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학시절, 열 다섯 번째-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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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대학시절, 열 다섯 번째
큰고모댁 식구들은 우리가 온다는 련락을 받고 멀리까지 마중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구나 현수와 내가 큰 고모 둘재딸의 혼수감인 이불감을 가지고 갔기 때문인지 아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이불감을 내놓을 때는 늙은 큰 고모는 이제 한시름 놓았다며 눈물까지 보였다.
큰고모댁은 전형적인 함경도식 집이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곧바로 부엌이고, 부엌과 이어서 아무런 벽도 없이 그대로 온돌방이 있고 그 온돌방을 지나면 다음 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다. 부엌 부뚜막에는 커다란 가마솥이 걸려 있다.
우리는 생전 처음 대면하는 고종 사촌들에게 에워싸여 그들의 성화에 또 평양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들은 줄곧 입을 다물지 못하고 신음같은 감탄사만 련발했다.
“세상에 , ....실루 기차다...” “평양엘 한번 가봤음 좋겠다.....”
우리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 평양에 산다는 것에 대해 처음으로 자부심을 가졌다.
큰고모가 특식으로 동태 순대와 강냉이 떡을 만들어 내왔다. 동태 순대는 동태 대가리 속을 모두 빼내고 그 안에 동태 살과 찹쌀, 좁쌀, 명란, 그리고 각종 양념을 넣어 만드는데 구수한 맛이 아주 별미였다.
큰고모는 교원인 남편에게 시집와서 그래도 괜찮은 집안에 시집갔다고 했었는데 남편이 일찍 죽었다. 과부로 농사를 지으며 시부모를 모시고 아이들을 기르다나니 고생을 이만저만 한게 아니였다. 다른 고모들도 함경도 부근에서 살고 있다 하는데 우리는 가보지 못하고 그냥 평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가끔 지방 출장 중에 고모들을 찾아가면 너무나 생활이 비참하고 아이들은 결핵까지 걸려서 안타깝다는 말을 많이 하셨다. 현수와 내가 지방을 다녀온 느낌도 그들이 너무 비참하게 산다는 것이였다. 마음은 순박하고 간절하지만 아무것도 줄 것이 없어 애를 태우던 그들의 모습이 두고 두고 마음에 걸렸다.
따지고 보면 북조선 주민들 생활이 어찌 지방 생활만 비참하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남조선에 와서 이곳 국민들이 누리는 생활을 보고 북조선 주민들은 누구나 다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다. 높은 간부들도 자신들이 호의호식 한다고 생각하면서 으시대는데 그들 역시 불쌍하다. 남조선의 중류층보다도 못 살면서 자기들은 최고로 살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1988년도 12월 10일자 남조선 한국일보에 ‘스위스 북남 개신교 회의'에 어느 대표들이 참가하여 북측 녀성들과 담화한 내용을 보고 너무나 어처구니 없어 했던 일이 있다. 그때 북측 녀성들은,
“결혼하여 독립할 때는 행정구역에 살 집을 신청하면 순서에 따라 집이 나옵니다.” “결혼한 녀성은 남편보다 30분 늦게 출근했다가 1시간 반 먼저 퇴근하는데 남편 퇴근 시간은 6시 30분입니다. 밥공장을 리용하기 때문에 저녁 준비에 쫓기지 않습니다.” “목사 월급이 170원이고 쌀 한 키로를 정부에서 45원에 수매하여 인민들에게 8전에 공급합니다.”
하고 선전을 늘어놓았다. 우선 나는 이곳 신문에 북조선의 거짓 선전 내용이 하나도 려과되지 않은 채 그대로 실린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북조선 녀성 대표들도 북조선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다 그러하듯이 김일성의 현명한 령도력과 위대성을 극구 찬양하기 위해 무척 애쓴 흔적이 력력하였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그들을 탓할 수 있겠는가? 나 자신도 얼마 전까지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김일성을 하나님처럼 떠받들며 맹목적으로 복종하고 목숨까지 바쳐 충성을 하지 않았던가. 그 사회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내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