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아의 아버지 」 Pachinko 파친코 [Book 1.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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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Book 1. 고향.
노아의 아버지.
또다시 한수가 옳았다.
전쟁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끝났지만 한수조차도 그 마지막 폭탄 투하는 예상하지 못했다.
요셉은 벙커 덕분에 최악의 사태를 면하기는 했지만
거리로 나왔을 때 불에 타 무너지는 판자집 벽이
요셉의 오른쪽 어깨를 덮쳤다.
불길에 휩싸인 요셉은 공장의 누군가가 달려와 겨우 구해냈다.
한수의 직원들은 나가사키의 형편없는
한 병원에서 마침내 요셉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대는 길었던 계절이 끝나고
숨 막히게 조용한, 별이 많은 저녁이었다.
그날 밤, 한수가 요셉을 미군용 트럭에 태워서
다마구치의 농장으로 데려왔다.
모자수가 처음으로 트럭을 발견했고,
그 작고 재빠른 남자아이는 죽창을 가져오려고 돼지우리로 달려갔다.
나머지 식구들은 반쯤 열린 헛간 문 앞에 서서 다가오는 트럭을 지켜보았다.
"여기 있어요." 모자수가 속이 빈 죽창들을 엄마와 할머니, 형, 큰 엄마에게 건넸다.
김창호는 목욕을 하고 있었다.
모자수가 형에게 속삭였다.
"목욕하고 있는 아저씨를 데려와야 해.
아저씨에게 무기도 갖다주고."
모자수는 김창호에게 줄 죽창을 노아에게 하나 건네 주고,
자신도 하나 챙겼다.
노아에게서 물려받은 구멍 숭숭 뚫린 스웨터가
모자수의 작업용 바지 위로 느슨하게 늘어져 있었다.
모자수는 여섯 살치고는 키가 컸다.
"전쟁은 끝났어." 노아가 모자수에게 단호하게 상기시켰다.
"한수 아저씨 사람들을 거야. 다치기 전에 그거 내려놔."
트럭이 멈춰 섰고, 한수 밑에서 일하는 조선인 두 사람이 요셉을 실은 들것을 꺼냈다.
요셉은 붕대를 감은 채 진정제에 완전히 취해 있었다.
경희가 들고 있던 죽창을 떨어뜨리더니
휘청거리다 모자수의 어깨를 잡았다.
한수가 트럭 조수석에서 걸어 나왔고,
연한 적갈색 머리의 미군 운전사가 그 뒤에 섰다.
모자수는 군인을 흘낏거렸다. 운전사는 얼굴에 주근깨가 있었고,
노란빛이 도는 붉은 머리가 마치 불꽃처럼 보였다.
비열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고,
한수 아저씨도 그 군인을 두려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오사카에서 주민연합 지도자였던 하루 아저씨는
동네 아이들에게 미국인들이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이니까
미군을 보면 도망쳐야 한다고 경고했다.
차라리 자살하는 것이 잡히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운전사는 자신을 바라보는 모자수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고르고 하얀 이를 드러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경희가 천천히 들것을 향해 다가갔다.
경희는 요셉의 화상 입은 모습을 보자마자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폭탄 투하에 관한 끔찍한 소식을 들었지만 경희는 요셉이 살아 있다고 믿었고,
자신에게 소식도 알리지 않고 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경희는 항상 요셉을 위해 기도해왔고,
요셉이 드디어 집으로 돌아오기는 한 것이다.
경희가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일어설 때까지 모두가 침묵했다.
심지어는 김창호도 울고 있었다.
한수가 울고 있는 경희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종이에 싼 커다란 꾸러미와 미제 군용 화상 약통을 건넸다.
"거기에 약이 있습니다.
작은 숟가락에 덜어서 물이나 우유를 섞어 밤에 발라주면 잠들 수 있을 겁니다.
약이 떨어지면 더 이상은 구할 수 없으니까 조금씩 아껴서 발라야 합니다.
그가 약을 더 달라고 해도 오래 쓰려면 아껴야 한다고 말해주세요."
"그게 뭔데요?" 경희가 물었다.
선자는 경희 옆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한 겁니다. 통증을 줄여주죠.
하지만 계속 사용하는 건 좋지 않아요.
중독되거든요. 붕대는 계속 갈아주세요.
반드시 살균도 해야 합니다.
붕대를 삶아서 사용하세요. 이 안에 붕대가 더 있어요.
피부가 팽팽해질 거니까 바르는 약이 필요할 겁니다.
