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고백, 열 아홉 번째-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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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고백, 열 아홉 번째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받은 나는 1984년도에 김선생으로부터 배운 대로 전화번호를 다른 사람이 알아볼 수 없도록 암호화하여 적었다. 모든 것을 나만 알아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우리가 떠나기 전날 저녁에는 전 지도원의 부인이 송편도 빚고 상을 크게 잘 차려냈다. 헝가리 특산 포도주인 ‘도가이'까지 내놓고 우리의 전도를 위해 축배를 들었다. 앞으로 민첩하게 행동하는 데 지장이 될 짐은 내놓고 되도록 간편히 하라는 지도원의 지시에 따라 불필요한 옷과 그곳에서 산 옷은 보자기에 싸서 맡겼다.
11월 18일 아침. 이날도 비가 내리다가 그친 흐린 날이었다. 일행 5명은 아침식사 후 전 지도원의 외교관 차 벤츠에 올랐다. 최 과장과 최 지도원은 열차편을 이용하기 위해 역전에서 먼저 내리며 우리는 비엔나에서 다시 연락하기로 기약했다. 차는 밭으로 연결된 벌판을 3시간 넘게 달려 오전 11시 20분경 헝가리 국경 초소에 도착했다. 헝가리 국경 초소는 박스식 시멘트 건물로 2개소가 있었으며 초소 앞에는 차단기가 내려져 있었다. 초소 직전에 휴게실이 보였다. 전 지도원이 차를 그곳에 주차시킨 후 북한 여권을 관리에게 제출하고 소속을 밟는 동안 나와 김승일은 휴게실에 들어가 기다렸다. 요즈음 부쩍 국경 단속이 심하다는 전 지도원의 말이 있어 더 한층 불안하고 긴장되었다. 20분쯤 휴식하면서 커피를 마시고 있자니 전 지도원이 아무 일 없이 여권 3권을 찾아왔다. 우리는 차단기를 지나 국경을 무사히 통과했다.
헝가리 국경 초소를 출발해 20~30분 정도 달려서 다시 오지리 국경 초소가 나타났다. 헝가리 초소보다는 아주 작은 초소였다. 차가 도착하자 국경 초소 경비원이 다가왔다. 우리는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전 지도원의 외교관 여권을 맨 위에 얹은 여권 3권을 제시했다. 여권으로 사증도 받지 않고 불법 입국하는 김 선생과 나는 차 뒷 자석에 앉아 잔뜩이나 긴장해 있었다. 경비원은 힐끗 처다보더니 우리를 통과시켜 주었다. 전 지도원의 호언장담대로 너무나 쉽게 해결되니 오히려 맥이 빠지고 싱거웠다. 오지리 국경을 통과한 후 전 지도원은 ‘하찌야 신이찌' 와 ‘하찌야 마유미' 명의의 일본 여권 2권을 김승일에게 넘겨주었다. “이제 오지리 땅에 왔으니 안심해도 좋습니다.”
김승일은 그 말에 매우 만족한 듯,
“처음부터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구만.” 하며 여권을 받아 챙겼다. 그가 기뻐하는 모습은 오래간만이었다. 가랑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였으나 한고비를 무사히 넘긴 흐뭇한 마음으로 잘 포장된 도로 위를 기분 좋게 달렸다. 길옆에 보이는 빨간 지붕의 서양식 집들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안락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오후 1시쯤 그전에도 와 본적 있는 비엔나 서역에 도착했다. 역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김승일 혼자 내려 서역 관광안내소에 호텔 예약을 하러 가고 전 지도원과 나는 차 안에서 주위를 감시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30분이 지나도 김승일이 돌아오지 않아 우리는 차 안에서 안절부절이었다. ‘혹시 김 선생이 어디에 쓰러진 게 아닐까? 누구에게 미행당하다가 붙들린 것일까?' 자꾸 방정맞은 생각이 들었다. 괜히 고집피우면서 혼자 가더니 결국 말썽을 일으키는구나 하고 그를 원망하기도 했다. 전 지도원은 초조해 하다가 나에게 가보라고 한다. 나는 서역 구내로 들어가 지하 호텔 예약소로 가보았으나 김 선생은 물론 다른 손님도 없었다. 나는 전 지도원에게 빨리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허겁지겁 1층으로 뛰어올라와 역 입구를 달려나갔다.
“마유미! 마유미!”
저쪽에서 김 선생이 마주 걸어오며 나를 불렀다. 김승일은 전 지도원과 내가 애태우며 걱정한 것도 모르고 태연히 걸어오고 있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