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나날, 서른 세 번째-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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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날, 서른 세 번째
주사약이 흘러들어가고 담요를 포근하게 덮어주자 피곤함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듯했다. 평양을 출발해 지금까지 깊은 잠을 자본적도 없었고 계속 긴장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내 몸은 사실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피곤하기는 했으나 잠은 오지 않았다. 혹시 조선 말로 잠꼬대라도 할까봐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내가 눈을 꼭 감고 전혀 움직이지를 않자 특무들은 내가 잠들었는 줄 알았는지 소곤소곤 작은 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의 소근대는 말소리에 더욱 내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사람이 겉보기에는 숲속에 잠든 공주같지 않아?”
나에 대한 무슨 비밀스런 이야기나 나누는가 해서 귀를 기울여 들으니 얼토당토않은 대화였다. 숲속의 공주라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숲속에 잠든 공주란 무슨 뜻인가? 어떤 뜻인가? 여기는 엄연히 비행기 안인데 숲속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그들끼리 사용하는 암호가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그때 그 말이 너무나 궁금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나중에 모든 것을 자백하고 나서 수사관들과 친해졌을 때 ‘숲속에 잠든 공주'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러자 수사관들은 어이없이 웃기만 하고 아무 말도 대답을 해주지 않다가 <백설공주> 라는 동화책을 사다주었다. 그 책을 보고 나서 나 역시 그 질문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혔다. 조선 사람이라고 다 같은 조선 사람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었다.
북에서는 1970년대 초 김정일이 등장한 이후 동화책이 사라졌다. 아동들이 읽을 수 있는 책은 김일성의 덕성에 관한 책과 전쟁이야기 뿐이다. 재미있고 아름답고 고운 심성을 가질 수 있는 꿈의 세계를 그린 책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1987년경에야 외국 동화책을 조금씩 번역해서 내놓았는데 남조선에 비하면 그 내용이나 종이의 질이나 인쇄 기술이 형편없다.
1987년도에 내가 룡성 40호 초대소에 있을 때 그곳 식모가 집에 다녀오면서 <천 날 밤의 이야기> 라는 동화책을 가져왔다. 그 아주머니는 집에 갔다가 아이들이 보는 책을 무슨 책인가 보았더니 너무 재미가 있어서 가지고 왔다고 나에게 읽어보라고 했다. 같이 훈련받던 숙희와 돌려보았다. 어찌나 재미있던지 두 번씩이나 읽었다.
포도당 주사를 다 맞고 다시 좌석에 데려다 앉혀 주며 어떤 남자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우리는 당신이 북에서 왔다는 것을 다 알고 있어요. 대한민국에 가면 60년대, 70년대, 80년대에 북으로부터 귀순해 온 북조선 출신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속이려 해도 속일 수가 없어요.”
남자의 말은 크지 않았지만 내 귀에 너무나 큰소리로 들렸다. 표정과는 달리 말 내용은 다분히 위협조였다. 이런 자극적인 말을 알아듣고도 못 알아들은 척하자니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무심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쓰면 쓸수록 얼굴은 경련이 일어날 것처럼 굳어졌다. 나는 방법을 바꾸어 내 의지를 더욱 굳히고 이들의 간교한 꾀에 빠지지 않으려고 속으로 혁명가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민중의기 붉은 기는 전사의 시체를 싼다 시체가 식어 굳기 전에 혈조는 깃발을 물들인다.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그 밑에서 굳게 맹세해 비겁한자야 갈라면 가라 우리들은 붉은 기를 지키리라
속으로 ‘적기가'를 부르다가 이럴 때는 오히려 ‘유격대 행진곡' 이 제격이다 싶어서 마음속으로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