할 수 있겠어요?"
경희가 여전히 요셉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요셉의 입과 뺨은 동물에게 잡아 뜯긴 것처럼 반쯤 사라지고 없었다.
요셉은 가족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던 사람이었고
가족을 위해 돈을 벌러 나갔기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한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저희를 위해 이 모든 일을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경희가 한수에게 말했지만 한수는 고개를 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농장주와 할 이야기가 있다며 돌아섰다.
김창호도 한수를 따라서 농장주의 집으로 향했다.
여자들과 남자들은 들것을 운반하는 사람들을 따라서
헛간으로 들어가 비어 있는 마구간 한 칸에 요셉의 자리를 마련했다.
경희가 자기의 요를 그곳으로 옮겼다.
잠시 후, 한수와 그의 부하들이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났다.
농장주는 조선인이 한 명 더 늘었다고 불평하지 않았다.
다른 조선인들이 자기들 몫뿐만 아니라
요셉의 몫까지 일을 했기 때문이다.
수확기가 다가오고 있어서 농장주는 그 조선인들이 필요했다.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다마구치는 머지않아 그들이 떠나기 위해서 돈을 달라고 할 것임을 감지했다.
그래서 그들이 고향으로 떠나기 전에
그들에게 가능한 많은 일을 시킬 작정이었다.
농장주는 조선인들에게 원하는 만큼 머물러 있어도 된다고 했는데,
그 말은 진심이었다.
다마구치는 그동안 전역한 군인들을 일꾼으로 고용했었는데
그들은 더러운 일이라고 불평했고, 외국인들과 함께 일하지 않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모든 조선인들을 일본인 전역 군인들로 대체할 수 있다 하더라도
고구마를 시장에 내놓으려면 한수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 조선인들을 모두 농장에 머물게 해주었던 것이다.
운송 트럭이 정기적으로 들어왔지만 한수는 몇 주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요셉은 고통에 시달렸다.
오른쪽 청력도 잃어버렸다.
요셉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거나 통증에 울부짖었다.
가루약을 다 써버렸는데도 요셉의 상태는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요셉은 저녁마다 아이처럼 울었지만 아무도 도와줄 수가 없었다.
그는 낮 동안에는 농기구를 수리하거나 고구마를 분류하면서
농장 일을 도우려고 했지만 통증이 너무 심해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술을 싫어하는 다마구치가 가끔씩 안타까운 마음에
요셉에게 사케를 조금 주었다.
하지만 경희가 다마구치에게 사케를 좀 더 달라고 간청하자 다마구치는 더 줄 수 없다고 했다.
자기가 인색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자기 땅에 술주정뱅이를 둘 수는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 달 후, 한수가 돌아왔다. 오후의 햇살이 조금 약해지고,
일꾼들이 점심을 먹고 교대를 하려고 막 돌아왔을 때였다.
요셉은 서늘한 헛간에서 짚을 채운 요에 혼자 누워 있었다.
요셉은 발자국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베개 위로 내려놓았다.
한수가 요셉 앞에 커다란 상자 두 개를 내려놓고,
의자 대용으로 쓰는 요 옆에 커다란 나무판 위에 앉았다.
잘 재단된 양복에 광을 낸 구두를 신고 있었음에도
한수는 지독한 가축 냄새와 찬 기운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편안해 보였다.
"당신이 노아 아버지죠?" 요셉이 물었다.
한수는 남자의 흉터가 진 얼굴을 살펴봤다.
한때는 날렵하게 깎아져 내렸던 턱 선이 울퉁불퉁해져 있었고
오른쪽 귀는 꽉 오므라든 꽃봉우리 같았다.
"그래서 이 모든 일을 해주는 거군요."
"노아는 제 아들입니다." 한수가 말했다.
"당신에게 빚을 졌어요.
우리는 그 빚을 갚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한수는 눈썹을 치켜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은 언제나 적게 하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그 아이 곁에 있을 권리는 없어요.
내 동생이 그 아이에게 이름을 줬어요.
그 아이는 이 사실을 몰라야 합니다."
나도 그 아이에게 이름을 줄 수 있어요."
"이미 이름이 있는 아이입니다."
그 아이에게 이런 짓을 하는 건 잘못된 일이에요."
요셉이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만 움직여도 통증이 느껴졌다.
노아는 이삭과 그 행동거지가 똑같았다.
