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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의 고백 (Kim Hyun-hee's confession), 눈물의 고백, 마흔 아홉 번째-217

눈물의 고백, 마흔 아홉 번째-217

눈물의 고백, 마흔 아홉 번째

내가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배우기 시작한 곳이 쿠바였고 쿠바의 생활은 어머니의 말대로 행복 그것이었다. 쿠바 생활 중에서 못 잊을 기억 중에 하나는 짓궂은 내 또래의 남자아이였다. 그 아이는 외교관 성원 김재봉 참사의 아들이었는데 거의 나와 붙어 놀면서도 나를 철저히 괴롭히는 짓궂은 훼방꾼이었다. 나에게 그 아이는 폭군으로 군림했다.

어찌나 개구지고 심술궂던지 생일선물로 받은 내 고무 구명대를 젓가락으로 마구 찔러 한군데도 성한 곳이 없게 뚫어 놓을 정도였다. 또 자기 기분에 조금이라도 거슬리기만 하면 주먹질은 물론 내 얼굴을 마구 할퀴어 상처투성이로 만들어 놓았다. 심지어는 내가 한눈팔고 있는 사이에 선인장의 큰 가시로 내 왼쪽 어깨를 사정없이 때려 1cm 가 넘는 가시가 뼛속까지 박힌 일도 있었다. 매일 나를 못살게 하고 괴롭히면서도 내가 한시라도 자기 눈에 띄지 않으면 우리 집 문 앞에 와서 진을 치고 “현희야 놀자”하며 끈덕지게 불러댔다. 달갑지 않은 손님인 그가 찾아오면 나는 물론 어머니도 눈살을 찌푸렸으나 수백번씩 “현희야 놀자”를 되뇌이는 그의 끈질긴 하소연에 끝내는 굴복하고 말았다. 결국 나는 그 아이에게 이끌려 나가 또다시 시달려야 했었다.

조국에 돌아와 중학교에 다닐 때 그를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그는 당의 높은 간부 자녀가 다니는 남산중학교에 재학중이었다. 그는 어릴 적에 나를 괴롭힌 죄의식 때문인지 아니면 머리가 커져 이성에게 내외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나를 슬슬 피해 버렸다. 나도 어릴 때는 남달리 몸이 날랬고, 특히 남자 아이 이상으로 나무에 기어오르기를 잘했다. 쓸데없이 남을 괴롭히거나 앙탈을 부리며 개구쟁이 짓을 하지는 않았지만 높은 곳에 오르기를 좋아해 변을 당하기도 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우리 집 옥상에는 아이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출입문을 봉쇄했으나 하루는 어른들이 소홀히 하여 옥상 문이 열려져 있었다. 나는 옥상에 올라가 멀리까지 바라다보고 저 아래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 재미있어 여동생 현옥이와 다른 아이들을 끌고 옥상으로 올라가 놀았다. 며칠 동안 어른들에게 발각되지 않고 무사히 넘겼으나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어느 날 어른들에게 들키고 말았다. 현옥이와 같이 옥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발장난을 하며 저 아래에서 펼쳐지는 정경에 넋을 잃고 있다가 옆 건물에서 일하던 쿠바 노동자들의 연락을 받고 사색이 되어 달려온 부모님에게 끌려 내려갔다. 부모님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나는 집에 끌려오자마자 호된 기합을 받았다. 그때는 어른들이 왜 그렇게 놀라고 화를 내는지 영문을 몰라 그저 겁먹은 얼굴로 눈물만 뚝뚝 떨구었다.

