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장 생활 (1945년) 」 Pachinko 파친코 [Book 1.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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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Book 1. 고향.
농장 생활.
1945년.
한수가 선자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시골로 가라고 일러 줘 딴 그날,
요셉은 일자리를 제의받았다.
그날 오후 일찍 친구의 친구가 요셉의 비스킷 공장에 들러서
나가사키의 제강소에서 조선인 근로자들을 관리해줄 감독관을 찾는다고 말했다.
남자들에게 방과 식사를 제공해주는 주거지가 있다고 했지만 가족은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봉급은 현재의 거의 세 배였다.
한동안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했다.
요셉이 새로운 일자리를 제의받아 들뜬 마음으로 집에 도착하자
경희와 선자도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한수의 손이 뻗어 있지 않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선자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해가 질 녘에 김창호가 여자들과 아이들을 다마구치의 농장으로 데려갔다.
다음 날 아침, 요셉은 비스킷 공장을 그만두고,
가방 하나에 짐을 꾸리고는 집을 잠갔다.
그날 오후, 요셉은 오사카로 오려고 혼자서 평양을 떠났던
마지막 여행을 떠올리며 나가사키로 향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폭격이 시작되고
한 번 시작된 폭격은 여름 내내 계속되었다.
한수는 비록 시기를 잘못 알았지만
동네가 잿더미로 변할 거라는 그의 말은 옳았다.
58세의 고구마 농장 주인인 다마구치는
군식구가 늘어도 신경쓰지 않았다.
정규직으로 일하던 노동자들과 계절마다 부리던 노동자들이 모두 수년 전에 징병당했고,
그들을 대체할 만한 몸 성한남자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전 노동자들 가운데 몇몇은 이미 만주에서 죽었고,
두 명은 전쟁에서 크게 다쳐서 불구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싱가포르와 필리핀으로 갔다는 소식이 드문드문 들렸다.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늙은 사람이 으레 그렇듯 온몸이 쑤셨다.
하지만 늙은 몸 덕분에 어리석은 전쟁터에 나가 싸우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남자 일꾼들이 부족해서 농장을 키우려는 그의 야망은 꺾이고 말았다.
특히 고구마를 수확하기 위해 일손이 많이 필요해지는 이 시기에는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다마구치는 그가 원하는 대로
불법적인 가격 인상을 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이미 돈맛을 본 그는 농장 곳곳에
귀중품들을 숨겨놓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이 나라의 재앙을 틈타 돈의 단물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낼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못할 일이 없었다.
다마구치는 밤낮으로 고구마 심을 땅을 일구고
씨앗을 심었지만 남자들이 없으면 끝없는 농장 일을 마칠 수가 없었다.
다마구치가 거둘 수밖에 없었던
결혼하지 않은 아내의 두 여동생은 쓸모없는 도시 처녀들이라 할 줄 아는 일이 없었다.
수다를 떨고 꾀병을 부리며 아내의 일을 방해하기만 하는 그들을
다마구치는 너무 오래 책임지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아내의 부모는 돌아가셔서 큰 짐은 줄은 셈이었다.
다마구치는 농사철에 마을 노인들과 여자들 고용했지만,
그들은 따뜻한 날씨에 씨앗을 심고 추운 날씨에 수확을 하는 게
힘들다고 끝없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피난처를 찾는 일본인들도 받아주지 않았던 다마구치는,
도시에서 온 조선인들을 고용하거나
농장에 묵게 해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고한수의 청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한수의 정보를 받자마자 다마구치와 과로에 시달리는 그의 아내 교코는
오사카에서 올 조선인 가족들이 지낼 수 있도록 헛간을 개조했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한 지 며칠도 지나지 않아
다마구치는 이 거래에서 더 큰 이익을 보는 사람이 자신임을 알아차렸다.
한수는 요리와 청소, 밭 일을 할 수 있는 건강한 여자 둘을 보내주었다.
거기에다 앞을 잘 보지 못할 뿐이지
땅을 파고 물건을 들어올릴 수 있는 남자도 있었다.
또한 영리한 남자아이 둘은 지시를 완벽하게 수행했다.
그들 조선인들은 많이 먹었지만 자기들이 쓸 생활비를 벌었고, 아무도 성가시게 하지 않았으며 불평도 하지 않았다.
