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고백, 스물 다섯 번째-193
[...]
눈물의 고백, 스물 다섯 번째
2시간 이상 백화점 안과 밖을 누비고 다녔는데도 김선생이 나타나지 않자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어디서 쓰러진 게 아닐까?' ‘임무를 앞두고 겁이 나서 도망간 것은 아닐까?' ‘현지 경찰에게 정체가 드러나 내게 신호할 틈도 없이 붙잡혀 가지는 않았을까?' 방정맞은 상상을 할수록 애간장이 탔다. 이 일을 어찌해야 좋을지 눈앞이 캄캄했다.
‘이놈의 속내의는 괜히 사느라고...' 나는 손에 쥔 속내의를 내던지고 싶었다. 너무 지치고 당황스러워 더 이상 걷기도 힘들었다.
‘아무튼 호텔로 돌아가서 대사관에 연락을 하든 다시 찾든 대책을 세우자.'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호텔로 발길을 돌렸다. 일이 여기에서 이렇게 빗나가리라고는 예기치 못했었다. 호텔로 터덜터덜 걸어오면서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나? 혼자서라도 임무 수행은 해야겠지' 생각하니 밉상만 떨던 김 선생이 소중한 존재로 여겨졌다. 호텔 방문을 여는데 손이 떨려 열쇠가 잘 들어가지를 않았다. 그런데 문이 안에서 열리면서 김 선생이 거기 서 있는게 아닌가? 반갑기도 했지만 그 순간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자제하지 못하고 들어서자 마자 소리를 질러댔다.
“아니 이럴수가 있어요? 나는 지금까지 백화점 안팎을 온통 누비고 다니면서 얼마나 찾았는데! 걱정하느라고 십년감수했단 말이에요.”
김 선생은 내가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는데도 그저 빙긋이 웃었다.
"하여튼 앉아서 식기 전에 이 소세지 빵이나 먹자.“ 나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여태 속이 새까맣게 탈 정도로 찾아다녔는데 글쎄 소세지 빵을 사올 정도로 무사태평이니 할 말이 막혔다.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거리고 앉아 있는 나를 김 선생이 달랬다.
“나도 마유미를 찾아 헤맸어. 그러다가 마유미같이 총명한 여성이면 혼자 능히 호텔을 찾아오겠지 하고 믿으면서 돌아오는데 따끈한 소세지 빵을 팔길래 사왔어. 점심 안 먹었잖아. 자, 어서 들어. 다 식겠다.”
노인은 빵 한 개를 집어 나에게 권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게도 잘못이 있는데 화만 내고 있기가 멋쩍어 이 일은 곧 풀려버렸다. 그리고 김 선생을 아주 잃어버린 줄 알았을 때의 그 막막함이 되살아나 앞으로는 좀 잘 대해야지 하고 마음을 돌렸다.
11월 27일.
3일간을 할 일 없이 헤매며 일본인 부녀 관광객 노릇을 하기도 쉽지 않았다. 드디어 안내조 최 과장, 최 지도원과 만나기로 한 날, 바로 전투가 시작되는 전날 저녁이 되었다. 일부러 이른 저녁식사를 마치고 호텔 로비에 앉아 쉬면서 7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10분전에 김 선생을 로비에 남겨 놓고 나는 호텔 정문으로 나가 오스트리아에서 유고로 입국한 최과장과 최 지도원을 기다렸다.
밖은 캄캄한 가운데 비가 내리고 있었다. 호텔 밖에서 여자 혼자 서성대기가 멋쩍어 호텔 상점 쇼윈도를 들여다보면서 유리창에 비치는 상황을 살폈다. 7시가 되자 택시 한 대가 도착하고 최 과장과 최 지도원이 내렸다. 그동안 그들과 헤어져 여러 면에서 정신적으로 시달리다가 다시 만나니 뛸 듯이 반가웠다. 그들을 김 선생이 기다리는 호텔 로비로 안내하여 우리는 함께 811호실로 올라갔다.
도청장치에 대비하기 위해 텔레비전을 크게 틀어 놓은 뒤 최 과장은 제일 먼저 김 선생의 건강부터 물었다.
“어떻게 몸은 괜찮습니까? 별 지장 없었나요? 각별히 건강 조심하시오.”
“노정 계획에는 아직까지 변동은 없지요?”
그들은 형식적으로 몇 가지를 더 묻고 나에게는 폭파기재 작동방법은 잊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최 과장은 공항 면세점 같은 곳에서 물건을 싸주는 비닐 쇼핑백을 우리 앞에 내 밀었다.
나레이션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