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지하 조사실, 열 아홉 번째-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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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지하 조사실, 열 아홉 번째
오전 10시쯤 되자 50대 중반의 남자가 들어오면서 대뜸 중국어로 아침 인사를 했다.
“짜오 샹 하오”
정확한 중국 발음이었다. 그는 소파에 앉자마자 유창한 중국어로 겁부터 주려 들었다.
“당신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우리는 다 알고 있지만 우선은 중국어로 묻겠소. 도대체 당신은 지금 앞뒤가 맞지 않는 말만 하고 있소. 나중에 당신이 조선인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내용들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겠소.”
그 남자가 강하게 나왔다. 나도 그에 맞서 강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당신들이 나를 조선인이라고 확신한다고 해서 중국인인 내가 조선인이 될 수 있나요?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을 영문도 모르게 잡아다 놓고 억지를 쓴다고 해서 없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 문젭니까!”
그는 내가 따지는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했다.
“당신은 흑룡강성 출신이라고 했지만 지금 당신이 쓰는 말은 흑룡강성이 있는 동북지방 어투가 아니오. 당신 말은 남방 지방 사투리인데 이 점을 설명해 보시오.”
그의 말을 듣고 미처 이런 점까지 생각해 두지 못한 나의 어리석음에 가슴을 쳤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도무지 설명 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입을 다물고 있을 형편도 못 되었다. 그저 즉흥적으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답할 수밖에.
“열 살 때 흑룡강성을 떠났고 광주지방에 가서 중학교 2학년까지 살다보니 그쪽 사투리가 밴 것 같습니다.”
수사관은 내 답변에 큰 의미를 두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내 나름대로 앞에 진술한 내용을 합리화시키려고 애썼다.
“지금까지 1981년도에 흑룡강성을 떠났다고 거짓말을 한 이유는 내가 어떻게 될지 몰라서 그랬어요.”
내가 하도 어처구니없는 억지를 쓰니까 수사관은 이 점에 대해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다음 질문 또한 나를 기막히게 만들었다.
“흑룡강성에는 오상현은 있어도 오상시는 없는데 당신의 출생지가 오상시라고 하니 그런 것도 자세히 알아두지 않고 거짓말을 해요? 오상현을 잘못 알고 말했다면 오상현 주변에 있는 현을 하나만 대 보시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이사람 말대로 자기가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고장 이름도 똑똑히 모르면서 완벽한 위장을 하겠다고 우기고 있으니 웃기는 일이다. 완전한 그곳 태생의 중국인이 되려면 적어도 한번쯤은 그곳에 가 보았어야 되는 게 아닌가. 너무 경솔했고 북에서의 공작원 교육이 그만큼 허술했다고 느껴졌다. 내가 오상현 주변에 있는 다른 현을 알 리가 없었다.
“그곳을 어려서 떠난데다가 떠난 지 너무 오래 되어서 알 수 없으니 이해해 주세요.”
풀이 죽어 사정조로 대답하고 말았다. 갑자기 수사관이 나에게 하던 말을 멈추고 옆 수사관들에게 조선말로 “얘가 거짓말만 하고 있어” 하고 수군거렸다. 나는 흥분해서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어요?” 중국어로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나의 결정적인 실수였다. 계속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라 그가 하는 조선말은 못 알아듣는 척해야 하는데 착각을 한 것이었다. 그러자 중국어로 질문하던 수사관이, “지금 우리가 무슨 말을 한 줄 알고 그렇게 흥분하는거지?” 하고 되물으며 내가 자기들이 파놓은 함정에 쉽게 빠져드는 걸 즐기듯 껄껄대고 웃었다. 나는 ‘앗차' 하고 실수를 깨달았으나 이미 쏘아놓은 화살이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