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28 - 박완서, “그리움을 위하여” - Part 1
박완서 [그리음을 위하여]
올 겨울 추위는 유별나다. 눈도 많이 왔다. 스키캠프 간 손자들한테서 걸려온 전화 목소리가 낭랑하다. 눈다운 눈이 안 올 때는 제설기로 만든 눈으로 스키를 탄다는 걸 알고 부터는 아이들을 스키장에 보내는 걸 마뜩찮아 했는데 오늘은 하늘이 내리는 눈으로 스키도 타고 썰매도 탈 생각을 하니 나도 기분이 좋다. 집 앞에 숲이 있어 바라보는 눈 경치도 기막히다. 그래도 나는 눈이 무섭다. 친정 어머니가 금년 처럼 폭설이 내린 해에 눈에서 미끄러져 엉치뼈가 망가진 후 노인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수술을 여러 번 저텼지만 결국 보행의 자유는 회복하지 못하고 10년 동안이나 집안에 갖혀 지내다가 돌아가셨다. 지금 내 나이가 그 지경을 당하실 때의 어머니의 나이와 같다. 노후에 보행의 자유를 잃는 다는 게 어떤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나는 눈만 오면 미리 집안에 갖혀 지내기로 작정을 하고 있다. 죽는 날 까지 잃고 싶지 않은 가장 소중한 걸 대라면 서슴치 않고 보행의 자유를 대겠다. 어머니 돌아가실 때에도 눈이 많이 왔다. 어머니는 한겨울에 돌아가셨다. 영구차가 공원묘지 언덕길을 오르기가 여간 아슬아슬하지 않았다. 노인들이 춥도 덥도 않을 때 죽기를 소망하는 것도 봄, 가을이라고 죽기가 덜 서럽거나 덜 힘들어서 그렇겠는가. 다 자식들을 생각해서지. 그러나 노인들의 소망과는 달리 혹한이나 혹서가 계속될 때 노인들의 돌연사가 가장 많다고 한다. 지난 여름은 해마다 기온이 상승한다는 지구온난화 현상을 감안하더라도 예년에 없는 찜통더위가 입추, 처서 지나고서 까지 꿇어들 줄 몰랐다. 작년에 그 유난스러운 더위가 이 엄동설한에도 문득문득 생각나며 가슴이 아려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나에게는 옥탑방에 사는 사촌동생이 하나있다. 둘다 환갑, 진갑 다 지나 같이 늙어가는 처지지만 동생은 나보다 여덟살이나 아래다. 볼이 늘 발그레하고 주름살이라곤 없는데 살피듬 까지 좋아서 오십대 초반으로 밖에 안 보인다. 그러나 겨울나기는 많이 힘들어 한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면 무거운 것도 못 들고 걷는 것도 느릿느릿 절룩거린다. 동생말에 의하면 날씨만 추워지면 온몸의 마디가 안 쑤시는 데가 없다고 한다. 동생은 자기의 이런 병을 '웬수 관절이 또 도졌다' 또는 '이놈의 관절만 없다면! '이라며 마치 관절을 몹쓸병 이름처럼 표현한다. 하긴, 집에온 손님들이 시국 얘기를 하면서 IMF를 졸업했나 말았나 설왕설래하는 소리를 듣더니 부엌에서 나한테 '아함프가 어느 대학이름이냐'고 물었으니까. 우리집에 손님으로 와본 사람은 다들 동생을 얹혀사는 군식구인줄 안다. 그러나 동생이 붙박이 식모취급하는 건 싫어서 사촌동생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두었기 때문에 어느틈에 이모님이라고 분명히 해두었다. 동생이 매일 오는 건 아니다. 보통 파출부 처럼 일주일에 두번 요일을 정해놓고 청소와 빨래, 밑반찬 등을 해주고 가지만 손님을 청할 일이 있을 때나 명절 제사같은 때는 수시로 부를수가 있다. 요새 젊은이들을 제자식 백일이나 돌잔치 까지 호텔이나 이름난 요리집에서 하지만, 나는 그 꼴 못 봐준다. 밖에서 점심이라도 한 끼 사야할 일이 있을 때 뿐 아니라, 누가 나의 점심을 사고 싶다고 할 때 까지도 나가기도 귀찮으니 집으로 오라고 부르곤 하는 것도 아마 '그 꼴 못 봐준다'는 강한 의사표시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집에서 밥 한끼 먹이는게 어디 보통일인가. 믿는 구석이 없다면 감히 엄두도 못 낼일이다.
