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고백, 열 일곱 번째-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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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고백, 열 일곱 번째
부다페스트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초대소 2층에 짐을 풀고 각자 방을 정했다. 최과장과 최 지도원은 응접실에 침대를 펴 잠자리를 만들었다. 우리는 김 선생이 너무 무리해서 쓰러질까봐 몹시 걱정이 되었다.
“우선 몇 시간이라도 눈을 붙입시다.”
김 선생뿐 아니라 우리 모두 지친 상태였다. 이틀 밤을 새우다시피 비행기 안에서 보냈던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예정대로 2박 3일간을 쉬었으면 처음부터 충전을 시키면서 일을 시작했을텐데 모두 뒤꼬인 항공 스케줄만 원망해댔다. 오전 11시쯤 전 지도원이 돌아왔다.
“이거 미안하게 됐습니다. 예정이 바뀐 줄 모르고 출장을 갔더랬지요.”
그는 우리가 집 찾느라고 고생한 일에 대해서 몇 번이나 사과했다. 곧 최 과장, 최 지도원, 김승일이 전 지도원과 비엔나로 가는 방법에 대해 토론을 벌였고 나는 다른 방에서 전 지도원 부인과 대화를 나누었다. 토론을 끝내고 전 지도원은 항공사로 가서 우리의 오지리 입국 정형과 공항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외출했다. 우리는 주위 환경도 익히고 책방에 가서 공항 자료를 구해 보려고 밖으로 나왔다. 김승일만은 피곤해서 도저히 움직일 수 없다며 집에 남았다. 밖에는 가랑비가 오락가락 하는 스산하고 쌀쌀한 날씨였다.
그날은 토요일이어서 주변에 있는 고기집도 우체국도 모두 문을 닫은 채 휴업이었다. 초대소 근처에서 무궤도 전차를 타고 세 정류장을 가서 내렸다. 그곳은 초대소 부근보다는 약간 번화가여서 책방이 있었으나 살 만한 책이 없었다. 조금 더 멀리 가 볼까 하다가 우리는 길을 잃을 까봐 그냥 초대소로 돌아왔다.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자니 모두들 무료한 모양이었다. 텔레비전을 틀어도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 재미가 없었다.
나는 저녁 준비에 바쁜 전 지도원의 부인을 거들었다. 부인은 음식 솜씨가 좋았다. 특히 사라다 요리가 일품이었다. 어느 부인이나 다 그렇듯이 그녀는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기는 여기 온 지 2년 정도 됐는데 여기는 물건도 마음대로 살 수 있고 풍족해서 좋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이렇게 손님들이 오면 적적하지도 않고 음식을 만들어 대접할 수도 있어 신난다며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녀는 많이 적적했던 모양으로 사람을 귀찮게 여기지 않는다니 우리로서는 다행스런 일이었다. 또 그녀는 자기 집에서 만난 손님 중에 나처럼 젊은 여성은 처음이라며 나이를 물었다.
“스물 둘? 셋? 한창 좋은 나이예요.”
내가 나이를 밝히지 않고 그냥 웃기만 하자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내 나이보다 서너 살 밑으로 보아 주니 좋기는 했지만 꽉 찬 스물여섯 살의 내 나이를 생각하면 서글펐다. 19살에 공작원으로 선발되어 7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을 새삼 돌이켜 보니 시간이 덧없이 흘러간 것 같았다.
외출했던 전 지도원이 돌아와 우리는 자본주의 국가인 오지리로 넘어가는 방법을 의논했으나 결론이 나지를 않았다. 우리가 평양에서 노정을 연구할 때도 가장 골머리를 않던 문제였다. 그때에도 결론을 얻지 못하고 현지에 가서 해결하자며 무작정 떠났던 것이다. 김승일과 내가 만일 헝가리에서 비자를 받고 오지리로 가면 증거가 남기 때문에 비자 없이 어떻게 오지리로 들어가느냐가 숙제로 남았다.
다음 날도 비는 오지 않았지만 잔뜩 흐린 날씨였다. 오전에는 전 지도원은 또 오지리 가는 문제 때문에 외출하고 우리 일행은 시내 구경을 하려고 걸어서 집을 나섰다.
김 선생도 따라 나섰는데 얼마쯤 걷다가 목이 탄다며 찻집에 가자고 하여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셨고, 또 조금 가다가 목이 탄다고 여러 사람을 들볶았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