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고백, 마흔 일곱 번째-215
눈물의 고백, 마흔 일곱 번째
나는 북의 평범한 인민 어느 누구보다도 바깥 정세에 대해 밝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지로 남조선에 와서 부딪치는 것마다 생소하고 보는 것마다 새로운 사실뿐이니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우리 집에 항상 식용유가 떨어지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말끝마다 자랑스럽게 수사관들에게 떠들었었다.
"식용유는 상류층 집에서만 구경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수사관들은 나를 무안하게 하지 않기 위해 내 말을 귀담아 들어주었다.
“그래서 우리 집은 항상 튀김 요리를 떨어치는 날이 없었습니다.”
내 자랑이 얼마나 우습게 들릴 소리인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가게에 나가면 흔해 빠진 것이 질 좋은 식용유였으며 포장마차나 구르마에서 싸구려로 파는 음식 또한 튀김 종류인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튀김요리를 할 때는 딴 집에 냄새가 날까봐 창문뿐 아니라 문이라는 문은 다 닫아 걸고 했었습니다.”
나는 내가 살아온 불과 20여년의 세월이 어느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것이 운명이었다면 언제 어디에서부터 불행이 시작되는 최초의 시점이었는지 알고 싶었다. 태어나 인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러한 불행의 조짐은 엿보이지 않았었다. 평생 불운이 따를 것 같지 않은 행복한 여자아이로 사랑 속에서 자라 왔다. 내 성장 과정을 남조선 사람들이 들으면 무엇이 그리 대단한 생활이었느냐고 비웃을지 모르지만 북에서는 제법 잘 사는 특수층의 생활을 누렸다.
아버지는 외교부에서 일했는데 어머니가 나를 첫 임신하여 만삭이 되었을 때 해외로 출장을 떠났기 때문에 어머니는 월동 준비를 마친 뒤 개성 친정집으로 몸 풀러 내려가 나를 낳았다. 외갓집에서는 맏딸이 애기를 가져 첫 출산을 하러 오니까 첫 외손자를 고대하며 온 집안이 떠들썩했고 외할머니는 태몽 꿈을 꾸었는데 틀림없는 남자아이라고 호언장담까지 했다 한다.
1962년 1월 27일, 나는 온 집안의 기대와 주시 속에서 외갓집 식구들에게 실망을 안겨주는 여자로 태어났다. 개성 북안동 외갓집이 나의 출생지였다. 실망은 잠시뿐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밤새 교대로 안아 주고 시집 안 간 이모들은 서로 곱게 옷을 만들어 입혀 주며 예쁜 인형 다루듯 나를 다루었다. 태어남 자체도 외롭고 초라하게 태어나지 않았다고 항상 어머니는 나를 두고 말씀해 왔었다. 어머니 등에 업혀 평양으로 떠나는 기차에 오를 때는 외갓집 식구들이 섭섭하여 눈물까지 글썽였단다.
해외 출장 다녀온 아버지는 첫 애기가 너무 소중해서 애기와 몸이 닿으면 다칠까봐 멀리 손을 뻗어 안아주곤 했었다는데 내가 아버지를 마지막 뵐 때까지 아버지는 그런 마음으로 애지중지 큰 딸을 귀여워했었다. 천덕꾸러기로 태어나 마구 내돌려지며 자라나는 아이들도 얼마든 있는데 나는 모든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곱게곱게 자라났다.
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 식구는 아버지를 따라 조국을 떠나게 되었다. 아버지가 쿠바에 있는 대사관으로 조동되었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 초 쿠바를 둘러싼 주변 정세는 쿠바 혁명 정부가 들어선 지 얼마 안 돼 매우 복잡하고 불안정하였다.
북조선대사관 성원들의 가족 숙소는 대사관과는 거리가 많이 떨어진 곳에 있었다. 혁명 이전에 어느 부르조아가 살던 호화로운 저택을 정리하여 사용했다. 우리가 그 집에 입주할 때는 문 앞에서부터 여자 나체상과 같은 고급 조각품이 즐비하였고 각종 화려한 장식품으로 꾸며져 있었다 한다. 그 후 부르조아의 잔재를 청산한다 하여 고급 조각품과 화려한 장식품을 모두 부수어 버리거나 깨어 버렸다.
나레이션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