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학시절, 열 네 번째-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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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대학시절, 열 네 번째
지방의 식생활은 평양과 너무 달랐다. 밥도 노오란 강냉이 밥이였다. 지방은 평양과 달리 잡곡 8에, 입쌀 2의 비률로 배급되므로 밥을 지으면 노오란 강냉이 밥이 되였다. 큰아버지를 비롯한 남자들에게 먼저 입쌀이 많은 쪽으로 실하게 퍼주다 나면 결국 녀자들은 순전한 강냉이 밥만 차례가 왔다.
큰집 식구들은 우리가 마치 달나라에서 온 귀한 손님처럼 대해 주었다. 말끝마다 ‘루추해서....' ‘찬이 없어서....' ‘시골은 다 이래...' 를 붙이며 어려운 생활을 우리가 불편하게 생각할까봐 노심초사 하는 것 같았다. 큰아버지는 닭공장에 가서 한 마리에 50원씩 이나 하는 닭을 사오기까지 하며 우리를 극진히 대접하였다.
배낭을 뒤져 우리가 가져 간 빵과 과자를 내놓았더니 특식품처럼 아주 귀중하게 여겼다. 몇 개씩 나누어 이웃집에 돌리며 평양 사는 조카딸이 가져 왔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동네 아주머니들도 일부러 와서 평양에서 온 우리를 별난 눈으로 보고 말을 걸었다.
“평양은 살기가 어떻소?” “먹을것도 풍족하지 않음매?” “평양 이야기 좀 해보기오.”
큰어머니뿐 아니라 아주머니들 모두가 평양이라는 말만 들어 왔을 뿐 아직까지 평양을 가보지 못한 사람들이였다. 그래서 우리로 부터 하나라도 평양 이야기를 더 들으려 했다. 우리가 얘기할 때는 그들 눈빛이 꿈속에서 그려 보는 동화 세계마냥 다른 세상 이야기로 듣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언제나 한번 가보나....” 하는 소리를 말끝마다 되뇌였다.
어떤 어주머니는 내 얼굴을 만져 보기까지 하였다. 하기사 그들 피부는 바다 볕에 그을려 검은 데다가 잘 먹지 못해 영양 부족으로 얼굴에 버짐꽃까지 피였다.
또 우리는 평소 입고 다니던 교복을 그대로 입고 갔는데 거기 애들과 같이 있으면 우리가 너무 깔끔해 보여 같이 있기도 쑥쓰러울 정도였다. 지방 사람들의 옷차림은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애들은 옷이 없어 교복 하나만 가지고 학교에 갈 때나 놀 때, 일할 때조차 줄곧 입어댔다. 옷소매는 너덜너덜하게 닳았고 팔꿈치와 무릎은 구멍이 나서 그 부분을 천으로 덧씌워 꿰맸으나 그곳 또한 헤여져 있었다. 전혀 세탁을 하지 않았는지 때가 끼여 반질반질 하였다.
그 추운 날씨에 양말도 신지 않은 애들도 많았다. 양말을 신었다 해도 발가락과 뒤꿈치는 구멍이 다 나있는 지경이였다. 배낭에서 우리가 입던 옷가지를 풀어 놓으니 큰댁 식구들은 눈이 휘둥그래져 놀라며 좋아했다.
“이거 다 무시기야?” “세상에 이것을 어찌 다 우릴 주는거요?”
큰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입혀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하루는 평양에서 가지고 간 돈이 좀 있고 해서 영옥이를 데리고 상점으로 갔다. 무얼 하나 사주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상점에 가보니 말만 상점이지 파는 물건은 하나도 없이 판매원만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판매원도 봉급과 배급을 받아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빈 상점을 지키며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며칠 후 영옥이를 앞세우고 큰고모네 집을 방문했다. 큰 고모댁은 신포에서 약 1시간을 걷는 거리였다. 차가운 바다 바람을 얼굴에 맞으며 걷다나니 입술이 터서 갈라지고 얼굴은 마비되는 듯 하였다. 큰고모댁 식구들은 우리가 온다는 연락을 받고 멀리까지 마중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