첫날부터 다마구치는 노아와 모자수에게
암소 세 마리와 돼지 여덟 마리, 닭 서른 마리를 돌보고,
소 젖을 짜고, 계란을 모아 오고, 닭장을 청소하라고 시켰다.
남자아이들은 일본어를 모국어처럼 잘해서
시장에 데려가 물건 파는 일을 거들게 할 수도 있었다.
큰애는 셈을 잘했고, 원장을 작성할 정도로 글을 잘 썼다.
조선인 여자 둘은 훌륭한 주부에다 튼튼한 노동자였다.
날씬한 유부녀는 젊지 않았지만 상당히 예뻤고,
일본어 능력이 좋아서 교코가 요리와 세탁, 수선 일을 맡길 수 있을 정도였다.
키가 작은 여자는 과묵한 과부였는데
텃밭을 가꾸기도 하고 젊은 남자와 함께 들에서 일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한 쌍의 황소처럼 일했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다마구치는 긴장이 풀려다.
아내도 짜증이 덜 나는지 그와 여동생들을 타박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그들이 도착한 지 넉 달 후, 한수의 트럭이 해 질 무렵 농장으로 들어왔다.
한수가 나이 든 조선여자와 함께 트럭에서 내렸다.
다마구치가 한수를 맞이하러 달려갔다.
한수의 부하들이 저녁마다 도시에서 팔 물건들을 가지러 오기는 했지만 한수가 직접 오는 일은 드물었다.
"다마구치 씨." 한수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이 든 여자도 다마구치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여자는 한복을 입고 있었고, 양손에 천보따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고 사장님." 다마구치가 나이 든 여자에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여자의 나이가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자신보다 더 젊은 것 같기도 했다.
여자의 갈색 얼굴은 못 먹어서 핼쑥해 보였다.
"선자의 어머니 되시는 김양진 씨요.
오늘 일찍 부산에서 도착했소." 한수가 말했다.
"김양진 씨." 다마구치는 새 손님이 생겼음을 깨닫고
이름을 한 자 한 자 천천히 말했다.
두 아이의 엄마인 젊은 과부와 닮은 곳이 있는지 살펴보려고
여자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입과 턱이 약간 비슷했다.
여자의 갈색 손은 남자 손처럼 튼튼했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굵지 했다.
쓸 만한 일꾼이 틀림없다고 다마구치는 생각했다.
"선자 씨 어머니요?" 반갑습니다. 반가워요." 다마구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 눈을 내려뜬 양지는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지쳐 있었다. 한수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아이들은 어떤가요? 아이들이 말썽을 피우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그 애들은 아주 훌륭한 일꾼입니다.
멋진 아이들이에요." 다마구치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아이들이 그렇게 일을 잘 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다마구치는 자기 아이가 없던 터라 도시 아이들은 버릇이 없고
아내의 여동생들처럼 게으르다고 생각했다.
그가 살던 동네에서도 부유한 농부들은 자식들이 하나같이 어리석다고 불평했다.
그래서 다마구치와 그의 아내는 아이가 없어도
아이가 있는 다른 부모들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게다가 조선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도 몰랐다.
다마구치는 편견 이 심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가 개인적으로 아는 조선인은 고한수뿐이었고,
두 사람의 관계는 전쟁 때 맺어진 터라 평범하지 않았다.
다 아는 비밀이지만 몇몇 큰 농장들은 고한수와 그의 유통망을 통해서 도시의 암시장에 물건을 팔았고,
아무도 그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외국인들과 야쿠자들이 암시장을 지배했고, 상품 판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고한수를 돕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호의를 받으면 갚을 의무가 생기는 법이다.
그래서 농부 다마구치는 한수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다짐했다.
"고 사장님, 안에 들어가서 차 한잔하시지요.
목이 마르시겠어요. 오늘, 날이 아주 덥거든요."
다마구치가 집 안으로 걸어가서 자기 신발을 벗기도 전에
손님들에게 실내용 슬리퍼를 내주었다.
오래된 미루나무 그늘 덕분에 커다란 농장 안은 서늘하고 쾌적했다.
새 다다미에서 나는 상큼한 풀냄새가 손님들을 맞이했다.
