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고백, 열 두 번째-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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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고백, 열 두 번째
김승일은 격려해 주는 부장의 말에 위대한 수령님과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대답했다. 부장은 술잔을 내려놓고 김승일과 포옹한 뒤 나에게는 악수를 청했다. 우리는 부장의 따뜻하고 깊은 격려에 감격하여 눈물마저 글썽거렸다.
“꼭 성공하여 충성의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우리는 그의 앞에서 다시 다짐하는 충성심을 보였다. 그때의 심정 같아서는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은 사기충천 된 기분이었다. 이 한목숨 다 바쳐 조국에 충성한다는 곧고 깊은 충성심 외에 다른 마음이 있을 수 없었다. 그 공작 임무가 구체적으로 조국 통일에 어떤 도움이 되는 지 알 필요도 없었다. 지상 명령일 뿐이었고 선발된 영광만이 황공스러울 따름이었다. 집 생각이 문득문득 났지만 이런 엄청난 임무를 맡은 혁명전사가 사사로운 집안일이나 생각할 수는 없다며 잡념을 쫓았다. 그때 밤 시간에 잠시라도 집에 다녀오겠다고 떼를 쓰면 허락이 떨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떼를 쓰기는커녕 말도 꺼내어 보지 않았고 오히려 그런 일에 관심 없다는 듯 초연하게 굴었다. 그것이 지금 와서 이렇게 한스럽고 후회가 될 줄이야.
“약 잡수실 시간이에요.”
나는 김승일의 약 시간에 맞추어 약을 챙기고 수시로 과일 같은 간식을 내다주며 그의 건강관리에 신경을 썼다. 그는 위 수술의 후유증으로 얼굴색이 새까맣게 타고 몹시 쇠약해 있었다. 출발 일자가 다가올수록 신경을 쓴 탓인지 건강이 더 나빠지는 것 같았다. 식사도 아주 적은 양을 하였으나 그것도 소화를 못 시켜 몇 십 분씩 누워 있어야 했다. 김승일의 몸이 이정도로 허약하다나니 부장과 과장도 은근히 걱정인 모양이었다. 부장과 과장은 나를 조용히 불러 김승일의 건강에 대해 한번 더 부탁했다.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김 선생의 건강을 잘 보살펴야 하오. 그것이 옥화 동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오. 그리고 만약 외국에 나가서 김 선생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주재 대사관이나 초대소에 전화해서 알려만 주고 옥화 동무는 혼자서라도 임무를 수행해야 하오.”
부장과 과장은 이번 임무 수행 중에 김승일의 건강이 악화되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보기에도 김선생의 건강 상태는 옆에서 누가 큰소리만 쳐도 금방 쓰러져 못 일어날 것처럼 보였다. 워낙 노련한 공작원이어서 그런지 환자에 가까운 김승일에게 이번 임무를 맡긴 눈치였다.
드디어.......평양을 떠나는 아침이 밝아왔다. 긴장한 탓인지 밤에 몇 번 잠이 깨어 다시 잠들려고 몸을 뒤척이다가 날을 밝혔다.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최 과장이 왔다. 나는 전날 하루 종일 챙겨 꾸려 놓은 짐 가방을 다시 한번 만져보며 서성댔다. 어쩐 일인지 마음이 뒤숭숭하고 이번에는 영영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방정맞은 예감마저 들었다. 처음 떠나는 일이 아니었다. 중국 광주에 가서 1년 반씩 살다가 오고 마카오에 나가서도 살았고 유럽여행도 다녀오고 했는데 한 번도 이런 불길한 예감은 없었다.
‘그때는 설레임을 가지고 놀러가는 것 같은 자유스러운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엄청난 임무 지령을 받아 가지고 떠나기 때문일거야. 불과 한 달 안에 돌아올 수 있어. 영웅 대접을 받으며 가족을 만나야지.' 나는 나 자신을 위로하여 불길한 생각을 떨치려고 애썼다. 세수하고 화장하고 떠날 준비를 모두 마치자 최 과장은 우리를 2층 응접실로 불러 모았다.
“직후로 떠나기에 앞서 충성의 선서 모임을 가집시다.”
그가 작성한 선서문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이런 엄숙한 선서 다지기는 처음이라서 마음을 졸였다. 선서문이 적힌 종이를 받아드는 순간 내 손이 알게 모르게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