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지하 조사실, 열 네 번째-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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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지하 조사실, 열 네 번째
귀국 후에는 꾸바에서 빵을 먹던 습관이 붙은 우리 식구들을 위해 나는 밥공장에 가서 밀가루와 쌀을 빵으로 바꾸어 오는 심부름을 도맡았다. 빵이라고 해야 그냥 밀가루를 쪄낸 것에 불과한 조잡한 것이었지만 간식이 많지 않은 북조선에서는 그것도 여간해서는 구해 먹기 힘들었다. 꼬리가 길게 늘어진 줄에 서서 마냥 차례를 기다려야만 했다. 내 차례가 거의 다 되어 가는데 접수에서 ‘빵이 다 떨어졌어. 낙케 오라' 하면 나는 울상이 되어 빈손으로 집에 돌아오는 일이 허다했다. 처음에는 ‘낙케'라는 말을 몰라서 어리둥절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나중에 오래' 하고 일러주었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는 어머니의 집안 살림을 도맡아 도와드렸다. 아빠트 공동화장실 청소, 공동수도에서 물 긷는 일, 아빠트 복도까지 연탄을 날라 올리는 일, 깨진 연탄을 모았다가 연탄 찍는 손기계로 찍어내 말리는 일, 구멍탄 재 버리는 일, 김장, 빨래....하다못해 가구마다 할당된 인분 말리는 일까지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그 많은 일을 어머니 혼자 다 하기는 벅찼다. 어머니는 내가 부지런하고 날쌔서 심부름시킬 맛이 나지만 여자가 꼼꼼하지 못하고 너무 덜렁댄다고 항상 야단을 쳤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집안일을 돕고 살림 지도를 받다나니 지금도 집안 살림하는 데는 그리 빠지는 축이 아니라고 자부한다. 집안의 맏딸이 그래서 살림 밑천이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런 내 몸에 밴 습관이 여자수사관 눈에도 달리 보였던가 보다.
아침식사가 끝나자 곧바로 심문이 시작되었다. 어제 예상했던 내 추측이 맞은 것이다. 그뿐 아니라 잠을 설치며 궁리한 대로 이들은 나에게 알고 있는 조선말을 대보라고 했다.
“흑룡강성에서는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으니 어렸을 적에 조선족 친구들에게서 배운 말이 있을 게 아니겠어?”
어젯밤에 대책을 세워놓지 않았다면 몹시 당황할 뻔한 질문이었다. 나는 이 질문을 받고 혹시 방 안에 내 심리변화를 알아내는 기계장치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해서 방안을 유심히 둘러보았다. 겉보기에는 별다른 장치는 없는 것 같아 좀 안도가 되었다. 나는 수줍음을 많이 타는 처녀처럼 손으로 입을 가리고 어제 생각해 놓았던 조선어를 하나하나 말해 나갔다.
손을 들어 ‘소옹', 발을 가리키며 ‘바아알', 정강이를 쓰다듬으며 ‘달이' 하는 식으로 발음도 유독 외국인답게 해보였다. 거기에는 별 애로사항이 없었다. 바레인공항 사건 이후 단 한 번도 조선말을 쓰지 않아서인지 정말 꼬부라진 조선 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계속해서 고개를 숙이며, ‘안뇽하쎄요', 넓적다리를 꼬집는 시늉을 하며 ‘아쁘다', 배에 손을 대고 허리를 약간 구부리며 ‘고쁘다', 머리를 끄덕이면 ‘갠짠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몸을 약간 흔들며 ‘조오타' 하고 말해 보였다. 이 세상 말 중에서 내가 가장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말. 바로 조선말. 일본어보다도 중국어보다도 잘 할 수 있는 그 조선말을 혀가 잘 돌아가지 않는 듯 반토막 발음을 하고 있자니 이상야릇한 기분이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비애가 느껴졌다.
수사관들은 내가 더듬더듬 조선말을 하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할 뿐 발음을 바로잡아주거나 하지도 않았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더 이상 조선말에 대해서는 묻질 않고 이번에는 영화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에는 영화관에서 종종 북조선 영화를 보여 준다는데 물론 본 적이 있겠지? 그 영화 제목을 말해봐.”
그들은 내가 조선 영화를 봤어야 당연하다는 식으로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물어오니까 못 봤다고 말하기가 곤란해졌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