삼나무로 둘러싸인 안방에는 다마구치의 아내 교코가
파란색 비단 방석에 앉아서 남편의 셔츠를 바느질하고 있었다.
아내의 두 여동생은 배를 깔고 엎드려서
발목을 교차시킨 채 수십 번 읽어서 내용을 다 외워버린 낡은 영화잡지를 남기고 있었다.
그 세 여자는 특별히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하나같이 다 잘 차려입고 있어서 농장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옷감을 배급받아야 하는 실정인데도 농부의 아내와 그 여동생들은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어 보였다.
교코는 교토 상인의 아내에게나 더 어울릴 법한 우아한 기모노를 입고 있었고,
그 여동생들은 상큼한 남색 치마와 블라우스를 입고 있어서
미국 영화에 나오는 여대생처럼 보였다.
여동생들이 누가 들어오는지 보려고
턱을 들어 올리자 멋스럽게 늘어뜨린 긴 앞머리 너머로 뽀얗고 예쁜 얼굴이 드러났다.
전쟁이 터지면서 값비싼 보물들이 다마구치의 집으로 들어왔다.
귀한 족자와 직물들,
다마구치 집안 여자들이 다 입을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기모노,
옻칠한 장롱, 보석, 접시 등 고구마 한 자루 또는 닭 한마리와 바꾸려고
도시 사람들이 서슴없이 내놓는 가보들이 다마구치 손에 들어왔다.
하지만 아내의 여동생들은 도시 생활을 열망했다.
그들은 새로운 영화와 간사이 지방의 가게들,
깜빡거리지 않는 전등이 있는 곳에서 살고 싶어 했고
전쟁과 끝없는 푸른 들판,
평범한 농장 생활을 질려 했다.
배부르고 등 따습게 잘 곳이 있는 그들은
기름 전등 냄새와 물건 가격 이야기 밖에 할 줄 모르는
시골뜨기 형부를 경시했다.
미국인들의 폭탄이 영화관과 백화점,
두 사람이 좋아하는 과자가게를 불태워버렸지만
그들은 여전히 화려한 도시 생활의 즐거움을 떠올리며 불만만 늘어놓았다.
두 사람은 검소하고 희생적인 언니에게 매일 불평만 퍼부었다.
그들이 시골뜨기와 결혼한다고 조롱했던 그 언니가
그들의 지참금으로 쓸 금과 기모노를 마련해 놓았는데도
두 사람은 고마움을 몰랐다.
다마구치가 목청을 가다듬자
여자들이 일어나 앉아 마치 바쁘게 해야 할 일이라도 있는 양 굴었다.
여자들은 한수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
조선인 여자의 더러운 치맛단을 노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양진은 세 여자에게 깊숙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집 안으로 초대받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에 문 옆에 머물렀다.
양진은 부엌에서 일하는 여자의 구부정한 등을 약간 볼 수 있었지만
그 사람이 선자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한수도 부엌에서 일하는 여자를 발견하고 다마구치 아내에게 물었다.
"선자 씨가 부엌에 있습니까?" 교코가 다시 한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고한수라는 조선인은 너무 오만한 것 같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남편에게 그 남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교코는 잘 알고 있었다.
"고 사장님, 어서 오세요.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반가워요."
교코가 일어나면서 말했다. 여동생들에게 꾸짖는 눈길을 보내자
그녀들도 일어나서 손님에게 인사를 했다.
"부엌에서 일하는 여자는 경희 씨예요. 선자 씨는 들에서 곡식을 심고 있어요.
앉으세요. 마실 만한 시원한 것을 갖다드릴게요."
교코는 막내 동생인 우메를 돌아보았다.
우메가 시원한 우롱차를 가지러 부엌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한수는 짜증을 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선자가 일은 하리라고는 예상했지만 바깥일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교코는 한수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부인, 따님을 보고 싶으시겠어요.
다코, 이 부인을 따님에게 안내해드리겠니?"
둘째인 다코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그 말을 순순히 따랐다.
교코에게 반항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랬다가는 교코가 며칠 동안 앙심을 품고서 벌로 말 한마디 안하고 자신을 괴롭힐 테니까.
한수가 양진에게 조선어로
선자에게 데려다줄 거라면서 여자를 따라가라고 했다.
