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원 초대소, 열 네 번째-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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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원 초대소, 열 네 번째
나는 은혜에게서 일본인의 표정, 몸가짐, 옷차림, 신발 정리법 외에도 화장품과 화장법까지 배웠다. 지도원은 화장도 일본인화 교육의 하나라며 매일 빠짐없이 화장을 하도록 지시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화장품은 보잘것없는 조선제 몇 개뿐이었기 때문에 은혜 선생이 외국인 전용 외화상점에서 색조화장을 위한 아이사도우, 볼연지, 립스틱 등이 있는 화장품 세트를 사다 주었다. 은혜는 자기 맛사지 크림까지 써가며 화장도 해주었고 정성을 다해 나를 가르쳤다.
일본인화 교육을 받는 동안에도 사상성을 높이고 공작원의 자질을 기르기 위해 ‘‘조선의 별', ‘사령부를 멀리 떠나서', ‘친위전사', ‘혁명가', ‘붉은 날개', ‘고난의 길', ‘필살의 여격술가' 등 많은 영화를 관람하였고 ‘밀림아 이야기하라' 라는 가극도 보았다. 평양 만수다리 부근 큰길에서 평양 수예품 연구소 쪽으로 꼬부라져 들어가면 공작원만 전용으로 리용하는 영화관이 있는데 이곳에서 영화 관람을 했다. 영화관에 갈 때도 색안경을 쓰고 우산을 들어 철저히 안면위장에 신경을 썼다.
나를 그토록 열심히 가르쳐 주는 은혜 선생에 신분에 대해서는 비밀에 붙여졌으나 초대소 식모를 통해서 그녀의 신분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불행한 여자였다.
일본어 학습을 받던 중 선생이 나에게 일본 가명을 지어주겠다며 여러 가지 이름을 생각하다가 무의식 중에 자기의 일본 이름이 ‘치도세' 라고 말한 일이 있었다. 공작원에게 자기의 신분을 로출시키는 것은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은혜는 자신의 일본 이름을 말해 놓고 황당해 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녀가 너무나 당황해 하므로 나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못 들은 척 그냥 넘겨 버렸다.
나이는 당시 19살인 나보다 다섯 살 위인 24살이라고 했으나 체격은 아주머니 티가 났다. 그녀와 나는 초대소에서 같이 목욕을 한 적이 있다. 은혜와 나의 신분에 대한 사항은 비밀에 붙여졌지만 몸매만 보아도 대충 짐작이 갔다. 더구나 젊은 여자끼리의 자존심 문제도 있어 은혜는 나에게 자신이 처녀라고 속여 말했다.
은혜와 초대소 어머니와의 관계는 나와 은혜와의 관계와도 달랐기 때문에 은혜는 가끔 초대소 어머니에게 자신의 신세를 하소연했다 한다.
은혜는 일본 동경 출신인데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곧 결혼하였고 아들과 딸 하나씩을 낳은 뒤 리혼하였다. 1979년도경 아들이 3살, 딸이 1살일 때 은혜는 어느 해변가로 놀러가서 해변가를 거닐다가 북조선 배에 의해 북으로 랍치되었다 한다. 랍치 당시 배멀미를 심하게 해서 며칠간 밥을 먹지 못해 거의 혼수상태였으며 짐도 없이 그냥 평상복에 손가방 하나를 들었을 뿐이었다.
랍치된 뒤 모란봉 초대소에 수용되었는데 그때는 아이들과 집을 그리워하며 울고불고 하면서 밥 먹기를 거부하다가 얼마쯤 지나자 자포자기하고 환경에 적응해 나갔다.
초대소 어머니는 ‘행동을 보아 아마 일본에서 술집에 다니던 여자같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내가 보기에도 은혜는 일본에서 물장사를 한 것 같았다. 술과 담배를 잘 했으며 동석식사 때 은혜가 과장이나 지도원에게 술을 따르거나 재떨이를 재빨리 비우면 과장 지도원이,
“역시 하던 솜씨가 있어 잘 하는구만. 은혜 애인이 아마 50명도 넘지?” 하고 농말을 던지곤했다.
은혜는 술에 취하면 초대소 창문 밖을 내다보며 멍하니 앉아, “우리 아이가 지금은 몇 살인가?” 하면서 손을 꼽아 보다가 끌려 온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비탄에 빠져 괴로워하면서 울기를 잘 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