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고백, 서른 네 번째-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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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고백, 서른 네 번째
“똑, 똑, 똑,”
막상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침착해야 한다.' 아랫배에 힘을 주고 심호흡을 한 번 해보았다. 고개를 돌려 김 선생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니 김 선생은 그대로 누워 있으라고 내게 손짓을 했다. 나는 도로 누워 버렸다. 잠시 후, 문 여는 소리가 나고 곧이어 뭐라고 주고받는 말소리가 나더니 남조선대사관 성원을 안내해 들이는 기척이 났다.
“내 딸인데 여행 중 일찍 자리에 누웠으니 이해하십시오.”
김 선생이 일본 말로 나를 소개하는 바람에 나는 얼떨결에 습관적으로 몸을 반쯤 일으켜 한국 대사관 성원에게 눈인사를 하고 다시 누웠다. 나는 금방 내가 한 짓을 후회했다. 김 선생이 자는 척하고 가만히 누워 있으라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인사를 해버린 것이었다.
심장은 두방망이질을 하고 이빨 부딪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덜덜 떨려 억제하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벽을 향해 누워 있었지만 나는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한국대사관 성원은 일본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두 사람은 서툰 영어를 주고받으며 무언가 종이에 열심히 써서 의사소통을 하는 모양이었다. 말이 잘 안 통할 때마다 그 사람은 조선말로 욕을 섞어가며 혼자 투덜거렸다.
“제기럴.......말을 알아들어야 어떻게 해볼 것 아니야. 이거 큰일인데.....”
그가 안타까워서 애를 태워도 김선생은 태연스레 능청을 떨고 있었다. 그 급한 와중에도 웃음이 났다. 남조선대사관 성원의 말을 종합해보면 115명의 승객을 태운 KAL 858기가 방콕 도착 전에 실종되었는데 떨어진 것 같다며 우리들은 행운이라는 내용과 우리에게 언제 어디로 떠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의 말과 행동으로 보아 우리에게 강한 의심을 품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KAL기가 추락한 것 같다는 말을 듣는 순간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내 자신이 저지른 일이면서도 115명과 함께 공중분해 되어버린 비행기의 모습이 꺼림칙하게 가슴에 걸리는 마음과 나도 이제 당과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뜻을 받들어 큰일을 해냈구나 하는 마음이 동시에 교차되었다. 조선의 온 겨레가 일일천추 기대하는 조국통일 숙원에 한몫을 했다는 마음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한국대사관 성원을 내쫓듯 재촉하여 보낸 뒤 김 선생은 또다시 나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KAL기가 폭파되긴 된 것 같다. 우리 임무를 수행한거야. 이제부터는 우리가 어떻게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 나가느냐가 문제인데.....하여간 항공기 사건은 조사하려면 오래 걸리기 마련이니까 우리는 계획대로 내일 아침 로마로 가는 비행기만 타면 돼. 그렇게 되면 추적하기가 힘들어질 테고.....큰 문제 될 건 없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김 선생의 표정은 영 자신이 없었다. 단지 그 말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달래고 있는 말임을 알 수 있었다. 이어서 그는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된다고 강조하면서 사람들이 다시 찾아올지 모르니 미끼를 주지 않기 위해 목욕탕에서 물을 뿌리고 수건을 모두 적셔 놓아 목욕한 것처럼 꾸미라고 지시했다.
밤 10시쯤 되었을까 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 하면서 문 열 생각을 못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설 기력도 없이 옴쭉달싹 못 하고 김 선생만 쳐다보았다. 잠시 후 김 선생이 휘청거리며 일어나 문 쪽으로 다가갔다.
“우리를 체포하러 왔을지도 모르니 문을 다 열지 말고 쇠고리는 걸어 놓으세요. 왜 그러냐고 물어만 보세요.”
나는 소리를 죽여 김 선생에게 당부했다.
나레이션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