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고백, 열 여덟 번째-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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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고백, 열 여덟 번째
전 지도원은 또 오지리 가는 문제 때문에 외출하고 우리 일행은 시내 구경을 하려고 걸어서 집을 나섰다. 김 선생도 따라 나섰는데 얼마쯤 걷다가 목이 탄다며 찻집에 가자고 하여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셨고, 또 조금 가다가 목이 탄다고 여러 사람을 들볶았다.
최 과장은 귀찮은 말투로 “다음부터는 물병을 차고 다녀야겠소.” 하고 농말처럼 넘겼다. 김승일은 위 수술을 하여 소화 능력도 없는 사람이 매일 커피만 6~7잔씩 마셔댔다. 자고 눈만 뜨면 먼저 커피를 찾아 마시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내가 건강도 좋지 않으니 커피를 마시지 말라고 하면 “이제 다 살았는데 뭘.... 좋아하는 거나 실컷 마시고 가야지.” 하며 자포자기 하는 말로 고집을 피웠다. 김 선생 때문에 멀리 가지도 못하고 곧 초대소로 돌아왔다.
오후에는 전 지도원의 차로 외출했다. 저녁식사는 사자다리 건너 높은 언덕에 자리 잡은 힐튼호텔에 가서 양식요리로 하고 그 옆 관광지 부다의 궁전에 가서 사진도 찍었다. 이 궁전 부근에는 관광객을 상대로 전통 민속의상과 물건을 파는 행상들이 많았다. 인민들이 먹고 입고 쓰는 데 필요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먹고 입고 쓰는 생필품이 부족한 북조선에 살아서 그런지 늘 잡다한 필수품들이 관심을 끌었다. 영웅광장과 박물관에는 비엔나에서 온 관광객으로 붐볐다. 우리도 말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고 부근 백화점을 구경했다.
다음 날은 그 부근 극장에서 파리에서 온 쇼단 공연을 한다기에 전 지도원 부인과 갔다가 표가 매진되어 거리 구경만 하고 돌아왔다. 어느 공원 옆에 시장이 섰는데 그곳에는 별의별 것들이 다 있었다. 간식과 빵을 파는 매점도 있고 가방, 혁대, 의류 등 상품도 다양했다. 우리 북조선 사람들에게는 이런 여유 있고 풍부한 광경이 제일 부러웠다. 눈이 혹해서 이 물건 저 물건 만져 보자 최 과장이 집에서 입을 나일론 원피스를 하나 나에게 사주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어머니와 현옥이에게도 하나씩 보낼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내 마음을 읽었는지 전 지도원 부인이, “이런 물건들을 조국에 보내면 얼마나 좋아할까요?” 하고 거들었다. 전 지도원 말에 의하면 헝가리는 이제 반은 자본주의 반은 사회주의로 변해 버렸다고 한다. 그 다음 날은 전 지도원과 최 과장, 최 지도원이 함께 오지리 가는 방법을 알아보러 나갔다가 모두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됐어, 방법을 찾아냈다구.”
그 방법은 이랬다. 김승일과 김옥화는 비엔나로 갈 때는 노정에 대한 비밀 보장을 위해 사증 없이 들어가야 하므로 항공기나 열차는 이용할 수 없고 외교관 차인 전 지도원의 차를 이용한다. 최 과장과 최 지도원은 별도로 사증을 받아 열차편으로 비엔나로 들어가 오지리 주재 공화국 대사관에서 대기한다. 그리고 그동안 관광하면서 촬영한 필름을 모두 최 과장이 보관하고 최 지도원으로부터 공작조의 몫으로 공작금 1만 불을 받았다. 또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받아 먼저 김승일이 수첩에 기재한 뒤 나도 그 쪽지를 받아 수첩에 적어 넣었다.
부다페스트 164635 비엔나 892311 베오그라드 668793
원래는 이와 같이 되어 있었으나 나는 1984년도에 김선생으로부터 배운 대로 다른 사람이 알아볼 수 없도록 암호화하여 적었다. 부다페스트 전화번호 164635는 한자 주변에 점을 찍어 표시하되 한자 위의 점은 5로 기타 점은 1로 하여 표기하였다. 비엔나 전화번호 892311은 상품 가격으로 위장하여 와인의 첫 문자를 따고 앞의 세자리 수 892 뒤에 0을 임의로 세 개 쓰고 뒤의 세자리 수 311 뒤에는 00을 두 개 썼다. 베오그라드 전화번호 중 668739는 물건 값을 표시한 양 달러를 기재하고 그 중간에 의미 없는 250이라는 숫자를 달러 표시 없이 써넣어 기재하였다. 이 모든 것을 나만 알아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