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몰랐던 삼성의 역사 8편 | 이재용의 인생 [브랜드 스토리]
주제 선정 이벤트 로 시작하여 열심히 달려온 브랜드 백과사전 삼성 편
이제 대망의 마지막 편입니다 사실 이번 편은 삼성 브랜드의 관한 이야기
라기보다 이재용 부회장 을 둘러싼 삼성그룹 경영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음악]
1997년 1월 당시 재계 순위 14위 어떤 한보철강 의 보도를 시작으로
여러 크고 작은 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1997년 11월
21일
김영삼 정부는 imf 국제통화기금 의 구제금융을 요청하게 되는데 그래서
이 시기를 imf 외환 6 이라 부릅니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임직원들의 급여를 삭감하고 인력을 감축하는
등 구조조정을 단행했습니다 imf 외환 위기 앞에서 삼성 역시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96년 당시 삼성은 글로벌 제조기업 76 이
를 기록했지만 1년 사이 138위 로 크게 순위가 밀려나게 된 것입니다
삼성그룹 역시 구조조정 위원회와 구조조정본부 를 앞세워 수습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삼성 구조조정 위원회는 수습을 시작한 지 5일 만에 구조적 내용을
담은 경영체제 혁신 방안을 발표했습니다
그 내용은 조직의 30% 감추 총 비용 50% 절감 임직원 급여 10%
삭감 투자규모 30% 감쪽 등이었습니다 실제로 17만 명에 이르던 직원은
11만명 까지 줄었고 65개 에 이르던 계열사를 하나하나 매각하게
시작하여 마흔 다섯 개까지 줄었습니다 이때 삼성중공업 창원 1공장 창원
2공장 을 볼보에 매각해 쓰며 삼성물산에서 만든 대형 마트 홈플러스의
경영권 도 영국 최대 유통 기업인 테스코 에 넘겼습니다
지난 영상에서 언급했듯이 삼성자동차 도 법정관리 신청을 하며 루노 에
매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삼성전자 중심의 제조업과 삼성 생명 중심의 금융업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건이는 해서는 안 되면서 하지 않아도 되는 사업은 포기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고 강조했다고 합니다
한편 삼성그룹의 구조 조정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경영권 승계를 위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음악]
1967년 4월 30일 이건 이와 홍 나이는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14개월 정도 지난 1968년 6월 23일
이들 사이에서 한 사내 아이가 태어납니다 이 아이가 바로 이재용 지금의
삼성전자 부회장이 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가 유년기의 어떻게 지냈는지
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사진도 거의 없지만 동양방송 이사 였던 아버지를 따라
방송국에 가서 찍힌 사진에서 그의 어린시절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후 재용 은 서울 3대 사립초등학교 라 불리는 경기 초등학교와 많은
대기업 자제들이 거쳐간 청혼 중학교와 경복고등학교 를 졸업했습니다 조운과
함께 학교생활을 했던 친구들은 재용이 삼성 가라는 티를 내지 않는 모범생
이었다고 기억합니다
게다가 재용 은 성적도 꽤 좋은 편이었고 중고등학교 때는 반장을 맡기도
했으며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은 생활기록부에 명랑 표 하라며 매사에
적극적인 성격 이라고 기록할 정도였습니다 1987년 내용은 서울대학교
동양상 학과에 입학하게 됩니다
왜 동양사 학과에 들어가냐 에 관해서는 여러 추측이 있는데 뭐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
어쨌든 대학생활 중에도 그는 조용히 학업에만 열중했다 고 전해집니다
한편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의 내용은 승마의 입문 했었는데
1989년에 제 2의 외에 아시아 승마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그정도로 운동신경이 뛰어난 재용 은 1990년 6월에 받은
징병검사 에서 1급 현역 판정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1991년 11월에 재검사를 봤더니 허리디스크로 인해 5급 판정을
받으며 면제를 받게 됩니다
재용 은 승마 국가대표 선수를 하면서 말해서 자주 떨어져서 허리를 다쳤다
고 했는데
