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고백, 네 번째-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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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고백, 네 번째
“통 못 잤다고? 몇 가지 더 답변할 수 있겠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새벽까지 네가 말한 것은 모두 사실이라고 믿어져. 거짓말을 하지 않아서 고맙구만. 대체적인 흐름은 알겠는데 오늘은 좀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하기로 하지.” 수사관은 꺼칠해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한 번 쓸어내리고는 질문을 던졌다.
“평양으로 급히 복귀하라는 전문을 받은 데서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하지. 같이 훈련받던 김숙희라는 여자와의 광주 생활은 어땠지?”
나는 수사관의 질문에 잠시 과거로 돌아가는 작은 행복에 젖어보았다. 그 시절의 기억은 지금의 나에게는 꿈 가튼 아름다운 추억에 불과했다. 다시는 되돌아 올 수 없는 소중한 시간들이 새삼 아쉬워졌다. 숙희와의 광주 생활을 이야기하며 좋은 동무들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갔다.
“숙희와의 광주 생활은 이미 두 번째였기 때문에 낯설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학 실습을 하기 위해 광주에 갔을 때와는 전혀 다른 생활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중국어 실습을 위해서 그곳 동무들과 많이 사귀고 어울리는 자유와 즐거움이 있었지만 두 번째는 일종의 공작 활동이었기 때문에 행동에 제약이 많았습니다. 아는 동무들과 만날 수도 없었고 오히려 우연히 마주 치더라도 우리 쪽에서 슬며시 피해야할 입장이었습니다. 광주에서 숙희와 내가 투숙한 곳은 지난번에 와서 묶었던 박창해 지도원의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박 지도원은 본부에 소환되어 갔고 다른 지도원이 그 집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인솔한 장 지도원은 우리보다 먼저 남자 공작원을 인솔해 온 박창해 지도원과 같이 호텔에 투숙했습니다. 숙희와 내가 초대소로 쓰는 그 집에서 밥을 해놓으면 지도원들이 와서 식사를 했습니다. 예산이 부족해서 그 많은 인원이 다 외식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 남자 공작원들도 와서 식사를 했나?”
수사관은 잠시 말을 중단시키고 질문을 던졌다.
“아닙니다. 남자 공작원들은 우리들과 만나면 안되기 때문에 그곳에는 지도원들만 와서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 준비는 누가 주로 했지?”
“사실은 번갈아가면서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나는 그 당시 막내 동생 범수 죽은 일, 현옥이 남편 급사한 일 등 여러 가지 집안이로가 어깨 흉터 수술 부작용 등으로 머리도 복잡하고 몸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눈치 빠른 숙희가 알아서 다 해주었습니다. 숙희 혼자 장을 보러 가는 일도 종종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 있으면서 마카오의 정세를 살피며 영주권 발급 시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신경을 썼습니다. 그 가운데도 광동어 학습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숙희는 장 보러 나갔다가 우연히 길에서 옛날에 사귀었던 허애영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허애영은 반가워하면서 내 소식을 묻고 집으로 놀러 오겠다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먼저 연락해서 인사차 만나 보아야 할 중국인 동무들이었지만 비밀 원칙상 그럴 수가 없어 참고 있었던 터라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도 둘이서 점심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장 지도원이 헐레벌떡 뛰어왔습니다. ‘옥화동무, 빨리 서둘러야겠소. 조국에서 옥화 동무만 급히 들어오라는 전보가 왔소.' 북에서 부르던 제 공작원 가명은 김옥화였습니다. 그 말을 알려주면서 장 지도원은 안절부절 하며 서둘렀습니다. 장 지도원과 숙희는 짐 싸는 일을 거들어 주었습니다. 숙희와 나는 짐을 싸면서 마음 속으로 몹시 섭섭해 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부터 우리는 이미 교육이 끝났기 때문에 곧 임무가 부여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작별할 순간이 온 것입니다." 나는 과거를 회상하며 숙희와의 광주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