다코는 돌을 깔아놓은 입구에서 신발을 신다가
늙은 여자의 시큼하고 특이한 냄새를 맡았다.
이틀 동안 먼 길을 온 터라 냄새가 더 지독하게 났다.
다코는 더럽다고 생각하면서 재빨리 여자를 앞질러 갔다.
다코는 할 수 있는 한 여자와 거리를 많이 두고 걸었다.
교코는 우메가 부엌에서 가져온 차를 따르고 나서
남자들끼리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우메와 함께 자리를 비켜주었다.
다마구치가 한수에게 전쟁 소식을 물었다.
"그다지 오래 가지 않을 거요. 독일이 패했고, 미국이 치고 올라오고 있소.
일본은 이 전쟁에서 질 거요. 그때가 언제가 될지가 문제일 뿐이요."
한수는 유감이나 기쁨의 빛 하나 내비치지 않은 채 말했다.
"훌륭한 남자아이들이 더 많이 죽기 전에
이 미친 짓을 일찌감치 끝나는 게 좋을 텐데 말이요. 그렇지 않소?"
"네, 네, 그렇죠." 다마구치가 힘없이 속삭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 다마구치는 일본이 이기기를 바랐다.
하지만 한수는 현실을 정확히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다마구치는 설사 일본이 이기지 못하더라도
전쟁이 아직은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고구마를 발효 시켜 비행기 연료로 쓴다는 말이 있었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정부가 값을 조금만 쳐주거나
아예 값을 지불하지 않더라도 암시장에서 고구마 가격을 더 높이 부를 수 있었다.
도시 사람들은 식품과 술을 절박하게 구하고 있었으니까.
한두 번만 더 고구마를 수확하면
근처의 넓은 땅덩어리 두 개를 살 만한 금을 모을 수 있었다.
이 지역 남쪽 땅 전체를 통째로 가지는 것은 할아버지의 가장 큰 소망이었다.
한수가 다마구치의 몽상을 방해했다.
"그래, 어떻소? 그 사람들을 데리고 있는 게?"
다마구치가 호의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그 사람들에게 그렇게 많은 일을 시키고 싶지 않지만 아시다시피 일손이 딸려서 . . . "
"그들은 일하러 온 사람들이요." 한수가 안심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마구치가 숙식을 제공하면서
그보다도 훨씬 큰 이익을 챙기고 있을 게 분명했지만,
선자와 선자의 가족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지만 않으면 상관없었다.
"오늘 밤 여기 묵으실 건가요? 떠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니
저희와 함께 저녁을 드시죠. 경희 씨는 아주 훌륭한 요리사예요."
다마구치가 말했다.
다코는 늙은 여자를 멀리까지 데려다줄 필요가 없었다.
양진이 드넓고 짙은 들판에서 허리를 굽혀 일하는 딸을 발견하자마자
긴 치마의 끝단을 움켜쥐고
딸을 향해서 최대한 빠르게 달려갔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달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선자는 씨앗을 심다가 고개를 들었다.
빛바랜 하얀 한복을 입은 작은 여자가 달려오고 있었다.
선자는 괭이를 떨어뜨렸다.
작은 어깨에 목 뒤로 쪽 지어 올린 회색 머리,
부드러운 직사각형 모양으로 단정하게 메어놓은 짧은 저고리 매듭. 엄마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선자는 고구마 밭을 밟으며 엄마에게 다가갔다.
"아이고, 내 세끼, 아이고, 우리딸." 선자는 엄마를 끌어안았다.
저고리 천 아래로 엄마의 앙상한 쇄 골 . . . (recording error, missing text) . . . 무척 수척해져 있었다.
한수는 저녁을 빨리 먹고 나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려고 헛간으로 갔다.
다마구치 가족들이 자신 때문에 소란을 피우는 게 싫어서
그들과 함께 식사를 했을 뿐이었다.
한수는 선자를 포함한 선자의 가족들과 식사를 하는 게 더 좋았지만
다마구치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식사하는 동안 한수는 내내 선자와 노아 생각만 했다.
그들과는 식사를 함께한 적이 없었다.
왜 그런지는 자신도 설명하기 힘들지만
한수는 그저 그들과 함께 있고 싶었다.