외국에 나가 살아도 조선말과 김일성의 위대성에 대한 가르침은 소홀히 넘기지 않는 것이 국가 방침이었다. 대사관 성원 자녀들은 매일 두세 시간씩 집체적으로 집중 교양을 시켰다.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김일성 원수님 고맙습니다'가 제일 먼저였고 김일성 초상화 앞에서는 저절로 숙연하게 고개가 수그러질 정도로 김일성을 숭배하게 되었다. 반면에 ‘미국'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소름이 확 끼칠 정도로 반미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반미사상은 영화 등을 통해 교양시켰다. 북에서는 미국을 가리켜 ‘우리 민족과 한 하늘을 같이 이고 살 수 없는 불구대천의 철천지 원쑤' 라고 가르치고 있다. 아버지와 함께 쿠바에 있을 때는 “미제가 쿠바를 침공해 오려 한다”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한 번은 해수욕장에 나갔는데 아버지가 멀리 보이는 육지 쪽을 가리키며 "미국 놈 땅“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때부터 고무구명대가 파도에 밀려 미국 땅으로 갈 것 같은 공포심에 물놀이도 재미없고 나중에는 소리 지르며 울어버렸다. 그리고 해안가에 떠다니는 빈 깡통과 빈 병이 미국으로부터 파도에 떠내려 왔다고 하여 그것이 몸에 닿을까 봐 질겁을 하던 일도 있었다. 자유스러운 쿠바 생활 속에서도 어머니의 나에 대한 가정교육은 누구보다도 엄격하였다.

나레이션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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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고백, 마흔 아홉 번째-217 Confession of Tears, Forty-ninth-217

눈물의 고백, 마흔 아홉 번째

내가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배우기 시작한 곳이 쿠바였고 쿠바의 생활은 어머니의 말대로 행복 그것이었다. |歩行||||||||||||それだった 쿠바 생활 중에서 못 잊을 기억 중에 하나는 짓궂은 내 또래의 남자아이였다. |||できない|||||いたずらな||| 그 아이는 외교관 성원 김재봉 참사의 아들이었는데 거의 나와 붙어 놀면서도 나를 철저히 괴롭히는 짓궂은 훼방꾼이었다. |||||惨事の|||||遊びながら|||||いたずら者 나에게 그 아이는 폭군으로 군림했다. ||||君臨した

어찌나 개구지고 심술궂던지 생일선물로 받은 내 고무 구명대를 젓가락으로 마구 찔러 한군데도 성한 곳이 없게 뚫어 놓을 정도였다. |お調子者で|意地悪だった||||||箸で||||無傷な||||| 또 자기 기분에 조금이라도 거슬리기만 하면 주먹질은 물론 내 얼굴을 마구 할퀴어 상처투성이로 만들어 놓았다. |||少しでも||||もちろん||||引っかく||| 심지어는 내가 한눈팔고 있는 사이에 선인장의 큰 가시로 내 왼쪽 어깨를 사정없이 때려 1cm 가 넘는 가시가 뼛속까지 박힌 일도 있었다. ||気を抜いて|||||棘|||||叩いた|||||骨の奥まで|刺さった|| 매일 나를 못살게 하고 괴롭히면서도 내가 한시라도 자기 눈에 띄지 않으면 우리 집 문 앞에 와서 진을 치고 “현희야 놀자”하며 끈덕지게 불러댔다. ||生き地獄||||||||しなければ|||||||||||しつこく| 달갑지 않은 손님인 그가 찾아오면 나는 물론 어머니도 눈살을 찌푸렸으나 수백번씩 “현희야 놀자”를 되뇌이는 그의 끈질긴 하소연에 끝내는 굴복하고 말았다. |||||||||しかめっ面を|||||||しつこい|||| 결국 나는 그 아이에게 이끌려 나가 또다시 시달려야 했었다. |||||||苦しむ|

