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고백, 서른 여섯 번째-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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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고백, 서른 여섯 번째
우리는 아침식사도 못하고 누구에게 뒤쫓기듯 황급히 리젠시 인터콘티넨탈 호텔을 빠져 나왔다. 복도에서도 로비에서도 우리를 붙드는 사람은 없었다. [...]
누군가가 조금만 관심 깊게 관찰했다면 낌새를 느꼈을 것이다. 아무리 침착하려고 애를 써도 우리는 자꾸 허둥댔고 누가 봐도 도망치는 꼴이 틀림없었으리라. 택시에 오르면서도 혹시 이 차가 경찰의 감시용 택시가 아닌가 의심이 들어 택시 운전수의 표정을 살폈다. 공항으로 달리는 택시 안에서 나는 두려움도 두려움이지만 도망자의 외로움 때문에 몸이 떨려왔다. 김 선생도 나도 아무 말이 없었다. 어떤 말도 소용이 없었고 서로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입 밖으로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의 마음속까지 다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심정이 똑같았기 때문에 말을 하기조차 두려웠던 것이다. [...]
내 손은 줄곧 말보로 담배갑에 가있었다. 그 담배갑이 손에 닿아 있으면 조금은 마음이 안정되었다.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면 이것만이 나를 지켜주고 비밀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방패막이였기 때문이다. 어젯밤에 벌어진 일로 미루어보아 우리가 이곳을 무사히 빠져 나갈 것 같지가 않았다. 베오그라드에서 헤어졌던 최과장일행과 재접선 하기로 약정된 비엔나까지 간다는 일이 현 상황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느낌이 와 닿았다. 입안에 침이 마르고 입술이 바싹 타들어 갔다.
이성과 침착을 되찾기 위해 다른 생각을 해보려고 애썼지만 허사였다. 별 탈 없이 공항에 도착하자 김 선생이 수속을 서둘렀다. 로마로 떠나는 알리아 항공기에 탑승하기만 하면 일단은 성공하는 것이었다. 김선생이 수속 절차를 밟는 동안 나는 공항 안의 상황에 신경을 쓰며 미행자나 남조선 특무가 따라붙지 않았나를 살펴야 했다.
출국 사열대 쪽으로 왁자지껄하는 조선 말 소리가 들려와 바짝 긴장한 채 그 쪽을 보았다. 남자 7~8명이 웃어가며 떠들어 대고 있었다. 한눈에 그들이 남조선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공화국 사람이라면 우리 같은 공작원이나 특수 신분이 아니고는 반드시 왼쪽 가슴에 김일성 초상을 모셔야 하는데 그들의 가슴에는 그것이 없었다. 또 공화국 사람들이라면 외국에 나왔다고는 하지만 그토록 자연스럽고 활달하게 행동할 리가 없고 머리에 찌꾸를 발라 올백으로 넘긴 차림이 아닌 것으로 보아도 남조선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의 방만한 대화 모습을 보고 우리를 미행하는 특무들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도 출국 사열대로 가려면 그 옆을 통과해야만 하는데 나로서는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옆을 지나면서 나는 그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기 위해 김 선생 등 뒤를 바짝 따라붙어 그의 바짓자락만 내려다보며 뒤를 따랐다. 마치 그 남조선 남자들이 KAL 858기에 탔던 사람들로 되살아와 우리를 알아볼 것 같은 두려움이 일었다.
‘저 사람들이 자기들 짐을 놓고 내렸던 사람들이다' 하고 곧 우리를 붙들 것처럼 긴장이 되었다. 긴장된 모습을 숨기고 태연자약하려고 애썼지만 발을 떼기조차 힘들 정도로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자칫 잘못하면 그 자리에 그냥 주저앉게 될 것 같았다. 다행히 그들은 우리 따위에게는 관심도 없이 자기네들 이야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깔깔거리는 중이었다. 마침내 우리는 출국 사열대 앞에 서서 떨리는 손으로 여권과 출국 카드를 내밀었다.
“제발...무사히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있다면....”
간절한 마음만큼이나 온몸이 빳빳이 굳어지는 느낌이었다. 초조한 순간이었다.
“죠또마떼 구다사이. 시라베루 아리마쓰 까라네..”
유창한 그 일본 말 소리에 마치 하늘이 무너져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나레이션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