헛간에 들어갔을 때 한수는 경희가 다마구치의 부엌에서
두 종류의 저녁식사를 준비했음을 깨달았다.
하나는 다마구치 가족을 위한 일본식 식사였고,
하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조선식 식사였다.
조선인들은 헛간에서 김창호가 남은 나무기둥으로 만들어준
나지막한 탁자에 기름먹인 천을 깔고서 식사를 했다.
선자는 막 설거지를 끝낸 참이었다.
한수가 들어가자 모두가 고개를 들어 쳐다 보았다.
밤에는 가축들이 훨씬 더 조용해졌지만
그렇다고 동물 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가축 냄새가 한수의 기억보다 훨씬 더 지독했지만
한수는 그 냄새에도 곧 익숙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헛간 뒤쪽에 머물렀고, 가축들은 헛간 앞쪽 가까이에 있었다.
김창호가 나무 칸막이를 설치해서
남자아이들과 함께 칸막이 한쪽에서 잠을 잡고, 여자들은 다른 쪽을 차지했다.
선자 둘을 양옆에 끼고 바닥에 앉아 있던 양진이 일어나서
한수 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농장으로 오는 길에 양진은 한수에게 수차례 고맙다고 인사했고,
가족과 상봉한 지금도 당황스러워하는 손자들을
꼭 붙든 채로 끊임없이 감사하다고 말했다.
양진은 나이 든 조선 여자답게 목청 크게 울었다.
경희는 아직도 농장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설거지를 끝내면 한수가 묵을 손님방을 준비할 것이다.
김창호는 목욕탕으로 사용하는 헛간 뒤쪽에 오두막에서
모두가 목욕할 물을 데우느라 바빴다.
경희와 김창호는 선자가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선자의 저녁 일거리를 대신해주었다.
한수가 왜 양진을 조선에서 데려오는 수고를 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양진이 울고 있을 때 선자는 한수를 살펴보았다.
그녀의 인생에서 한수도 떠난 적이 없었던 저 남자를 선자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수는 남자아이들 맞은편에 있는 두툼한 건초더미에 앉았다.
"저녁은 충분히 먹었니?" 한수가 유창한 조선어로 아이들에게 물었다.
한수가 조선어를 너무 잘하자
남자아이들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두 아이는 할머니를 모셔온 남자가 일본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너무 잘 차려입은 데다 다마구치 아저씨가 정중하게 대했으니까 말이다.
"네가 노아구나." 한수가 노아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말했다.
"열두 살이지?" / "네!" 노아가 대답했다.
남자는 아주 좋은 옷에 아름다운 가죽 구두를 신고 있었다.
판사나 영화에 나오는 중요한 인물처럼 보였다.
"농장에서 일하는 건 어떠니?" / "좋아요."
"전 곧 있으면 여섯 살이 돼요."
모자수가 형이 말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불쑥 끼어들었다.
"여기서는 밥을 많이 먹어요.
전 밥을 몇 그릇이고 계속 먹을 수 있어요.
다마구치 아저씨가 잘 먹어야 쑥쑥 큰다고 하셨어요.
고구마가 아니라 밥을 먹으라고 했어요!
아저씨도 밥을 좋아하세요?"
모자수가 한수에게 물었다. "노아 형이랑 오늘 밤에 목욕을 할 거예요.
오사카에서는 목욕을 자주 못했어요.
전 농장에서 목욕하는 게 더 좋아요.
여기 욕조가 목욕탕 욕조보다 훨씬 더 작거든요.
목욕하는 거 좋아하세요? 물이 너무 뜨겁지만 곧 익숙해져요.
물에서 나오지 않으면
손가락 끝이 할아버지처럼 쪼글쪼글해져요."
모자수가 눈을 크게 떴다. "전 아직 어려서 얼굴에 주름이 없어요."
한수가 웃었다.
어린 동생은 노아처럼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아주 자유분방한 아이 같았다. "여기서 잘 먹고 있다니 기쁘구나.
좋은 소식이야. 다마구치 아저씨가 그러는데,
너희들이 아주 훌륭한 일꾼이라고 하더구나."
"감사합니다, 아저씨." 모자수는 이렇게 대답하고
남자에게 더 많은 질문을 하려고 했지만
남자가 형에게 말을 거는 바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넌 무슨 일을 하니 노아야?" / "여기 마구간을 청소하고 동물들 먹이를 주고, 닭을 돌봐요.
