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지하 조사실, 서른 두 번째-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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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지하 조사실, 서른 두 번째
나는 그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심정으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말을 듣고는 땅 속으로 꺼질 수 있으면 꺼지고 싶었고 하늘로 솟아오를 수 있으면 솟아 사라지고 싶었다.
“다음으로....”
무슨 더 할 이야기가 남았는지 그는 또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동안 너를 관찰해 온 내용인데 우리는 네 일거일동을 단 한 가지도 무심히 보아 넘기지 않았어.”
그 말을 들으며 내가 완전히 그들의 덫에 걸렸었음을 알았다.
“너의 침구 정돈하는 모습은 장기간 조직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만이 가능할 정도로 능숙해서 우리도 놀랄 지경이었어. 너는 우리말을 모르는 체해 왔으나 네가 습관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일 때 우리가 ‘사람들은 마음이 불안할 땐 쉴 새 없이 손가락 장난을 치지' 하니까 순간적으로 주먹을 쥐고 손가락 움직임을 멈추더군. 또 중국말로 계속 심문하다가 우리들끼리 우리말로 ‘ 얘가 거짓말 한다' 고 지적하면 너는 거짓말이 아님을 설명하려고 더욱 애를 썼어. 또 우리들끼리 우스운 이야기를 하면 너는 참기 힘들어 화장실로 뛰어갔지. 그리고 일어와 우리말로 ‘너는 간첩이다'라고 각각 적어 보였더니 똑같이 당황해 하는 반응을 나타냈어. 이는 네가 우리글을 알고 있다는 증거였어. 언젠가 커피를 마실 때도 후후 불면서 마시기에 ‘틀림없는 조선족이다'고 했더니 커피를 안마시고 갖다 버렸지. 더 이상 말을 해야 하나?”
나는 하나하나 옷이 벗겨지며 알몸이 드러나는 듯한 수치감을 느껴 귀를 막고 싶었다.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었고 더 이상 듣고 싶지도 않았다. 수치스럽고 괘씸하고 부끄럽고 미안하고......하여튼 복잡 미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거짓의 한계는 진작부터 와 있었다는 것을 안 이상 반항할 말도 없었다.
나는 입을 굳게 다물어 버렸다. 머리는 깨어질 듯이 무겁고 터질 듯이 복잡했다. 잠을 청했으나 소용이 없었고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나로 인해 고통을 당할 가족 때문에 더욱더 가슴 아팠다. 나를 사랑했던 가족들에게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고통을 당하게 한다는 것이 나로서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말을 않는다고 해도 결코 살아남을 수가 없다' 나는 무엇인가 결정을 내려야만 할 수간이 왔다고 판단했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더더욱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여태까지는 내 정체를 알아내려고 잘도 참아왔지만 내가 북조선 공작원으로 비행기를 폭파한 사실을 안다면 당장에 태도가 돌변할 것이 틀림없다. 더구나 그들이 가장 증오하고 적대시하는 북조선 공작원이며 그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한 범인이라는 비밀을 알고 나면 그때부터 그들은 온갖 짓을 다 할 것이다. 그렇다고 입만 봉하고 있을 수는 없는 형편이 아닌가.' 정말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서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자연히 생각에도 두서가 없었다. 내가 살 길을 찾다가 가족이 살 길을 찾다가 모든 것을 포기하기도 했다가 하며 우왕좌왕 안절 부절이었다.
‘내가 비밀을 털어 놓으면 우리 가족들은 어떻게 될까? 또 가족이나 동무들은 조국을 등진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아픈 와중에 중학교 다닐 때 있었던 일이 문득 생각났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