이삭처럼 차분한 어조로 말했고,
식사를 할 때도 음식을 조금씩 단정하게 씹어 먹었다.
노아는 이삭과 똑같이 행동했다.
누가 하라고 시키지 않았는데도 시간이 날 때마다 학교에서 가져온 낡은 공책을 꺼내서 글을 썼다.
요셉은 저 야쿠자가 노아의 생부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노아의 얼굴 위쪽이 한수와 똑 닮았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노아도 눈치를 챌 것이었다.
경희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설령 경희가 진실을 짐작했다 하더라도
이제는 친자매보다 더 가까워진 선자를 보호하려고 그 사실을 숨기려고 할 것이다.
"당신한테 아들이 없군요."
요셉이 또 다른 사실을 짐작해서 말했다.
"당신 동생은 친절하게도 선자를 도와줬어요. 하지만 나는 선자와 내 아들을 돌볼 수 있었습니다."
"선자가 원하지 않았군요."
그녀를 돌봐주겠다고 했지만 선자는 조선에서 제 현지처로 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저한테는 오사카에 일본인 아내가 있었으니까요."
요셉은 등을 대고 누워서 헛간 지붕을 응시했다.
들쭉날쭉한 불빛 조각들이 기둥에 부딪혀 깨지는 것이 보였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먼지 기둥들이 대각선을 그리며 위로 떠올랐(다 . . recording error)
화상을 입기 전에는 그런 사소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누군가를 미워하지도 않았다.
요셉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눈앞의 남자가 미웠다.
남자의 값비싼 옷차림과 화려한 구두, 억누를 수 없는 자신감,
그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은 지독한 강인함이 모두 싫었다.
통증에 시달리지 않는 그가 미웠다.
그에게는 동생의 아이를 빼앗아갈 권리가 없었다.
한수는 요셉의 분노를 읽을 수 있었다.
선자는 내가 떠나기를 바랐죠.
그래서 나는 먼저 떠났다가 돌아올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다시 돌아갔을 때 선자는 떠나고 없었습니다.
이미 결혼을 한 거죠. 당신 동생과."
요셉은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몰랐다.
이삭한테서 선자에 관한 이야기를 거의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삭은 노아의 출생에 얽힌 이야기를 묻어두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노아를 이대로 내버려두고 떠나세요.
노아에게는 가족이 있어요.
전쟁이 끝나고 나면 당신에게 빚진 것을
모두 갚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다 할 겁니다."
한수는 가슴에 팔짱을 끼고 미소를 짓더니
금세 표정을 바꾸고는 폭언을 쏟아냈다.
"이 개자식아, 내가 대가를 치렀어. 네놈 목숨 값을 내가 치른 거야.
모든 사람의 목숨 값을 치렀다고. 내가 없었다면 다들 죽었을 거야."
요셉이 옆으로 살짝 돌아누웠다가 통증에 움찔거렸다.
가끔씩 아직도 불에 타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선자한테 들었나?" 한수가 물었다.
"그냥 아이 얼굴을 보고 알았지.
생판 남이 그 모든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돼.
당신이 무슨 성자가 아니라는 걸 진작 알아봤어.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 . . . "
한수가 큰 소리로 웃었다.
요셉의 직설적인 성격에 감탄해서 터져 나오는 웃음이었다.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갈 거야."
요셉이 이렇게 말하며 눈을 감았다.
"평양은 소련인들이 지배하고 있어. 미국인들은 부산을 점령했고.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영원히 그렇지는 않을 거야."
"거기서는 굶어 죽을 거야."
"일본은 지긋지긋해."
"평양이든 부산이든 어떻게 돌아갈 건데? 이 농장도 돌아다니지 못하는 주제에."
"내 월급을 받지 못해서.
내 몸 상태가 충분히 좋아지면 나가사키로 돌아가서 월급을 받아올 거야."
"신문을 마지막으로 읽은 게 언제지?"
한수가 김창호를 위해 가져온 조선어와 일본어로 된 신문 한 묶음을
상자에서 꺼내 요셉의 요 옆에 내려 놓았다.
요셉은 신문 더미를 힐끗 쳐다보았지만 집어 들지는 않았다.
"당신 돈 따위는 없어."
한수는 요셉이 아이라도 되는 것처럼 천천히 말했다.
"그 회사는 당신에게 돈을 주지 않을 거야.
당신이 거기서 일을 했다는 기록이 없거든.
당신은 그 사실을 증명할 수가 없어.
