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고백, 서른 일곱 번째-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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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고백, 서른 일곱 번째
“죠또마떼 구다사이. 시라베루 아리마쓰 까라네..”
유창한 그 일본 말 소리에 마치 하늘이 무너져 내려앉는 것 같았다.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고 느꼈다. 그 순간 아마도 우리 두 사람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가셨을 것이다. 더구나 사열대에는 바레인 성원 말고도 그 옆에 동양 사람이 서서 우리 여권을 회수하는게 아닌가!
‘이제 모든 것이 다 틀렸구나' 저 깊은 벼랑 밑으로 떨어져 내리는 기분이었으나 한편으로는 한 가닥 거미줄 같은 희망을 버릴 수는 없었다. 그것은 장 지도원과 김 선생이 나누던 말이 불현듯 생각났고 그 말 때문에 작은 희망이나마 걸어 본 것이다. 1984년 7월 초, 김 선생의 서울 침투 공작을 지원하기 위해 평양과 평성에 경계에 있는 동북리 2층 2호 특각 초대소에서 여행 노정을 연구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담당이던 장 지도원이 하찌야 마유미의 이름으로 된 일본 여권을 내놓으면서,
“이 려권은 우리가 진짜와 똑같이 만들어낸 려권이기 때문에 일본 려권 전문가가 아니면 아무도 이 려권의 진가 여부를 밝혀낼 수 없으니 안심하시오.”
라고 말하였다. 또 김 선생 역시 같은 말을 하면서 자신도 이런 여권을 가지고 수없이 해외로 나다녔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들 역시 려권의 진가 여부를 밝혀낼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단지 그것을 믿었다. 아니 믿었다기 보다는 그렇게 되기를 빌었다는 말이 옳은 표현이다. 아무쪼록 별일 없기를 바라며 공항대기실 의자에 앉아 여권을 되돌려 주기만을 기다렸다. 그동안 임무 수행을 위해 항상 긴장 속에서 여행해 왔고 어젯밤을 뜬눈으로 밝혔기 때문에 몸은 거의 탈진 상태였다.
비행기 이륙 시간은 단 5분밖에 남지 않았고 다른 탑승객들은 이미 모두 탑승이 완료되었는데도 여권은 우리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애타는 가슴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이륙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끝장이다' 하는 막막함과 동시에 손끝까지 맥이 탁 풀리는 현기증이 일었다. 고개를 돌려 김 선생을 쳐다볼 힘도 없었다. 나는 더듬더듬 멜가방 속에 손을 넣어 말보로 담배갑을 꼭 쥐어 보았다. 그런 대로 마음이 안정되고 체념과 함께 앞으로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해 정리할 여유가 생겼다.
‘당당하고 침착하게 최후를 맞이하자.' 나는 입술을 꽉 물고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당과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동지를 위해 나에게 맞겨준 전투과업을 한 치의 착오나 실수 없이 훌륭히 수행하였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로 하였다. 평양을 출발하기 전전날, 대외정보조사부장이 초대소에 직접 나와 이번 전투과업의 계획에 대하여 최종 결론을 지으면서 엄숙하고 간곡한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지령을 내렸다.
“이번에 동무들이 수행하게 될 임무와 계획에 대하여 최종 결론을 짓겠소.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번 임무는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께서 친필로 비준하신 중요한 과업으로서 남조선 비행기 KAL 858기를 제끼는 것이오. 임무의 목적은 올림픽을 개최하여 두 개의 조선을 조작 책동하는 적들에게 큰 타격을 주기 위한 것이므로 조국통일을 위해서도 아주 중요한 일이오. 또한 어려운 과업이기도 하오. 동무들은 이번 임무가 중요한 만큼 철저한 비밀 보장이 되어야 함을 명심하고 최악의 경우가 왔을 때 준비한 담배를 깨물어 비밀을 고수하시오. 비밀 보장은 과업 수행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오. 동무들이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적 생명을 조국통일을 위해 기꺼이 버릴 수 있을 때 정치적 생명은 영생불멸할 것이오.”
나는 그 말을 되새기며 마음속으로 굳은 결심을 다져야 했다.
나레이션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