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고백, 서른 다섯 번째-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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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고백, 서른 다섯 번째
나는 겁을 먹고 김 선생에게 문고리를 걸어 누군지 확인하라고 당부했다.
김 선생이 내 말대로 쇠로리를 건 채 빼꼼히 문을 열고 바깥 동정을 살폈다. 그러자 호텔 종업원이 쵸코렛을 안으로 디밀며 방 안을 힐끔 살핀 뒤 사라졌다. 지금가지 해외여행을 하는 동안 이런 서비스를 받기는 처음이므로 이것이 우리의 동태를 살피기 위한 수작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다행히 그 후로는 아무도 찾아온 사람이 없었다.
김 선생은 정신적으로 시달린 탓인지 자정도 되기 전에 이미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엎치락뒤치락 몸부림치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불안한 마음에 상상되는 사태는 방정맞고 엄청난 일뿐이었다. 상상은 마냥 비약되었다.
방문 밖에서 이미 경찰들이 지켜 서서 우리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여러 번 일어나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방문까지 걸어가 밖의 표정을 살피기도 했다. 그날 밤 나는 시계를 수십 번도 더 보았다. 시계는 제자리에 멈춘 것 같았다. 시계가 죽었나 해서 귀에 갔다 대 볼 정도로 밤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내가 살아오면서 보낸 수많은 밤중에 가장 긴 밤이었다. 뜬눈으로 새우는 지옥 같은 밤은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발을 동동 구르고 입술이 바싹바싹 타는 심정으로 보내는 그 밤에 이미 나는 불길한 앞날의 징후를 보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내 평생 그렇게 초조하고 불안한 밤은 없었다. 바스락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진땀이 흘렀다. 마침내 훤하게 날이 새기 시작했다.
아침 6시 반이 다 되었는데도 김 선생은 태평스럽게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잠든 김 선생을 바라보고 있자니 정말 한심하고 밉살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세수와 간단한 화장을 마친 뒤 참다못해 그를 깨웠다.
비행기 시간에 맞추느라고 부랴부랴 짐을 꾸리고 호텔 방을 나서려는데 김 선생이 나를 불러 세웠다.
“마유미, 잠깐 기다려.”
김 선생의 얼굴은 심각하다 못해 비장한 표정이었다. 그는 내 얼굴을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던 독약 앰플이 든 담배갑을 내게 주었다.
“최악의 경우, 이걸 사용해야 한다.”
그의 목소리는 안으로 안으로 기어들고 말까지 더듬더듬 거렸다. 그가 나에게 미안해 할 것은 없는데 김 선생은 이 지경이 된 것이 마치 자신의 잘못인 양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담배갑을 건네주는 김 선생의 손이 떨리고 받아 쥐는 내 손이 떨렸다.
“내가 이번 노정이 불합리하다고 그렇게 문제를 제기했는데 ......돌아가면 단단히 따져야지.”
그는 혼잣소리처럼 투덜거렸다. ‘돌아가면 단단히 따져야지' 하는 소리를 하는 김 선생도, 그 소리를 듣는 나도 정말 독약 앰플이 든 말보로 담배를 사용할 때가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1987년 12월 1일.
운명의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바레인의 그날 아침 햇살은 눈부시게 밝았다. 우리가 저지른 죄의 진상을 낱낱이 들추어내려는 듯 햇빛은 찬란하게 온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환한 햇빛 속으로 나서며 또 가슴을 떨었다.
우리는 아침식사도 못하고 누구에게 뒤쫓기듯 황급히 리젠시 인터콘티넨탈 호텔을 빠져 나왔다. 복도에서도 로비에서도 우리를 붙드는 사람은 없었다. 호텔 내의 프론트 직원이나 정문 안내원들 뿐 아니라 눈이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감시하는 것 같았다. 뒤통수가 따갑고 등어리가 근질근질했다.
나레이션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