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린시절, 열 일곱 번째-17
[...]
나의 어린시절, 열 일곱 번째
중학교 시절은 몹시 바빠서 수업이 끝나고 사로청 모임, 사열식 훈련, 배경대 련습, 체육예술 소조 모임 등을 갖게 되므로 밤 10시 이전에 집에 들어가는 날이 드물었다. 특히 4.15가 가까워 지면 단 하루도 쉴 틈 없이 바쁘게 돌아간다. 이쯤 학생들은 련습, 련습으로 파김치처럼 지치는 것이 보통이였다.
우리는 2학년 때 4.15를 맞으면서 예술체조 종목을 맡게 되었는데, 이 종목은 녀학생들이 수영복 차림에 륜을 가지고 하는 체조였다. 2월에 접어들면서 방과 후에 학교 운동장과 체육관 마당에서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2,3월은 아직 날씨가 안 풀려 쌀쌀한데 수영복 차림으로 동작을 익혀야 하니 녀학생들은 입술이 파래져 덜덜 떨었다. 엄마들은 추위에 떨며 고생하는 아이들이 불쌍하고 애처로워 자기들끼리 조를 편성해서 저녁 때 뜨거운 국물이라도 마실 수 있도록 순번제로 국을 끓여 왔다. 4월이 거의 다가오면 김일성 경기장으로 장소를 옮겨 련습을 하고 간식으로 빵 1개씩을 공급받았다.
예술체조 동작도 익히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였다. 평상시에 늘쌍 훈련해 오던 동작이 아닌 데다 몸이 굳어진 상태에서 왼쪽 다리는 곧게 펴서 정강이나 넓적다리 앞쪽을 땅에 닿게 하여 엉덩이까지 완전히 땅에 대려면 잘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루 말할수 없이 아팠다. 저녁 총화때는 동작이 안되는 학생과 규율을 위반한 학생을 앞에 세우고 눈물이 나오도록 비판해댄다. 누가 어떤 동작에서 어떻게 틀렸고, 어떤 애가 집합 때 늦었다는것 까지 일일이 지적하며 비판하다나면 밤 12시를 넘기는 것이 보통이였다.
집으로 돌아갈 때는 모두 녹초가 되여 집에 들어서자 마자 책가방을 방구석에 내던지고 옷도 벗지 못한 채 쓰러져 잠이 들었다. 동네 어머니들이 모여 우리집 애는 문턱에서 쓰러져 자다가 오줌까지 쌌다며 자식 걱정들을 늘어놓았다. 이렇게 곯아 떨어져 자다가도 아침 7시면 밥곽을 싸가지고 행사용 소도구를 짊어지고 학교로 달려 나가야 했다.
시일이 촉박해지면 동작이 안되는 아이를 강압적으로 내리눌러 동작을 취하게 한다. 이렇게 피나는 간고한 련습 끝에 예술체조에 동원된 500명의 학생들이 기계처럼 일률적으로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보는 사람은 ‘잘 맞는다. 잘 한다. '는 몇마디로 간단히 평가하지만 당하는 당사자나 그 가족들은 얼마만큼 많은 고통을 당했는지 알기 때문에 그 감회가 남과는 다르다. 특히 배경대에 동원되면 행사가 진행되는 90분간 한눈 한번 팔지 못하고 자리를 지키고 앉아 지도 교원의 지시에 따라 한치의 착오도 없어야 한다. 만일 자칫 신경을 다른 데 쓰다가는 다른 색 카드를 들게 되거나 동작이 늦어져 그림을 망쳐 놓을 수 있기 때문에 초긴장 상태에서 90분을 보낸다.
김일성 얼굴을 만드는 작품을 할 때는 지도 교원 마저 바짝 긴장을 한다. 김일성 얼굴이 망가지거나 얼굴에 검은 점이라도 있게 되면 거기에 참가한 그 누구도 남아 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경대에 참가한 학생 중에는 그 자리에서 오줌을 싸는 경우가 허다하고 심지어는 방광염에 걸리는 아이도 있다. 거기에 비하면 남조선 아이들은 거저 학교에 다닌다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북조선 학생들은 여기저기에 동원되다나면 사실상 학과 공부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남조선의 중, 고등학교 학생들은 오직 공부에만 전념하고, 가정에서도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 과외공부를 시킨다, 학원에 보내다 하는 걸 보면 북조선이 무엇 때문에 남조선에 비해 엄청나게 뒤떨어졌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역시 이곳 사람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어 보면 내 자신이 너무 부족하고 무식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지식뿐 아니라 일반상식이나 세계정세 문화에 대해서도 많이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북조선처럼 폐쇄된 사회에서는 정보라곤 얻을 곳이 없고 책마져도 자유롭게 볼 수 없으니 남조선에비해 뒤쳐질 수 밖에 없는게 당연할 것이다.
내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