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37 - 윤대녕 "어머니의 수저" - Part 2
이분은 음식도 좋아하셨지만 여행도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분의 단편소설들이 길가에서 쓰여졌다고 흔히들 말을 하죠. 예들 들면, 화개장터에 갔다가 지리산에 하동에서 쓰신다거나 또는 이런 어떤 전국방방곡곡에 그 어딘가에서 글을 쓰셨죠. 제주도에서 쓰신 글도 있고요. 뭐 해외에 가서 쓰신 글도 아마 있을 겁니다. 이런 여러가지 그 방랑벽과 또 이런 음식에 대한 취향들이 결합해서 이 산문집이 쓰여졌다고 봐야할 겁니다. 이 [어머니의 수저]라는 이 책에는 우리나라 음식들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습니다. 당연하죠. 한국의 이 팔도 방방곡곡을 윤대녕 씨 만큼 많이 돌아다니신 분도 없을 것이고요. 또 그 만큼 이 음식 저 음식에 관심을 가지는 분도 아마 저는 많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또 일종의 풍류객과 같은 면모도 있으세요. 그래서 어디에 아름다움 꽃이 피면 거기에 가서 술을 드시고 또 맛있는 음식을 드시고 또 가끔 바다로 나아가서 바다 낚시 같은 것을 하시고, 이런 모습들, 저는 직접 바다 낚시를 하거나 그런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많은 글들로 이분이 이후에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아예 제주도로 옮겨서 거기서 몇 년간 살기도 하셨다고 들었어요. 많은 낚시를 하셨겠죠? 그 이야기가 이 [어머니의 수저]에도 들어있습니다. 저는 지금 해외에 일년 넘게 나와 있다보니까요 가장 그리운 것은 먹는것 입니다. 저도 이제 문학계에 들어가서 입맛을 버렸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라면과 간단하게 아무거나 먹고는 살 수 없는 입이 되어버려서 정갈하게 만들어진, 정성스럽게 조리된 음식을 혀가 찾는데요 해외에서는 그런 것은 만족시키기가 어렵죠. 특히 발효식품들 장이라던지 장아찌라던지 뭐 잘 만들어진 김치라던지 이런 것들을 먹어볼 수가 없어서요 좀 가끔 향수에 시달릴 때가 있습니다. 그런 마음에서 이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교도소에 있는 수감자들이 요리책을 자주 본다고 하죠? 그것은 은어로 '식당간다', '외식간다' 이렇게 말을 한데요. 나 오늘외식간다 이러면 요리책을 대출해서, 교도소 안에도 책을 대출해주는 도서실이 있데요, 그걸 빌려가지고 본다고 합니다. 좀 짠하죠? 네 바로 그런 마음으로 제가 이 책을 괴로운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여기에는 윤대녕 씨 특유의 아름다운 한국어로 자신의 한국음식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 감수성, 이런 것들을 절절하게 적어 놓으셨기 때문에 읽는 사람으로서는 한편으로는 흡족하고 (네, 외식나가는거죠) 한편으로는 좀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그 중에 몇 편을 골라서 오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장아찌
"마땅히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금강경]에 나오는 말이다. 땔나무 장사를 하며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혜능이 남의 집 앞을 지나다 우연히 엿들은 소리다. 문맹이었던 그는 이 독송을 듣고 활연대오, 그 길로 홍인대사를 찾아가 마침내 의발을 전수받고, 달마대사로부터 시작된 중국 선불교의 맥을 잇는다. 그리고 혜능으로 전수된 선불교는 마침내 귀족주의의 허물을 벗고 대중 속으로 내려와 넓고 깊게 퍼지기 시작한다.
이십대 중반에 나는 공주의 한 절에서 일 년을 보낸 적이 있다. 군에서 제대할 무렵 혜능 스님의 [육조단경]을 읽고 크게 놀라, 제대하고 나서 오일 만에 이불을 싸들고 절로 들어갔다. 인생에 대해서 뭘 좀 깨닫고 싶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깨달음은 그리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일러 흔히 소식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누군가 한 소식 했다는 소문이 들려오면 젊은 스님들은 밤잠을 못 이루고 몸부림친다. 집에서 떠나왔으되, 머리를 깎고 출가한 사문이 아니었던 나는 요사채에서 곁방살이를 하며 책이나 읽으며 소일했다. 스님들은 내가 고시생인 줄로 알았다. 내가 아니라고 거듭 말해도 좀 처럼 믿지 않는 눈치였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절에 들어와있을 까닭이 없는 것이다. 고시생이 아님을 증명하게 위해 나는 일주일이 멀다하고 공주 시내에 내려가 술을 마시고 올라왔다. 한번은 크게 취해 돌아와 대웅전 안에서 쓰러져 자다 주지스님한테 들켜 맞아 죽을 뻔 했다. 그래도 웬일인지 나를 쫒아내지는 않았다. 속세에서 온 웬 얼뜨기를 구경하는 재미로 그냥 놔뒀지 않나 싶다.
