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림, 「상처」
“상처가 두려운가요? 그러면 당신은 아직 시간에 대해 무지한 것이다.”
이경림, 「상처」
그날은 사월 초파일이었다. 엄마와 할머니는 봉암사로 불공드리러 가고 아이는 금방 온다는 사촌언니를 기다리며 텅 빈 집 뒷 툇마루에서 혼자 반두께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때 그가 들어왔다.
- 여기서 혼자 뭐 하노?
- 반두께....
- 심심하지?
- 응.
아니?
- 요 뒷산에 산나리 꽃이 마이 핐더라... 같이 가 보까?
- 응.
뒷산으로 가는 길은 지척에 있었다. 이따금 고사리니 두릅 등 산나물을 뜯으러 다니는 어른들을 따라다니며 머루니 다래 혹은 산딸기 같은 것을 따먹기도 하던.
그는 성큼성큼 앞서 걸으며 얼크러진 칡덩굴들을 밀치며 길을 만들어 주었다.
- 니 이 칡넝쿨의 뿌리가 얼마나 긴지 아나? 한도 없다 마.
- 뱀보다 더 기나?
- 그렇게 긴 뱀은 지옥에나 있을 기다.
계집아이는 문득 무서워졌다. 질기고 억센 뱀들이 시푸른 잎사귀를 달고 산을 칭칭 감고 있었다.
문득 눈물이 났다.
- 니 와 우노?
- 무섭어서.
- 뭐가?
- 칡넝쿨이.
- 지지바 니 참 벨나다. 무섭으면 내 손 잡아라.
아이는 훌쩍이며 그의 손을 잡았다. 조금 올라가니 그의 말대로 산나리 꽃이 무더기로 피어있는 기슭이 있었다.
- 봐라 진짜 마이 핐다 아이가? 내는 거짓말 안한다.
그는 산나리 꽃 한 송이를 따주며.
- 냄새는 벨로다. 내는 이 꽃 안 좋아한다.
하고 퉁명스레 말했다.
- 와?
- 주근깨투성이 꽃이 뭐가 좋노? 냄새도 나쁘고 색깔도 맘에 안 든다마. 우쨌든 내는 싫타.
그가 내 곁에 앉으며 산나리 꽃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때 불쑥 아이가 물었다.
- 작은 할매는 어데 갔노? 아제 엄마 말이다.
- 모르겠다.
- 사람들이 그라는데 작은 할매는 아제를 우리 집에 버리고 도망갔다 카더라.
그때 그의 얼굴에 언 듯 분노 같은 것이 스쳐가는 것을 아이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아이의 운명은 자꾸 그의 이글거리는 분노를 건드리고 있었다.
- 작은 할매는 왜 첩이 됐는지 모르겠다 마, 맘도 착한데.
- .....
- 오늘 아침 밥상머리에서 삼촌은 울아부지한테 와 덤벼 들었노? 그라이까 맞제.
- 이 지지바가?
- 아제는 공부도 안 하고 만날 돌아다닌다는 건 다 맞는 말 아이가? 그란데 삼촌이 아부지한테 자꾸 말대꾸하고 그라이까 귀때기를 맞제. 내는 삼촌이 나뿌다고 본다.
그때였다. 그가 벌떡 일어서서 그 아이의 팔을 질질 끌고 산나리 밭으로 들어간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