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고백, 열 세 번째-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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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고백, 열 세 번째
최과장은 작성한 선서문을 나에게 건네 주었다. 이런 엄숙한 선서 다지기는 처음이라서 마음이 졸였다. 선서문이 적힌 종이를 받아드는 내 손이 알게 모르게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우리는 응접실 벽에 걸려 있는 김일성 초상화 앞에 도열해 섰다. 나는 최 과장이 작성해 준 내용을 조용하게, 그러나 힘 있고 엄숙하게 읽어 내려갔다.
<적후로 떠나면서 다지는 맹세문> 지금 온 나라가 80년대의 속도로 사회주의 대 건설에 들끓고 있고 남조선혁명이 고조에 있으며 적들의 두 개 조선 조작 책동이 악랄해지고 있는 조건에서 적후로 전투 임무를 떠나면서 우리는 맹세합니다. 우리는 적후에서 생활하는 동안 언제나 당의 신임과 배려를 명심하고 3대 혁명 규률을 잘 지키고 서로 돕고 이끌어서 맡겨진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마지막까지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높은 권위와 위신을 백방으로 지켜 싸우겠습니다. 1987. 11.12 김승일 김옥화
이 글을 읽는 동안 나는 감격해서 눈물을 글썽였다. 정말 이 생명을 바쳐 이번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각오가 한층 다져지는 것을 느꼈다. 낭독이 끝난 다음 김승일과 나는 이름 옆에 수표하여 선서문을 최 과장에게 제출했다.
초대소 마당에는 우리가 타고 갈 벤츠 승용차가 시동을 걸어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이제 초대소를 떠나기 위해 자동차에 오르는 일만 남았다. 차에 오르기 전 밖에까지 따라 나온 초대소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건강하세요. 다녀오겠습니다.”
내가 인사를 하자 초대소 어머니는 눈가에 파진 주름결대로 눈물이 퍼졌다. 1984년도에 김승일의 서울 침투공작을 지원하기 위해 이곳을 떠날 때는 밝은 얼굴로 ‘잘 다녀오시기요' 하고 인사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초대소 어머니의 주름진 골을 따라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니 어려운 임무를 가지고 떠나는 내 마음이 한결 무거웠다. 전날은 휴식을 하면서 초대소 어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녀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아이구, 얼굴이나 못났으면 아깝지나 않을텐데....공부라도 좀 못하지 뭘 그렇게 열심히 해가지고.....그냥 좋은 신랑한테 시집가서 살면 좀 좋아?”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도 했다.
지금 돌아켜보면 초대소 어머니는 그의 오랜 경험을 통해 직감적으로 그것이 나와의 마지막 작별이라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나에게는 많은 초대소 식모 중에서도 ‘태월춘' 이라는 그 초대소 어머니가 제일 정이 든 사람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녀의 눈물을 마주 볼 수 없어 돌아서서 차에 올랐다. 우리 일행을 태운 벤츠는 동북리 2층 2호 초대소를 떠났다. 평양의 새벽길을 달리며 김승일의 표정은 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 평양 날씨만큼이나 어두웠다.
김승일의 표정이 침통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몸은 몸대로 쇠약해져 있었고 이번 노정에 대한 불만도 많았다. 게다가 임무는 그 많은 공작활동 중에서도 가장 큰 책임이 따르는 일이었으니 그의 표정이 밝을 리가 없었다.
김승일은 슬하에 7남매가 있는데 출가한 막내딸도 30살이 넘었다고 한다. 과거에 공작활동을 하다가 제대하고 사회에 나갔는데 1984년도에 다시 공작원으로 소환되었다. 1980년도 초에 담석증 수술을 받았고 몇 달 전에는 위 수술을 받았다. 1984년도에 처음 만났을 때는 초대소 부근 농저 저수지로 새벽 낚시를 가는 여유도 보였었는데 이번에는 건강 탓인지 날카로워져 걸핏하면 충돌만 일으켰다.
이제부터 임무 수행이 시작되려는 마당에 그의 침통한 표정은 나의 공작 사기를 저하시키는 요인이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