어느 날 공주에서 대학교를 다니던 막내 여동생이 감기약을 지어가지고 올라왔다. 경내 하얀 불도화와 수국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봄날이었다. 감기약뿐 아니라 여동생은 치킨까지 싸들고 절로 왔다. 오랫동안 기름기에 굶주려 있던 나는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게걸스럽게 통닭을 먹어치웠다. 그러고는 닭 뼈를 하필 대웅전 뒤편 지네가 득실거리는 밤나무 아래에 갖다버렸다. 닭과 지네가 천적 관계라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누가 고해바쳤는지 주지스님이 나를 불러내더니 귀를 잡고 밤나무 아래로 끌고 갔다. 수백 마리의 지네가 몰려들어 닭뼈를 갉아먹고 있었다. 그야말로 아수라가 따로 없었다.
이번에도 주지스님은 나를 쫓아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수께끼 같은 일이다. 그 대신 끼니마다 공양주가 챙겨다주는 밥상의 메뉴가 달라졌다. 밥은 있으되 반찬은 장아찌 몇 조각뿐이었다. 그리고 사기 사발에 담긴 냉수 한 그릇. 한 달 동안 나는 오직 장아찌로만 하루 세 끼 밥을 먹어야 했다. 그래도 공양주가 딴에는 내 생각을 해줬는지 장아찌의 종류가 며칠 단위로 바뀌었다. 참외장아찌, 깻잎장아찌, 오이장아찌, 감장아찌, 고사리장아찌, 절에서 먹는 두부장. 내 생에 그렇게 정갈한 밥상을 받아보기는 그제나 이제나 처음이었다.그 밥은 맛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장아찌 덕분이었다. 어느 장아찌든 된장독 속에 오래 박아둔 터라 깊은 맛이 베어나왔다. 장아찌가 밥도둑 역할을 한 것이다. 한 달이나 장아찌 반찬으로 밥을 먹는 동안 나는 몸과 마음이 지극히 맑아지는 경험을 했다. 그 장아찌들은 묵언으로 전하는 스님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내게 장아찌는 하나의 법이다.
하안거 동안 스님들은 삼 개월씩 선방이나 토굴에 들어가 화두를 붙잡고 수행에 정진한다. 독 속의 장아찌처럼 말이다. 결제가 풀리고 선방이나 토굴에서 나올 때 한 소식 하는 게 스님들의 변치 않는 오랜 염원이다. 그러니 고추장이나 된장 속에 깊숙이 박혀 스스로 맛이 밴 장아찌야말로 한 소식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스님들이 하안거와 동안거에 들기 전 목욕재계하고 마음을 정갈히 하듯, 장아찌가 될 채소는 독 속에 넣기 전 소금에 절이거나 그늘에서 꾸덕꾸덕 말린다. 조금 딱딱한 표현이지만 이를 전문용어로는 생활세포를 사멸시킨다고 한다. 채소에 물기가 남아있으면 장도 장아찌도 상한다. 장에 있는 효소의 오랜 소화 작용으로 장아찌의 재료는 원래 세포기능을 완전히 잃고 더욱 풍미 있는 음식으로 변한다. 그들은 독 속에 은거하는 동안 스스로 깨달아 나온 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다른 음식과는 무게감과 존재감이 다르다. 장아찌가 김치류에 속하면서도 기호품으로 분류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나는 몸과 마음이 혼탁할 때면 여전히 장아찌만으로 밥을 먹는다. 그리고 식사를 끝낸 뒤에는 반드시 냉수를 마신다. 장아찌는 '마땅히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의 그 말씀에 값하는 음식이다. 그 자체가 하나의 선이고 법이다.
장아찌는 간장, 된장, 고추장에 박아 만든다. 오이, 무, 가지, 배추, 미나리, 도라지, 더덕, 마늘, 마늘쫑, 풋고추, 깻잎, 가지 등의 채소를 재료로 하며 곶감, 참외, 개암 등의 과일도 쓴다. 또 육장이라는 게 있다. 말 그대로 고기나 생선으로 담근 장이다. 소고기, 양고기, 토끼고기, 닭고기, 꿩고기는 물론이고 북어, 전복, 오징어, 연어, 방어, 숭어, 도미, 민어, 준치, 문어 등의 생선도 장아찌로 담가 먹는다. 생선은 해안 지방에서, 채소나 과일은 내륙 지방에서 장아찌의 재료로 썼다. 장아찌는 밥상의 조연이면서 없으면 서운한 일등공신이다. 젖갈도 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밥맛이 없을 때는 더욱 그 진가를 발휘한다.
얼마전 재래 장아찌가 먹고싶어 아내와 함께 남대문 시장을 찾아갔다. 그곳이라면 틀림없이 진품 장아찌가 있을테고 또 믿고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 골목 저 골목을 뒤지다 보니 과연 장아찌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