일본 정부는 가난한 조선인들이 모두 다 돌아가기를 바라지만
당신에게 한 푼도 주지 않을걸. 하!
"그게 무슨 말이지?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잘 알지. 난 일본을 잘 알거든." 한수가 내심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한수는 성인이 된 후로 내내 일본인들 사이에서 살았다.
장인은 의심할 여지없이 간사이 지방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일본인 고리대금업자였다.
한수는 일본인들이 마음만 먹으면
병적일 정도로 다루기 힘든 인간이 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는 조선인들과 똑같았다.
조선인들보다 좀 더 조용히,
훨씬 감지하기 힘들게 고집을 부린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일본인들한테서 돈 받아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나?
그들이 당신에게 돈을 주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절대로 돈을 받아낼 수 없어.
당신은 시간만 낭비하는 꼴이 될 거야."
요셉은 몸이 가려워지는 것을 느꼈다.
"매일, 조선행 배에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멍청이들이 가득 타지.
그런데 그와 동시에 난민들로 가득찬 배 두 척이 들어와.
조선에서 먹을 게 없어서 말이야.
조선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당신보다 더 절박한 상태라고.
그들은 한 주나 지난 빵을 얻으려고 일을 해.
여자들은 이틀 굶주리고 나면 창녀가 되지.
먹여 살릴 자식들이 딸려 있으면 하루도 못 버틸걸.
당신은 지금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꿈속의 고향에서 살고 있는 거야."
"부모님이 거기 계셔."
"아니, 아닐걸. 그들은 거기 없어."
요셉이 한수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내가 왜 선자 어머니만 데리고 돌아왔을 것 같나? 내가 당신 부모님과 당신 아내의 부모님을 찾지 못했다고 생각하나?"
"당신은 그분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 요셉이 말했다.
요셉이나 경희는 일 년이 넘도록 부모님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들은 총에 맞아 죽었어.
어리석게도 그 땅의 눌러 붙어 있던 땅주인들은 모두 총살당했지.
공산주의자들은 사람들을 아주 단순하게 분류하거든."
요셉이 울음을 터트리며 두 눈을 가렸다.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수는 자신의 말이 거짓이라고 밝힐 생각이 없었다.
그들의 부모는 아직 죽지 않았더라도
결국에는 굶어 주거나 늙어 죽을 것이었고,
사실 총살당했을 가능성이 컸다.
공산주의자들이 점령한 북쪽의 상황은 끔찍했다.
수많은 지주들이 살해당해 공동묘지에 버려졌다.
사실 한수는 요셉의 부모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지 못했다.
부하 몇 명을 희생시켜서라도 그들을 찾으려 했다면
그들의 생존 여부를 알아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의 목숨이 한수 자신에게 유익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선자의 어머니는 찾기 쉬워서 이틀도 걸리지 않았다.
요셉과 경희는 부모를 잃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았다.
그렇지 않다면 선자가 터무니없는 의무감에
맹목적으로 두 사람을 따라갈 것이 뻔했다.
요셉과 경희는 일본에서 사는 게 훨씬 나았다.
한수는 아들을 평양으로 보낼 수 없었다.
한수가 꾸러미 하나를 풀어서 커다란 소주병 하나를 꺼냈다.
그러고는 소주병을 따서 요셉에게 건네주고
다마구치와 지불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헛간을 나섰다.
선자는 일이 끝난 후에 헛간으로 돌아왔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한수를 발견했다.
한수는 헛간 맨 끝의 여물통 앞에 앉아 있었다.
책을 읽는 아이들한테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요셉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경희와 양진은 집 안에서 저녁을 요리하고 있었고,
김창호는 서늘한 창고에 고구마 자루를 내려놓고 있었다.
한수가 먼저 선자에게 아는 체를 하며
대놓고 가까이 오라고 손을 흔들었다.
더 이상 조심스럽게 행동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선자는 한수 맞은편 의자 옆에 섰다.
"앉아, 앉아." 한수가 고집했지만 선자는 거절했다.
"다마구치가 네 아이들을 입양하고 싶다고 했어."
한수가 조용히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뭐라고예?"
나는 네가 아이들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했지.
다마구치는 한 명이라도 달라고 하더군. 불쌍한 인간 같으니.
걱정하지 마. 그는 아이들을 데려갈 수 없으니까."
"우리는 곧 평양으로 갈겁니더."
"아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 "그게 무슨 말이라예?"
"거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었어.
경희의 부모도, 너의 시부모도. 재산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총살당했지.
