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호, 「무인칭의 죽음」
뒷간에서 애를 낳고 애가 울자 애가 무서워서 얼른 얼굴을 손으로 덮어 죽인 미혼모가 고발하고 손가락질하는 동네사람들 곁을 떠나 이제는 큰 망치 든 안짱다리 늙은 판사 앞으로 가고 있다
그 죽은 핏덩어리를 뭐라고 불러야 서기(書記)가 받아쓰겠는지 나오자마자 몸 나온 줄 모르고 죽었으니 생일(生一)이 바로 기일(忌日)이다 변기통에 붉은 울음뿐인 생애, 혹 살았더라면 큰 도적이나 대시인이 되었을지 그 누구도 점칠 수 없는
그러나 치욕적인 시(詩) 한 편 안 쓰고 깨끗이 갔다 세발자전거 한 번 못 타고 피라미 한 마리 안 죽이고 갔다. 단 석 줄의 묘비명으로 그 핏덩어리를 기념하자
변기통에 떨어져 변기통에 울다가 거기에 잠들었다
● 시_ 최승호 – 1954년 강원도 춘천 출생. 1977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대설주의보』,『세속도시의 즐거움』,『그로테스크』,『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고비』,『아메바』등이 있고, 그림책으로는『누가 웃었니?』,『이상한 집』,『하마의 가나다』,『수수께끼 ㄱㄴㄷ』,『구멍』,『내 껍질 돌려줘!』가 있다. 동시집으로는『최승호 시인의 말놀이 동시집 1(모음 편), 2(동물 편), 3(자음 편), 4(비유 편), 5(리듬 편)』,『펭귄』이 있다. 오늘의 작가상, 김수영문학상, 이산문학상 등을 수상함.
● 낭송_ 이혜미 – 시인. 1988년 경기 안양 출생. 2006년 중앙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보라의 바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