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지하 조사실, 서른 다섯 번째-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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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지하 조사실, 서른 다섯 번째
수사관의 설교는 끝이 없을 것처럼 이어졌다. 그들은 나를 이해시키려고 온갖 단어를 다 동원했다. 내가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손장난만 하고 있으니까 나중에는 간절하게 사정하다시피 나를 달래었다. 수사관의 설득이 계속되는 동안 나의 갈등과 망설임, 방황등의 심적 고통은 무의식적인 손장난에 완연히 나타나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손가락끼리 문지르거나 손톱 끝으로 다른 손톱 끝을 갈거나 손가락을 꺾어 소리를 냈다.
‘말을 해버릴까. 좀더 버텨 볼까.' 대외정보조사부장의 노기띤 얼굴도 떠올랐고 가족들의 호소하는 듯한 애절한 표정도 눈에 삼삼했다. ‘엄마,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요?' 이 세상에서 가장 나를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묻고 싶었다. 그들은 당신 자신의 입장보다도 내 딱한 처지부터 생각할 사람들이었다.
부모님은 ‘현희야, 우리 걱정 말고 네 편한 길을 선택하거라.'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죽음을 각오하고 말씀하실 것이다. 만약 단 한모금의 물을 놓고 그것을 마시면 세상사람 중 한 사람만은 살아날 수 있다고 할 때 그 두 분은 망설임 없이 기꺼이 나에게 그 물을 주실 분들이었다. 어느 부모나 자식 사랑하는 마음은 다 같겠지만 우리 부모는 그중에서도 더 특별난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안 돼.' 나는 도저히 그 분위기를 견딜 수가 없어 머리가 아프다며 침대 위에 누워버렸다. 무슨 말을 해보려고 입을 벌리면 그 사이로 한숨부터 터져 나왔다. 이번만큼은 수사관도 물러서지 않았다.
“만일 네가 입을 다물고 비밀을 지킨다면 이런 끔찍한 범죄 행위는 또 다시 일어나게 된다. 이런 비극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도 이번 사건의 전모는 밝혀져야 한다. 너를 철저히 이용한 그 조직을 위해서 왜 가치 없는 희생물이 되려 하느냐? 우린 네가 그렇게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린 것이다. 그 보람이 있어서 너는 네가 한 짓이 결코 옳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충분히 깨닫고 있다. 깨닫고도 의로운 일을 하지 못하면 너는 정말 나쁜 사람이 된다.”
수사관의 이야기는 약 세 시간 정도 계속되었다. 같은 내용의 되풀이였지만 그 말을 듣는 느낌은 어제와 오늘, 아침과 점심이 달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국과 민족을 위해 아주 대단한 일을 해냈다고 스스로도 대견해 하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탑이 하나하나 무너져 내렸다. 이제는 내가 한 일이 무고한 인민을 희생시킨 단순한 살인 행위였다는 죄책감만이 남으려는 순간이었다. 참담한 심경이었다. 말을 시작할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생각해 보고 내일 모든 걸 이야기하겠으니 시간을 좀 주십시오.”
시간을 좀 끌어 보려고 했지만 수사관들의 성화는 열화 같았다. 이미 내 굳은 신념도 뿌리채 뽑힌 상태였고 투쟁 의욕도 산산히 부서진 터라 더 이상 숨길 생각은 없었다. 다만 나는 내가 북조선 공작원이며 KAL 858 기를 폭파한 장본인이라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낼 용기가 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그렇게 거짓말을 해왔는데도 잘 참아주면서 어린 철부지 아이 가르치듯 이해시키려 애써 온 수사관들 앞에 염치가 없었다. 그들은 내가 북조선에서 온 공작원이라는 사실도, 115명을 죽인 살인자라는 사실도 애초부터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인간적으로 대해 주었다고 생각하니 더욱 부끄러웠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불쑥 ‘그 일은 내가 했소' 하고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 이상 버티는 일도 한계점에 달했지만 더 못 견딜 일은 새롭게 시작된 량심의 소리였다. 이제 어찌되었든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이 되었지만 죽기 전에 내가 지은 죄를 고백하고 나의 조선 이름이나마 밝히고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너무 시간을 끌면서 머뭇거리자 녀자 수사관과 다른 수사관들은 모두 방에서 내보내고 나이 든 수사관 2명만이 남았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