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고백, 스물 세 번째-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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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고백, 스물 세 번째
김 선생이 비엔나 주재 북조선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사전에 약정한 대로 일본 말로 ‘나까무라상' 을 찾았다. 최과장과 통화가 이루어지자 비행기표 구입 상황, 베오그라드 메트로폴리탄호텔 예약 사실 등을 보고했다.
우리는 11월 27일 저녁 7시에 메트로폴리탄호텔 정문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비엔나에서 우리가 수행해야 할 과업은 일단 성공적이었다. 이제 다음 목적지 베오그라드에서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에 정리해 나갔다.
11월 23일.
우리가 비엔나를 떠나는 날이었다. 시간이 넉넉한데도 우리는 이른 아침부터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떠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바빴다. 즐거움으로 비엔나를 만끽하려는 여행이 아니다보니 일이 끝난 뒤에 괜히 보내는 비엔나 생활이 지겹기만 했다. 새로운 장소에 가서 새롭게 해야 할 과업만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오전 중에 비엔나 공항에 도착해 우리는 많은 시간 차를 마시며 비행기탑승을 기다렸다. 베오그라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베오그라드는 초행길이지만 조국에 있을 때 티토 대통령 시절의 영화를 통해서 보았기 때문에 낯설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북조선보다 잘 사는 사회주의 국가로서 호기심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베오그라드 행은 사정이 좀 달랐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 가면서도 걱정되고 경계되는 것은 우리가 북조선인의 신분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일본 관광객 행세를 하며 가는 점이었다. 파리, 스위스, 비엔나 등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일본 여권을 가지고 여행하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자본주의 국가 사람인 일본인으로 위장하면 검열이 더 심할 것 같아 걱정이었다. 계획을 세우면서도 일본 관광객은 위장 구실로 부자연스럽다고 지적되었으나 베오그라드에도 적은 숫자지만 일본인이 드나든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그대로 결정되었다.
우리는 비엔나공항에서부터 베오그라드로 떠나는 일본인이 우리 외에도 또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다른 때는 일본인과 만날까봐 걱정을 했는데 이번에는 그 반대 현상이었다. 저쪽에서 일본 고등학생의 무리가 파리행 대기실로 가고 있었다. 일본인으로는 우리 둘만 베오그라드행 대기실에 앉아 있자니 남들이 우리를 이상하게 볼 것 같아 온몸이 굳어져 왔다.
‘이런 여행은 일생에 다시 할 여행이 못되는구나.' 남달리 예민한 나로서는 행동 하나하나 스쳐가는 사람이 다 신경이 쓰였다. 이렇게 불안한 여행이라면 천국에 내려다 놓는다 한들 즐거울 것인가. 오후 2시 25분 우리는 비엔나를 떠났다.
베오그라드의 첫인상은 대체로 질서의식이 없다는 느낌이었다. 메트로폴리탄호텔은 특급은 안 되지만 1급 정도에는 속하는 듯했다. 우리가 투숙할 811호실은 시설이 낡고 약간 스산했다.
비엔나에서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까지 불과 1시간 반밖에 날아오지 않았는데 비엔나와 베오그라드는 너무나도 천지차이였다. 비엔나가 깨끗하고 아늑한 데 비해 베오그라드는 무질서하고 어둠침침하고 썰렁한 분위기였다. 공항에서부터도 그러했다. 베오그라드 공항에서는 일본인을 어떻게 대할까 하고 걱정도 되고 궁금하기도 했는데 의외로 입국 검열은 간단했다. 검열소에 일본 여권을 내미니 아무 말 없이 입국 도장을 찍어 주었다. 세관을 통과할 때도 우리에게는 그다지 까다롭게 굴지 않았다. 공항 청사에는 택시 운전사들이 공항 건물 안까지 들어와 서로 경쟁하며 손님을 끌었다. 미화 200불을 현지 돈으로 바꾼 뒤 문을 나서려는데 수염이 덥수룩한 젊은이가 우리 짐을 들어 주며 자기 택시로 안내했다. 그 택시는 택시 행렬 중 거의 마지막 순서였다. 메트로폴리탄 호텔 예약서를 보여 주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별로 힘들지 않게 메트로폴리탄호텔까지 올 수 있었다.
나레이션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