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지하 조사실, 열 세 번째-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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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지하 조사실, 열 세 번째
내일부터는 내가 적어 준 학력과 경력을 가지고 더 세부적으로 묻고 사람을 들볶으면서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할 모양이었다. 나는 잠들지 못한 채 몸을 뒤척이며 이런 저런 대책을 궁리해 보았다.
우선 제일 큰 골칫거리는 그놈의 조선말이었다. 아무리 외국인 행세를 완벽하게 해내려 해도 수사관들이 조선말을 하는 걸 들으면 가끔 무의식적으로 조선말이 터져 나와 훼방을 놓았다. 탄로가 나지는 않았지만 몇 번이나 진땀을 빼면서 고비를 넘겼다. 만약의 경우 내 입에서 조선말이 터져 나오는 일에 대비하여 묘책을 강구해야만 한다. 연구 끝에 어린 시절 조선족 아이들로부터 조선말을 조금 배웠다며 많이 사용하는 조선말은 몇 마디 알고 있다고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런 예방책도 없이 그냥 지내다가는 큰일이 닥칠 것 같았다.
12월 18일. 새벽녘까지 뒤척이다가 막 잠이 든 것 같은데 수사관들이 나를 깨웠다. 벌써 아침 6시 반이었다. 그날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수 모포를 개고 침구를 정돈했다. 화장실에 들어가 내복을 갈아입고 속내의는 내가 빨아야 되겠다 싶어 오랜만에 빨래를 했다.
빨래를 끝내고 화장실을 나오니 의사가 기다리고 있다가 피검사와 소변검사를 하겠다며 주사기로 피를 뽑고 소변을 받아갔다. 아침식사를 하면서 여자수사관이 지나가는 말처럼 이야기했다.
“빨래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던데? 원래 살림꾼인 모양이야. 그리고 침구 정돈한 걸 보니까 완전히 군대식이더라.”
나는 가슴이 뜨끔했으나 못 알아들은 척 밥을 계속 먹었다. 그녀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우리 집안의 큰딸이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서 살림을 배웠다. 꾸바에서 동생들이 생기면서 어머니가 시키는 잔심부름이 많아졌다. 그땐 나 역시 어렸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정되어 있었다. 어머니가 밥 준비를 시작하면 2층에 올라가 가스 단추를 돌리는 일, 어머니가 집을 비우실 때 현옥이를 단속하는 일, 침대 맡에 앉아서 갓난아이이던 현수를 흔들어 재우는 일이 고작이었다.
한번은 내가 소홀한 틈에 애기가 깨어 침대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울다 지치고 경기까지 일으키는 사고가 일어났었다. 이 일로 나는 호되게 혼이 났다. 내가 학교에 가도록 자라는 동안 현옥이와 현수는 내 혹처럼 그림자처럼 함께 있다시피 살았다.
꾸바에서 귀국할 때도 나는 두 동생들 때문에 큰딸 노릇하느라 고생을 적잖이 했다. 꾸바에서 모스크바 그리고 중국까지는 비행기 편을 이용해 별 불편이 없었으나 중국에서는 평양 가는 국제열차를 탔다. 아버지는 우리들보다 반 년 후에나 귀국하기 때문에 어머니는 혼자 3명의 어린아이를 이끌고 올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다섯 살, 현옥이가 세 살, 현수가 한 살이었으니 모두 애기들이다 마찬가지였다. 중국에서 출발하여 평양으로 가는 국제열차는 느리고 복잡하고 지루했다. 장시간 여행이다 보니 기차 내에서 나오는 애기 기저귀는 제 때 빨아 주어야 하므로 화장실 수도를 이용해야만 되었다. 기차 내의 수도꼭지는 눌러야 물이 나오도록 되어 있어 어머니가 기저귀를 빠는 동안 나는 계속 수도꼭지를 누르는 일을 맡았다. 그 일도 어린 나로서는 큰딸이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어머니를 돕는다는 마음으로 힘들게 해냈다.
귀국 후에는 꾸바에서 빵을 먹던 습관이 붙은 우리 식구들을 위해 나는 밥공장에 가서 빵으로 바꾸어 오는 심부름을 도맡았다. 밀가루와 쌀, 그리고 돈 30전을 들고 아빠트 뒤에 있는 밥공장에 가면 빵으로 바꾸어 주었다. 빵이라고 해야 그냥 밀가루를 쪄낸 것에 불과한 조잡한 것이었지만 간식이 많지 않은 북조선에서는 그것도 여간해서는 구해 먹기 힘들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