조국에 돌아와 중학교에 다닐 때 그를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그는 당의 높은 간부 자녀가 다니는 남산중학교에 재학중이었다. 그는 어릴 적에 나를 괴롭힌 죄의식 때문인지 아니면 머리가 커져 이성에게 내외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나를 슬슬 피해 버렸다. ||子供の頃|||罪悪感|||頭が||異性に|異性にアプロ|||||| 나도 어릴 때는 남달리 몸이 날랬고, 특히 남자 아이 이상으로 나무에 기어오르기를 잘했다. |||||飛び跳ねて||||男の子|木に|| 쓸데없이 남을 괴롭히거나 앙탈을 부리며 개구쟁이 짓을 하지는 않았지만 높은 곳에 오르기를 좋아해 변을 당하기도 했다. 無駄に|||わがまま||いたずらっ子||しなかった||||||||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우리 집 옥상에는 아이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출입문을 봉쇄했으나 하루는 어른들이 소홀히 하여 옥상 문이 열려져 있었다. 나는 옥상에 올라가 멀리까지 바라다보고 저 아래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 재미있어 여동생 현옥이와 다른 아이들을 끌고 옥상으로 올라가 놀았다. |||遠くまで|遠くを見て|||||||||||||| 며칠 동안 어른들에게 발각되지 않고 무사히 넘겼으나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어느 날 어른들에게 들키고 말았다. 현옥이와 같이 옥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발장난을 하며 저 아래에서 펼쳐지는 정경에 넋을 잃고 있다가 옆 건물에서 일하던 쿠바 노동자들의 연락을 받고 사색이 되어 달려온 부모님에게 끌려 내려갔다. |||屋上の端に|||||||情景に|||||||||||思索||||| 부모님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青ざめて|| 나는 집에 끌려오자마자 호된 기합을 받았다. ||||叱責を| 그때는 어른들이 왜 그렇게 놀라고 화를 내는지 영문을 몰라 그저 겁먹은 얼굴로 눈물만 뚝뚝 떨구었다. ||||||||||||涙だけ||

외국에 나가 살아도 조선말과 김일성의 위대성에 대한 가르침은 소홀히 넘기지 않는 것이 국가 방침이었다. 대사관 성원 자녀들은 매일 두세 시간씩 집체적으로 집중 교양을 시켰다. |||||||集中して||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김일성 원수님 고맙습니다'가 제일 먼저였고 김일성 초상화 앞에서는 저절로 숙연하게 고개가 수그러질 정도로 김일성을 숭배하게 되었다. ||||||||thank you||first|||||reverently||bowed|||to revere| |||||||||||||||静かに||頭が下がる|||| 반면에 ‘미국'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소름이 확 끼칠 정도로 반미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America|||||||anti-American sentiment|| ||||||||反米感情|| 반미사상은 영화 등을 통해 교양시켰다. anti-Americanism||||cultivated 북에서는 미국을 가리켜 ‘우리 민족과 한 하늘을 같이 이고 살 수 없는 불구대천의 철천지 원쑤' 라고 가르치고 있다. ||||||||||||irreconcilable||||| ||||||||||||天敵||||| 아버지와 함께 쿠바에 있을 때는 “미제가 쿠바를 침공해 오려 한다”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U.S.||invade|to invade||||||| |||||||侵攻しよう||||||||

한 번은 해수욕장에 나갔는데 아버지가 멀리 보이는 육지 쪽을 가리키며 "미국 놈 땅“이라고 알려주었다. |||||||land||||||| 그때부터 고무구명대가 파도에 밀려 미국 땅으로 갈 것 같은 공포심에 물놀이도 재미없고 나중에는 소리 지르며 울어버렸다. |life raft|the waves|||||||fear||not fun||||I cried |||||||||||||声||泣いてしまった 그리고 해안가에 떠다니는 빈 깡통과 빈 병이 미국으로부터 파도에 떠내려 왔다고 하여 그것이 몸에 닿을까 봐 질겁을 하던 일도 있었다. |the coast||||||||washed ashore|||||would touch||||| ||||缶と|||||流れ着いた|||||||驚き||| 자유스러운 쿠바 생활 속에서도 어머니의 나에 대한 가정교육은 누구보다도 엄격하였다. |||||||home education||strict |||||||家庭教育||

나레이션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