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고백, 서른 세 번째-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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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고백, 서른 세 번째
시내 중심가에서 사들고 온 샌드위치와 과일로 저녁식사를 하면서 우리 임무가 제대로 수행되었는가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종이 울렸다.
나는 깜짝 놀라 먹던 바나나를 손에서 떨어뜨렸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전화종 소리였다. 이처럼 전화종 소리에 자지러지듯 놀란 이유는 우리가 이 호텔에 투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화가 걸려 올 곳이 없었다. 도둑질 하다가 들킨 사람 모양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나는 김 선생을 돌아보았다. 김 선생 역시 내 얼굴을 마주보았다. 나는 도저히 전화를 받을 용기가 나지 않아 주저주저 망설이기만 했다. 김 선생이 눈치를 채고 큰 기침을 한번 하더니 전화를 받았다. 호텔 측에서 우리의 신분을 확인하는 전화였다. 나는 너무 답답한 나머지 전화를 받고 있는 김 선생을 향해
“무슨 전화예요?” 하고 물었다. 전화를 끊은 김 선생이 입을 굳게 다물고 뒷짐을 진 채 방안을 서성거렸다. 무언가 할 일을 잊은 사람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이었다. 전화를 끊은지 5분도 되지 않아 전화종이 또다시 울렸다. 이번 역시 김 선생이 통화를 했는데 일본대사관에서 KAL기가 방콕 도착 전에 실종되었다면서 우리 이름과 생년월일, 여권 번호를 상세히 물어 온 것이었다. 전화를 받고 있던 김 선생은
“잠시 기다리시오” 하더니 내게 여권을 빨리 가져오라고 다급하게 손짓했다. 나는 실내화를 벗어던지고 발 뒤꿈치를 들어 발소리를 죽여 가며 옷장으로 달려가 여권을 꺼내왔다.
전화를 끊은 뒤 좀처럼 긴장할 줄 모르던 김 선생도 표정이 굳어져 한숨만 내쉬었다. 김 선생을 하늘처럼 믿고 따라다니던 나는 그의 표정을 보는 순간 눈앞이 캄캄하고 암담한 심정이었다. 내가 몹시 당황하자 김 선생은,
“아무리 그래도 우리 정체는 쉽게 못 밝혀. 걱정 말어.” 하며 나를 안심시키려 했으나 마음이 놓이기는커녕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어 더욱더 불안에 떨었다. 정말 견디기 어려운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그 무거운 분위기를 깨고 전화종이 또 울렸다. 한국대사관 성원이 호텔 로비에 와 있다며 우리 방을 방문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동안 입을 굳게 다물고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던 김 선생이 지시를 내렸다.
“마유미, 탁자를 대충 치우고 마유미는 자는 척하고 있어.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해.”
김 선생의 지시대로 탁자 위에 음식을 대충 치우고 침대에 누웠다. 얼마나 긴장하고 당황했던지 신을 신은 채 누웠다가 김 선생의 지적을 받고서야 신을 벗었다. 신을 신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할 정도로 내 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벽을 항해 돌아 누웠다. 숨이 막힐것 같은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아무것도 생각하기가 싫었다. 그대로 침대 속으로 푹 꺼져 들어가 아무도 없는 아주 깊은 곳으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다. 금방이라도 계단을 올라오는 한국대사관 성원의 발소리가 ‘쿵쿵' 들리는 것만 같았다. 승강기가 있는 호텔에서 계단을 걸어올 리도 없는데 내 귓전에는 그의 발소리가 큰 거인의 발소리처럼 커다랗게 들려 왔다. 나타날 시간이 되었는데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벌써 올라올 시간이 넘었는데 왜 오지 않을까.' 괜한 조바심마저 났다. 마치 우리를 옴쭉달싹할 수 없게끔 그물이 자꾸 조여져 오는 기분이 들어 가슴이 답답해 왔다. 우리의 정체가 다 드러나 체포하러 오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버럭 겁이 났다.
“똑, 똑, 똑,”
막상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나레이션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