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고백, 마흔 네 번째-212
눈물의 고백, 마흔 네 번째
수사관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아까 백화점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것을 알 수 있었다. 백화점과 명동에는 잘 차려 입은 사람들이나 젊은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는데 남대문시장에는 일반적으로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대부분이었다.
“뭘 찾으세요? 구경하고 가세요.” 상점 앞을 지나자 판매원들이 손님을 잡아끌었다.
“좋은 물건 안에 있어요. 들어와 보세요.”
어떤 남자가 내 옷소매를 끌어당기는 바람에 나는 질겁을 해 뒷걸음질을 쳤다. 내 그런 모습을 보며 수사관들이 웃었다. 나는 손님을 끌려고 붙들고 소리치는 것에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북에서는 멀쩡히 진열되어 있는 물건도 “이거 파는 거예요.” 하고 물으면 판매원이 “파는거 아니요”하고 퉁명스럽게 말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것은 단지 진열용, 전시용일 뿐 상품이 모자라는 형편에 오는 손님도 귀찮은 것이다. 그런데 남조선에서는 상품을 팔기 위해 판매원이 손님을 잡아끌고 있으니 그것만 보아도 물자가 풍부한 자유 경쟁사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배고픈데 뭘 좀 먹죠.”
수사관들이 자기들끼리 의논하고는 어느 골목으로 나를 안내했다.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만한 통로를 남겨두고 양쪽으로 모두 음식점이었다. 음식이 모두 통로 옆 길거리에 내놓고 진열되어 있어 좀 지저분하게 보이기는 했다. 잡채, 떡, 튀김, 국수 , 밥, 돼지머리고기, 돼지발족, 순대....아주 먹음직스럽고도 푸짐한 음식들이 한도 끝도 없이 늘어져 군침을 돌게 했다.
북에서는 70년대 이후 지금껏 돼지머리고기를 구경할래야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엄마랑 우리 가족들을 한 번이라도 여기에 데려다 실컷 먹게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1987년도 마지막 휴가 때 참외를 특히 좋아하시는 외할머니를 생각해서 초대소 아주머니에게 미리 부탁하여 참외를 특별 주문 시켰으나 참외가 다 떨어졌다며 대신 수박을 보내왔다. 하는 수 없이 이 수박을 챙겨 들고 집에 갔더니 식구들은 모두 오랜만에 수박 구경한다며 좋아했다. 그런데 수박을 베어 보니 오래 된 것인지 약간 골아 있었다. 그래도 그냥 버리기는 너무 아깝다며 온 식구들이 나눠 먹었는데 결국 엄마가 배탈이 나고 말았던 일도 있었다. 이처럼 모든 게 궁한 실정이니 시장을 둘러보며 각종 식료품과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걸 볼 때마다 북에 있는 가족들을 생각하고 가슴이 아려 왔다.
“뭘 좋아해? 골라봐.”
수사관이 나에게 음식 선택권을 주었다. 나는 원래 순대를 좋아하기 때문에 중간쯤에 자리잡은 순대집을 가리켰다. 겉에서 보기보다는 안이 넓었다. 음식점 안에는 이미 늙수그레한 아저씨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앉아 큰 목소리로 떠들어대는 중이었다. 그들 앞에는 소주병이 몇 개나 비어있었고 새 술병이 또 놓여졌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율이 저조한 건 순전히 정부 잘못이라구. 국민한테 신용을 잃은 것 아니겠어.“
그들은 얼마 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 대한 토론을 벌이느라 열을 올렸다.
“꼭 정부 책임이랄 수도 없어. 국민이 그렇게 만든거야. 다들 자기 살아갈 궁리만 하니 정분든 별 수 있느냔 말이야.”
“하여튼 이번을 계기로 야당이고 여당이고 간에 바짝 정신 차리지 않으면 곤란해 . 야당끼리 조금만 서로 양보했으면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는건데...”
나는 그들이 정부 비방을 마음 놓고 큰소리로 욕까지 섞어가며 떠드는 것이 이상스러웠다. 그리고 옆과 앞에 앉은 수사관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이 말을 들은 기색도 보이지 않고 태연스레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나레이션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