정부가 바뀌면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적을 없애야 하거든.
지주들은 노동자들의 적이지." 한수가 말했다.
"세상에." 선자가 마침내 앉았다.
"그래, 슬픈 일이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선자는 현실적인 여자였다.
하지만 그런 선자도 한수가 대단히 잔인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한수라는 남자를 알게 될수록 그녀가 소녀 시절에 사랑했던 남자는
그녀가 꿈꾸었던 환상에 불과했음이 확실해지는 것 같았다.
"노아의 교육을 생각해야지. 노아가 대학 입학시험 준비를 할 수 있게 책을 좀 가져왔어."
"하지만 . . . "
"고향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상황이 더 안정될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야 해."
"그건 당신이 결정할 일이 아닙니더.
여기서는 내 아들들한테 미래가 없심니더.
지금 돌아갈 수가 없다 카면 좀 더 안전해졌을 때 돌아갈 깁니더."
목소리가 떨렸지만 선자는 해야 할 말을 했다. 한수는 잠시 동안 침묵했다.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나중 문제고,
그 동안은 노아가 대학 시험을 준비해야 해. 이제 열두 살이잖아."
선자는 노아의 교육 문제를 고민해보았지만
노아를 어떻게 도와 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학교 등록금은 어떻게 마련한단 말인가?
고향으로 돌아갈 허가증을 받을 돈도 충분하지 않았다.
세 여자는 요셉이 듣지 못하는 곳에서 항상 그 이야기를 했다.
오사카로 돌아가서 돈을 벌 방법을 다시 찾아야 했다.
"노아는 이 나라에 있는 동안 공부를 해야 해.
조선은 오랫동안 혼란 상태에 있을 거야.
게다가 노아는 이미 우수한 일본인 학생이잖아.
노아가 조선으로 돌아갈 때는 일본 대학 학위를 갖게 될 거야.
부유한 조선인들은 모두 그렇게 해.
아이들을 외국으로 유학 보내지.
노아가 대학에 들어가면 등록금은 내가 댈 거야.
모자수의 등록금도 대주지. 그 아이들에게 과외 선생도 붙여줄 수 있고 . . . "
"언지예. 그건 안 됩니더." 선자가 큰 소리로 말했다.
한수는 선자가 얼마나 고집스러운지 알기 때문에
선자와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몸소 체험해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한수는 요셉의 요 옆에 놓인 상자들을 가르켰다.
고기와 말린 생선을 가져왔어. 미국산 과일 통조림과 초콜릿도 있어.
다마구치 가족들한테도 똑같은 걸 갖다줬으니까
그들에게 나누어주지 않아도 돼.
상자 바닥에는 천이 있어.
여기 있는 사람들한테 옷이 필요한 것 같아서.
가위와 실, 바늘 도 있어." 한수가 그 모든 것들을 준비해온 자신을 자랑스러워 하며 말했다.
"다음번에는 모직을 가져다줄게."
선자는 더 이상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고맙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삶이 수치스럽고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선자는 햇볕에 그은 손과 더러운 손톱으로 빗지 않은 머리를 매만졌다.
한수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사랑스러운 여자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신문도 좀 가져왔어. 누군가에게 읽어달라고 해.
기사들은 다 똑같아. 지금은 돌아갈 수 없어.
지금 돌아가는 건 아이들에게도 끔찍한 일이 될 거야."
선자가 한수를 마주보았다.
"그런 식으로 저를 여기로 데려와 놓고,
이번에도 또 그런식으로 일본을 떠나지 못하게 할라 커는 아입니꺼?
이 농장에 올 때도 애들한테 더 좋을 거라 했지예."
"내 말이 맞았잖아." / "당신을 못 믿겠어예."
"넌 날 상처주려고 해.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야."
한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해봐. 네 남편이라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싶어 할 거야.
나도 아이들과 너에게 뭐가 제일 좋은지 알고 있어.
너와 나는 . . . 이제 좋은 친구잖아."
한수가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는 항상 좋은 친구가 될 거야.
항상 노아 곁에 있을 거라고."
한수는 선자가 뭐라고 할지 기다렸지만 선자의 얼굴은 문처럼 꽉 닫혀 있는 것 같았다.
네 아주버니도 알고 있어.
노아에 관해서 말이야. 내가 말한 건 아니야.
그가 짐작하고 있더라고."
선자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걱정할 필요 없어. 모든 게 다 잘 될 거야.
오사카로 돌아가고 싶다면 김창호가 도와줄 거야.