시장에 갈 때는 다마구치 아저씨를 위해서 장부를 작성하고요.
"학교가 그립니?" 노아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산수 문제 풀기와 일본어 쓰기가 그리웠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조용히 숙제를 할 수 있었던 그때가 그리웠다.
농장에서는 책을 읽을 시간이 전혀 없었고, 갖고 있는 책도 없었다.
"넌 아주 훌륭한 학생이었다고 들었어."
"작년에는 학교에 많이 가지 못했어요."
학교 수업은 자주 취소되었다.
다른 남자 아이들과는 달리 노아는 총검 훈련과 무의미한 공습 훈련이 싫었다.
요셉 큰 아버지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농장이 도시보다 훨씬 좋은 것은 적어도 이곳 농장에서는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농장에서는 비행기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공습 대피 훈련도 훨씬 적었다.
식사는 풍성하고 맛있었다.
매일 계란을 먹을 수 있었고 신선한 우유도 마실 수 있었다.
또 잠을 깊이 자고 기분 좋게 일어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면 학교로 돌아가겠구나.
그러고 싶니?" 한수가 물었다.
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자는 전쟁이 끝난 후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기분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영도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엄마가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고 했다.
정부가 집주인에게 세금을 부가해서
집주인이 건물을 일본인들에게 팔아버렸다는 것이었다.
일하던 복희 자매는 만주의 공장으로 일하러 갔는데 그 후로 소식이 없었다.
한수가 양진을 찾아냈을 때 양진은 부산에서 가정부로 일하며 창고 에서 잠을 자는 신세였다.
한수가 윗옷 주머니에서 만화책 두 권을 꺼냈다.
"이거 받아라." 노아가 엄마한테 배운 대로 두 손으로 책을 받았다.
조선어로 된 책이었다. "감사합니다."
"조선어를 읽을 수 있니?" / "아뇨."
"배울 수 있을 거야." 한수가 말했다.
"큰엄마가 이 책 읽는 걸 도와줄 수 있어요.
큰아버지는 여기 없지만 다음번에 만나면
큰아버지를 깜짝 놀라게 해줄 수 있어요." 모자수가 말했다.
"너희들은 조선어 읽는 법을 알아야 해.
언젠가는 돌아갈지도 모르니까." 한수가 말했다.
"네, 아저씨." 노아가 말했다.
노아는 조선이 평화로운 땅이 되어
자신이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갈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아버지는 자신이 자랐던 평양은 아름다운 도시였고,
엄마의 고향인 영도는 청록빛깔 바다에
물고기가 풍부한 평화로운 섬이었다고 말하곤 했다.
"아저씨는 어디서 오셨어요?"
노아가 물었다.
"제주도. 너희 엄마가 태어난 부산에서 멀지 않은 곳이야.
화산섬이지. 거기에는 귤도 있어.
제주 사람들은 신들의 후손들이란다." 한수가 윙크를 했다.
"언젠가는 제주에 데려가주마."
"난 조선에서 살기 싫어요. 여기 농장에서 살고 싶어요." 모자수가 소리쳤다.
선자가 모자수의 등을 토닥였다.
"엄마, 우리는 여기 농장에서 영원히 살아야 해요.
큰아버지도 곧 오실 거예요. 그렇죠?"
모자수가 물었다. 그때 경희가 일을 끝내고 들어왔다.
모자수는 만화책을 들고 경희에게 달려갔다.
"이거 읽어주실 수 있어요?" 경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아야, 이리 와. 이 책을 읽어 줄게."
노아는 한수에게 재빨리 인사를 하고 경희와 모자수에게 갔고
양진은 선자를 혼자 남겨둔 채 노아를 따라갔다.
선자가 일어서려고 하자 한수가 앉으라고 몸짖했다.
"가지 마." 한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잠깐만 여기 있어.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어."
"잘 지냅니더. 감사합니더." 선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엄마를 데려와주셔서 고맙십니더."
선자가 말했다. 뭔가 더 말을 해야 했지만 그게 어려웠다.
"엄마 소식을 물어봤잖아.
그래서 엄마를 여기로 모셔오는 게 낫겠다 싶었지.
