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고백, 서른 번째-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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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고백, 서른 번째
비행기에서 식사를 마친 뒤 옆 좌석에 앉은 서양여자가 화장실을 가려 하여 자리를 비켜주는 김에 나도 화장실을 다녀왔다.
화장실을 다녀오면서도 비행기 바닥만 보고 걸었지 선반을 올려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자 탑승객들이 대부분 잠이 들었고 비행기 안은 조용해졌다. 간간이 몇 명이 조선말로 근무 조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 듣자하니 소속회사에 불만이 많은 모양이었다. 북에서 들은 대로 로동자들을 착취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비행기는 엔진소리만 요란할 뿐 마치 하늘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미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밖을 내다보아도 밤하늘에 그냥 서 있는 듯이 보였다. 선반 위에 놓인 비닐주머니에 온 신경이 다 가있었으나 올려다보지는 않았다. 마치 위에서 짓누르는 것 같아 고개도 제대로 들 수가 없을 정도로 압박감이 들었다.
가끔 여자승무원이 통로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고 그녀가 우리에게 가까이 올 때마다 혹시 무슨 눈치를 채고 오는 게 아닌 가 겁이 났다. 비행기 문 옆에는 보안요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이따금 한 번씩 승객들을 둘러보았는데 그럴 때마다 그가 우리를 쏘아보는 느낌이 들었다.
‘이 일만 성공한다면 공작원으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누릴 수 있겠지?' ‘출발 전에 최 과장이 이번 과업만 끝나면 김 선생과 나는 비밀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다시 공작원으로 쓸 수 없다고 했으니 그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냐. 아마 비밀 보장을 위해 집으로는 보내지 않을 거야. 다른 남자 공작원과 결혼시켜 초대소에 둘 게 뻔하겠지.' 이 일이 끝난 뒤의 나 자신의 미래를 예측해 보기도 하고 나도 이제 당과 조국과 민족통일을 위해 큰일을 해낸 혁명열사가 된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잠시 진정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뿐 바그다드에서 아부다비까지의 불과 1시간 남짓한 비행시간이 천 년이나 만 년이나 되는 듯이 긴 시간이었다.
드디어 비행기가 곧 아부다비 공항에 착륙할 예정이니 안전벨트를 착용하라는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김 선생과 나는 누가 먼저라고 할 수도 없이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긴박감이 감도는 표정들이었으리라. 안내방송으로 어떤 해방감도 들고, 한편으로는 무서운 종말을 예고하는 것같은 기분도 들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비행기가 덜커덩 소리를 내며 착지하더니 이내 멎었다. 비행기 착지 소리에 가슴도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이제 이곳을 무사히 빠져 나가야 할 텐데.....제발 그때까지만 아무 일 없어야지. 제발....' 비행기 안의 승객들이 모두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고 있어 기내가 매우 혼잡했다. 우리도 혼잡한 틈에 서둘러 일어나 선반 문을 열고 가방을 꺼내 들었다. 폭발물이 들어 있는 비닐봉지가 산더미 보다 더 크게 눈에 들어왔다. 떨리는 손으로 선반 문을 열고 통로에 서서 앞 승객이 빠져 나가기를 기다렸다. 우리 옆 좌석에 앉아 있던 서양 여자도 짐을 들고 우리 뒤에 서 있었다.
‘왜 이렇게 천천히 나가는 거야..' 어서 그 자리를 뜨고 싶은데 통로의 대열은 좀체 줄어들지 않았다. 대부분의 남조선 사람들은 짐을 그대로 둔 채 빈손으로 내렸다. 비행기 문을 나서는 순간에는 누군가가 뒤에서 날 홱 낚아챌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나레이션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