서는 안 된다.

때때로 나는 영적으로 ‘고원 현상'을 경험한다.

거기서 나는 내가 올라갈 수 있을 만큼 최대한 올라간 것 같고,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것 같다고 느낀다.

다시 말해서 일종의 정체기에 빠지는 것이다.

나의 수용 능력은 한계에 다다랐고 더 이상의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는 계속 허공을 치고 있을 뿐이다.

그럴 때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다.

그러면 나는 새로운 단계로 올라선다.

최근에 나는 이처럼 새로운 단계에 올라섰다고 느낀 적이 있다.

이 체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최근에 나는 나의 ‘생각' 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반드시 ‘행위로' 잘못을 범해야만 죄책감을 느껴 회개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잘못된 ‘생각만으로도' 나는 하나님과의 교제, 그 분의 임재에 대한 느낌, 또한 영적 감각을 잃어버릴 수 있다.

하나님은 나에게 “나는 너의 생각 안에 거한다.

내가 거할 수 있도록 너의 생각까지 성소가 되도록 노력하라” 라고 줄곧 말씀해주셨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 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통제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의 생각을 늘 올바르게 하려고 노력해 왔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 또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생각나면 나는 언제나 그 사람에 대해 우호적으로 생각하고 즐겁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이는 하나님이 내 생각 안에 거하시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악의에 차고, 더럽고, 정욕적이며 탐욕적인 생각, 그리고 교만한 생각 안에는 거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오직 온유하고 순수하고 친절하고 깨끗하고 남들을 사랑하는 생각 안에만 거하신다. 적극적인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