일본 상황이 아주 안 좋지만 지금은 조선 상황이 더 나빠.
전쟁이 끝나면 좋아지겠지. 하지만 안정되기 전까지는 상황이 좋지 않을 거야."
"그게 무슨 말입니꺼?"
"미국인들이 이기면 일본인들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조선에서 철수하겠지만 그러면 누가 조선을 손에 넣겠어?
일본인들에게 붙었던 조선인들은 어떻게 될까?
혼란이 일어날 거야.
유혈 사태가 더 많이 일어나겠지. 너도 그런 곳에는 있고 싶지 않을 거야.
네 아이들이 그런 곳에서 사는 건 더 싫을 거고."
"당신은 우째 할 건데예?" 선자가 물었다.
한수가 선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난 내 자신과 내 사람들을 돌볼 거야.
내가 정치인들에게 내 목숨을 맡길 거라고 생각해?
책임자들은 아무것도 몰라. 알아도 신경 쓰지 않지."
선자는 한수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한수의 말이 옳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왜 그를 믿어야 한단 말인가?
선자가 양손을 바닥에 짚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한수가 고개를 저었다.
"나와 얘기 하는 게 그렇게 힘들어?
제발 앉아." 선자는 다시 앉았다.
"저는 아이들을 돌봐야 합니더. 제 사정을 좀 이해해주이소."
아이들은 만화책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경희는 감정을 실어서 만화책을 읽어주었고,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양진도 주인공들의 어리석은 이야기에 아이들과 함께 웃었다.
다들 만화책에 푹 빠져서 얼굴 표정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내가 도와줄게. 돈 걱정을 할 필요도 없어. 다른 것도 . . . " 한수가 말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어서 당신 도움을 받고 있지만예,
전쟁이 끝나면 제가 일해서 아이들을 돌볼 낍니더.
지금도 생활비를 벌려고 일하고 있고 . . . "
"전쟁이 끝나면 집도 구해주고,
아이들을 돌볼 수 있게 돈도 줄게.
아이들을 소똥을 치울 게 아니라 학교에 가야 해.
당신 엄마와 언니도 같이 지낼 수 있어.
당신 아주버니에게 좋은 일자리도 구해줄 수 있고."
"가족들한테는 뭐라 하고예? 당신 얘기를 밝힐 수는 없어예." 선자가 말했다.
선자는 항상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한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선자는 그가 자신을 더 이상 원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선자는 먹여 살리고 교육시켜야 하는 아이가 둘이나 딸린
스물아홉 살의 과부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나이가 많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의 자신을 원하는 남자가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예전에도 아름다웠던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더더욱 매력적이지 않았다.
선자는 평범한 얼굴의 시골 여자였고,
피부는 햇살에 노출되어 얼룩덜룩 해졌으며 주름도 많아졌다.
튼튼하고 건장한 몸집은 소녀시절 보다 더 커졌다.
선자는 인생을 살면서 두 남자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 사랑을 다시 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이제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가끔씩 선자는 자신이 언젠간 쓸모없어질 튼튼한 농장의
가축이 된 것 같다고 느꼈다.
그런 날이 오기 전에, 자신이 떠나고 없어도
아이들이 잘 살 수 있도록 준비해주어야 했다.
"당신도 아이들이 있지예?" / "딸이 셋 있지."
"당신 딸들이 저에 대해 알면 뭐라 하겠어예?
우리 사이를 알믄예." 선자가 속삭였다.
"내 가족은 너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 / "알겠심더."
선자는 입술이 말라서 침을 삼켰다.
"이렇게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 고마워예.
그치만 전쟁이 끝나면 다른 일을 찾아서 아이들하고 엄마를 부양할 거라예.
더 이상 일할 수 없을 때까지 일할 깁니더."
선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에 묻은 건초를 털어냈다.
선자는 숨을 제대로 쉬기가 어려워 한수한테서 등을 돌리고는
황소들을 쳐다봤다.
영원한 고통의 빛으로 가득한 황소들의 커다랗고 짙은 눈을 바라보며 선자는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 이야기를 들었을까?
다행히 다른 사람들은 만화책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선자는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쌌다.
손을 씻었는데도 손톱 가장자리가 여전히 흙에 물들어 누렇게 변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