내 도움을 거절하는 건 이기적인 짓이라고.
네 아이들이 모든 혜택을 다 누릴 수 있게 해줘야지.
난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줄 수 있어."
선자가 뭐라고 대꾸하기 전에 김창호가 헛간으로 돌아왔다.
김창호는 아직도 책에 빠져 있는 아이들을 지나쳐 걸어왔다.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마실 걸 좀 갖다드릴까요?" 김창호가 말했다.
한수가 필요 없다고 했다.
선자는 그에게 아무것도 권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네는 오사카로 돌아 갈 건가?" 한수가 김창호에게 물었다.
"네, 사장님." 김창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선자가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김창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얘들아, 책에 어떠니?" 한수가 헛간 저편에 있는 아이들에게 소리쳤다.
김창호가 아이들에게 오라고 손짓하자 아이들이 달려왔다.
"노아, 학교로 돌아가고 싶니?" 한수가 물었다.
"네, 하지만 . . . "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면 당장 오사카로 돌아가야해."
"농장은 어떡하고요? 조선에 가는 건요?"
노아가 등을 곧게 펴면서 물었다. "한동안은 조선에 돌아갈 수 없어.
하지만 그동안 네 머리를 텅 비워둘 수는 없잖니."
한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가져다 준 책들은 어땠니? 어려웠어?"
"네, 하지만 배우고 싶어요. 사전이 필요할 것 같아요."
"하나 갖다 주지." 한수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네가 공부를 열심히 하면 내가 학교에 보내주마.
남자아이가 등록금 걱정을 해서는 안 돼.
조선인 어른들이 젊은 조선인들의 교육을 책임지는 건 중요한 일이야.
우리가 우리 아이들을 잘 후원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위대한 나라를 세울 수 있겠니?"
노아의 얼굴이 밝아졌고, 선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전 농장에 머물고 싶어요."
모자수가 끼어들었다. "이건 옳지 않아요. 전 학교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학교가 싫어요." 한수와 김창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노아는 모자수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인사를 시키고는
함께 헛간에 다른 편으로 걸어갔다.
어른들한테서 충분히 멀리 떨어지자 모자수가 노아에게 말했다.
다마구치 아저씨는 우리가 여기서 영원히 살 수 있다고 했어.
우리가 자기 아들인 것처럼 말했다고."
"모자수, 우리는 이 헛간에서 계속 살 수 없어."
"난 닭이 좋아. 오늘 아침에는 계란을 꺼낼 때도 쪼이지 않았어. 헛간은 잠자기 좋은 곳이야.
큰엄마가 건초 이불을 만들어준 후로 더욱 좋아졌어."
"네가 더 크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노아가 묵직한 책들을 양팔로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아버지는 우리가 대학에 가서 교육받기를 바랄 거야."
"난 책이 싫어." 모자수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난 책이 좋아.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책만 읽을 수도 있어.
아버지도 책 읽는 걸 좋아했어. 모자수가 노아를 넘어뜨리려고 하자 노아가 웃었다.
"형, 아버지는 어땠어?"
모자수가 똑바로 앉아서 진지하게 형을 쳐다봤다.
"키가 컸지. 너처럼 피부가 희고 매끄러웠어. 안경을 썼고.
학교에서는 공부를 잘했고.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책을 읽고
혼자서 깨우칠 수 있는 사람이었어. 책을 읽을 때 행복하다고 아버지가 그랬어."
노아가 미소를 지었다. "형 같내. 나 같지는 않아. 난 만화가 좋아."
"그건 진짜 독서가 아냐." 모자수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버지는 엄마와 나에게 언제나 친절 했어.
큰아버지를 놀려서 웃게 만들기도 했고.
아버지는 나한테 글자 쓰는 법을 가르쳐줬고, 구구단을 암기하게 했어.
그래서 내가 학교에서 제일 먼저 구구단을 암기했지."
"부자였어?" / "아니, 목사는 부자가 될 수 없어."
"난 부자가 되고 싶어. 큰 트럭을 사서 운전사가 될 거야."
"넌 헛간에 살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아침마다 계란을 모으면서 말이야." 노아가 웃으며 말했다.
"나나 한수 아저씨처럼 트럭을 가질 거야." / "난 아버지처럼 교육받은 사람이 될 거야."
"난 아냐. 난 돈을 많이 벌고 싶어.
그럼 엄마와 큰엄마가 더 이상 일하지 않아도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