동생은 음식솜씨가 좋다. 구매구매 해놓는 밑반찬은 누가 맛있다고 칭찬만 해주면 아낌없이 덜어줄 수 있을 만큼 넉넉하기도 하다. 그러나 손님들은 그게 다 내 솜씨인 줄 안다. 자식들이 잔손 갈 나이를 벗어날 무렵부터 시작해서 근 삼십년 가까이 이어져 오는 동창계 친구들 조차도 내가 탈 차례가 되면 '니 손맛 좀 보게 너희집에서 하자'고 은근히 압력들을 넣는다. 저희들은 집들이 잔치까지도 집 밖에서 하는 주제에... 우리 동창 또래들은 사는 형편들은 제각각이지만 시대를 잘 탔는지,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그런지, 호텔 뷔페라면 최고의 식사인줄 알고 웬 떡이냐며 마구 식탐을 부리던 때가 언제적이냐 싶게 다들 입맛이 여간 까다로운게 아니다. 죽을 날이 가까울 수록 고향쪽으로 머리라도 두고 싶어 하듯이 맛의 시간여행을 하고 싶은 거였다. 그른 골동품 혀들이 우리집 음식 맛을 최고로 쳐준다. 하다 못해 씀씀하고 물렁한 무나물 같은 하찮은 것까지 저희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 맛을 못 낸다는 거였다. 내가 개성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내 손맛을 그렇게 신비화 시키는 지도 몰랐다. 나는 그런 칭찬이 싫지 않았다. 싫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전통의 맥, 가문의 품격까지 얹어서 평가 받고 있다고 여기고 싶었다. 순전히 칭찬을 듣는 맛에 툭하면 집에서 밥을 먹이고 싶어하는 지도 몰랐다. 촌격스러운 것이란 획일적인 것에 다름아니었다. 그러나 우리 집만의 음식 맛은 김치를 비롯해서 고추장, 된장까지 하나같이 동생의 손맛이지 내 손맛은 아니었다. 나는 뜨끔도 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동생의 손맛을 표절하고 있었다.
동생과 나는 사촌간이지만 한집에서 태어났고 한집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러나 나는 공부 잘하는 아이로 낙인찍힘으로써 집안 일은 조금도 안 거들고 공부만 하다가 시집을 가게되었다. 시집가서는 살림살이에 집착이 많은 시어머님과의 평화공존을 위해 살림살이에서 겉돌다가 남편의 수입이 늘면서 나 대신 시골서 상경한 소녀를 시어머니 조수로 붙여줌으로써 살림이란 걸 배울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말았다. 내가 시집살이 한 오십 년대는 다들 살기가 지금과는 댈 것 아니게 빈궁했고, 도농간의 격차도 더 심해 집에서 한입이라도 덜려고 도시로 식모살이 오는 소녀들이 넘쳐날 때였다. 공부에 별 취미가 없던 동생은 중학교도 낙방을 해 초등학교 졸업에 그쳤다. 숙부에겐 맞딸인 동생은 몸 약한 숙모를 거들어 집안일을 도맡아하고 (not clear) 유부남하고 열렬한 연애를 해서 숙부 내외를 기절초풍하게 놀래키다가 결국은 그 남자를 이혼시키고 정식 부부가 되었다. 각각 딴 집안으로 출가외인이 돼버린 우리는 일년에 한, 두 번 만날까 말까한 사이가 되어 제 각기 자식과 살림을 늘리며 살다가 그 자식들이 혼기가 지나게 되면서 다시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시집살이의 부담이 없어진 대신 부모나 자식의 경조사에 동원할 인력이 필요할 나이가 되면 평소 격조하게 지내던 친척이나 동창이 아쉬워지게 마련이다. 고등학교 때 단짝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긴 통화를 하거나, 더 발전하여 친목계를 만들기도 하고 무리지어 관광길에 나서보기도 하는게 바로 이런 중년의 끝트머리 나이이다. 나하고 동생하고도 그런 나이가 되어 서로 찾을 것도 없이 저절로 가까워진건 동생의 남편이 빚 보증을 잘못 서서 살던 집에서 나앉고 나서 부터였다. 넉넉치 못하다는 건 전서부터 알고 있었지만 노후의 집까지 없어질 줄은 몰랐다. 동생은 남매를 낳을 때 까지 시부모와 큰 동서 및에서 고된 시집살이를 하다가 큰 형이 혼자서 물려받은 시골 땅이 오르는 바람에 겨우 작은 집을 하나 얻어가지고 세간을 날 수가 있었다. 동생의 남편은 착하기만 하고 경제적으로는 무능했기 때문에 동생은 그 집을 유일한 남편 덕으로 알고 여간 대견해 한게 아니였다. 집에 생기고 부터 친정 나들이도 잦아졌고, 별로 큰 집도 아닌데도 방방히 세만 줘도 먹고 사는 건 문제 없다고 친정 부모를 안심시켰다고 한다. 집을 날린 건 다행히 남매를 다 결혼시킨 후 였다. 제대로 가르치치도, 잘해 보내지도 못한 사회 초년생들이라 모셔 갈 만한 여력은 없었지만 그래도 효성들은 지극해서 힘을 모아 마련한 모곗돈으로 만들어준 전셋방이 우리 아파트 단지에서 전철로 두 정거장 밖에 떨어지지 않은 단독주택단지 옥탑방이었다. 나는 이사갈 때 딱 한번 가봤는데 지은지 얼마 안 되는 집이라 옥상으로 통하는 야외 계단만 좀 위태로워 보일 뿐, 널찍하고 깨끗한 방에 주방과 수세식 화장실이 딸려있을 뿐 아니라, 옥상을 온통 마당처럼 쓸 수 있어서 셋방이라는 구차스러운 느낌이 안 들었다. 동생이 그 동네를 택한 건 바로 이웃에 큰 아들 내외가 살고 있어서 였다. 그들은 구멍가게보다 조금 나은 미니슈퍼를 경영하면서 가게에 딸린 어둡고 작은 방에서 살림을 하는데 며느리는 임신중이었다. 장차 아이도 봐주고 아들이 배달나가면 가게도 봐주고 싶어 아들 곁으로 온 거였다. 그러나 친구한테 속아 집까지 들어먹은 충격으로 제부가 몸져 눕게 되고 그 약값이 만만치 않자 동생은 나한테 파출부라도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구차한 소리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