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부 후기를 대신하여, 세 번째
"제66부 후기를 대신하여, 세 번째" 한광희씨가 폭로한 내용이 텔레비죤에서 방송된 직후부터 그에게 미행이 따라붙었다. 지하철 역 홈에서 누군가에 의해 선로 아래로 떨어질 번한 적도 있었다.
"황금연휴가 시작되는 첫날이었어요. 그날 친구와 둘이서 우에노에서 식사와 함께 가볍게 맥주를 한잔 했지요. 그리구선 JR 야마테선 오카치마치 역에서 우에노 행 전차를 타려고 혼잡한 홈에 서있었을 때였어요. 막 전차가 들어오고 있는데, 동시에 뒤에서 갑자기 3명의 남자들이 내 등을 떠밀더군요. 순간 있는 힘껏 중심을 잡았기 때문에 다행히 떨어지진 않았어요. 뒤를 돌아보니 그 남자들이 산산이 도망가고 있었어요. 이놈들! 하며 뒤쫓아 가봤지만 따라 잡을 수는 없었어요." 당시 한광희씨는 뇌경색 후유증으로 말만이 아니라 걸음걸이도 상당히 불편하였다. 당연히 그 자들은 총련에서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한 씨를 해치려 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때는 아직 조은에 대한 공적자금투입이 계류 중에 있었다. 만약 한 씨의 신상에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그 즉시 대 소란이 일어날 것이다. 조직의 존망이 걸린 그런 중대한 시기에 총련이 섣불리 경고망동 할리는 없을 것이고 다만 "이제 또 한 번 그러면 죽여 버리겠다! "는 식의 경고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한 씨의 목숨을 건 폭탄증언으로 13개의 조은을 구제하기 위한 공적자금 투입은 일단 보류되었다. 그 후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파산된 조은신용조합에 대해서는 금융처리관재인이 파견돼 재조사가 시작되었다. 그때가 2000년 12월이었다.
그 후에도 자주 만나보는 과정에 나는 한 씨가 알고 있는 것이 비단 돈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 동안 총련이 진행해온 갖가지 비밀활동이나 북조선 사정에 대해 그는 놀랄 만큼 환히 꿰뚫고 있었다. 북조선 정세에 대한 한 씨의 예측, 례를 들면 미싸일 문제라든가, 북조선 괴선박문제, 조일교섭에 관한 문제도 정확히 들어맞았다. 나는 한 씨야말로 조일관계의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중요한 력사의 증인이라고 굳게 확신하였다.
"한광희씨, 책을 내면 어떨까요? 당신이 얘기한 것을 내가 정리하겠습니다." [..바로 이렇게 돼서 이 책이 써지게 되었다.] 책을 쓰기 위한 인터뷰는 우에노 근처 다방에서 진행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빈번히 장소를 옮겨야 했다. 우리의 만남을 언제 눈치 챘는지 누군가 계속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한 씨는 알고 있었다. 한번은 그가 다방 한쪽 구석을 가리키며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오실 때 누군가 뒤를 밟지 않던가요? 저-기, 저 신문을 읽고 있는 사람 좀 보세요. "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우리가 장소를 바꾸면 어느새 알아버리고 또 따라붙곤 하였다. 아마 한 씨의 자택 전화가 도청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이런 식으로 매일 뒤를 밟히면서 약 1년 동안에 걸쳐 겨우 이 책이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그 사이 조은신용조합에 대한 조사가 본격화되었다. 2001년 2월에 들어서 조은동경, 조은 긴키 등에서 련이어 부정이 발각되었다. 신용조합 리사장들도 줄줄이 체포되었다. 같은 달 28일, "총련의 금고지기"라 불리는 강영관 재정국장도 업무상 횡령 혐의로 체포되었다. 강영관은 조은동경 리사장과 공모하여 위장계좌를 통해 조은에서 총련으로 약 8억 엔을 부정한 방법으로 빼돌려왔다. 다음날 29일에는 일본경시청이 총련중앙본부에 대해 강제수사를 실시하였다. 그것은 일본수사력사상 전례 없는 일이었다.
아사히 텔레비죤방송 "선데이 프로젝트"가 다시 긴급특집을 준비하였다. "조은파산의 진상-총련 최고 간부의 의혹!“ 방송국에서 나에게 부탁이 들어왔다. 한 씨가 또 한 번 텔레비죤에 출연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 그것도 이번에는 얼굴과 목소리를 모두 그대로 내보내자는 것이었다. 결국 한 씨가 다시 또 텔레비죤 카메라 앞에 나섰다.
"강영관의 명령으로 조은 동경이 총련으로 자금을 빼돌렸다? 물론 그가 혼자서 그것을 결정했을 리가 없지요. 모두 책임부의장인 허종만이 지시한 겁니다." 그 때에는 책임부의장의 체포도 기정사실화되고 있었다. “허종만이 미국으로 달아나려고 대사관으로 비자를 신청하러 갔다"는 망명 설까지 흘러나왔다. 이상이 내가 직접 알게 된 범위 내에서의 한광희씨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이다. 아직 그와 책임부의장과의 대립이 첨예화되던 때부터 내가 그를 만나기까지의 기간이 남아있다. 이에 대해서는 조선신보의 기사를 참고로 해서 기회가 될 때마다 내가 한 씨로부터 단편적으로 들었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은 말들을 종합해보는 수밖에 없다.
그 사이 총련을 크게 뒤흔든 사건이라고 한다면 우선 1994년 4월 15일 재일교포로서는 처음으로 북조선류학을 갔다 온 간사이대학 조교수 리영화씨가 결성한 "구하자! 북조선민중, 긴급행동네트워크"라는 반북조선 시민단체의 집회를 총련이 집단폭력으로 방해한 사건이다. 총련은 건장한 청년들을 앞세워 그 집회를 습격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역으로 경찰의 개입을 허용해 총련의 오사카본부와 교토본부에 강제수사를 부르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다수의 부상자를 낸 그 사건을 계기로 총련에 크게 실망한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