91년 당시 ct 장비 가 없던 산부인과 전문 병원인 1 3 병원에서
허리디스크 진단 살을 떼서 제출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안세병원 은 1999년에 척추 전문병원 으로 전환 되었습니다
어쨌든 재용 은 1992년의 대학을 졸업하게 됩니다
한편 졸업 직전인 1991년 12월 재용 은 삼성전자 공채 32기 로
입사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신입사원으로 회사 생활을 하기도 전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이 때문에 재용이 공채로 입사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접목으로 부장으로
입사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암튼 그렇게 일본 게이오대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과정을 지내며 1995년
일본 제조업 산업 공동화 에 대한 고찰 이란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98년 미국 유학 시절에 대상그룹 임창욱 회장의 장녀 임세령
과 만나 결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은 2009년 협의이혼을 했습니다
[음악]
1990년대 중반부터 전세계적으로 인턴의 전하면서 많은 it 벤처
기업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인터넷 4호 관련 주식들이 운영과 떡 쌍을 이어가는데 이를 it
버블이 라고 합니다
그러던 2000년 5월 재 용도 하버드 경영대학원 유학생으로 있던 당시에
이 삼성과 2 삼성 인터네셔널 을 설립하며 인터넷 사업의 진출했습니다
여기에는 재용 에 개인 자산 400억 원이 들어가며 2 삼성 지분 60%
와 2 삼성 인터네셔널 집은 55% 를 확보하며 두 회사의 최대주주가
되었습니다
이 삼성은 많은 벤처 회사에 지주회사 였는데 사실 재용 에 개인 자산으로
출자회사 라고는 하지만 삼성그룹 차원으로 많은 에너지를 쏟아 보았다고
합니다
이 삼성은 인터넷 기업을 무려 14개 나 설립하며 사업을 키워 갔습니다
때문에 이재용의 성공 신화를 만들어 3세 승계 정당성을 높이기 위해 그룹
차원에서 추진하는 사업 이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 무렵부터 it 버블이 붕괴 되며 코스피 역시 떵 낙하 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 삼성과 2 삼성 인터내셔널은 1년 만에 170 6억원의 적자를
기록합니다 그리고 2001년 재용 은 설립 1년 만에 이 삼성을 제일기획
와 삼성 sdi 등 8개 계열사에 200억원 에 매각하면서 정리했습니다
그렇게 재용 에 첫 사업은 완벽하게 실패했습니다
한편 같은 해에 재용 은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이후
회사로 돌아온 그는 삼성전자 경영기획팀 상무보로 승진 하는데
이때부터 거니는 본격적으로 재용이 게 경영 수업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음악]
유학생 신분 이던 1994년부터 1995 년 사이 채용은 아버지
권위로부터 60억 8000만원을 증여 받았습니다
이때 16억원의 증여세가 발생하고 납부하게 되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그가
자발적으로 낸 마지막 중학생입니다 어쨌든 재 웅 은 남은 돈을 분배하여
주식을 매입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비상장 회사였던 s 원의 주식 12만 줄을 23억 원에 매입해 코
이어서 삼성엔지니어링 비상장주식 47 만주를 19억 원의 매입해 씁니다
그런데 그가 비상장 주식을 매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회사는 모두
증권 시장에 상장 되며 주가는 말 그대로 떡 쌍
그가 투자한 42억원 은 단숨에 600 5억원이 되어버렸습니다 무려 5백
63억 원의 차익을 남긴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신은 주식매매 차익에 세금이 없었기 때문에 온전한 수익
이었습니다
1996년 3월 제 흉은 삼성그룹 자회사였던 제일기획의 전환 사체 도
1주당 만원씩 하여 총 29만 9천 주 를 매입해 씁니다
그리고 1998년 3월에 제일기획은 상장 되는데 상장 이후 13일 연속
상한가를 기록하며 주가가 떡 쌍 했습니다
재용 은 23일 째 되는 날 즐기 에게 주식을 모두 매도하여 130억원
의 시세차익을 남겼습니다
한편 1997년 3월 24일 삼성전자는 600억원 규모의 사모 전환사채
를 발행했습니다 사모 전환사채
여기서 전환 사체 란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채권 을 의미합니다
채권을 매수할 기회를 불특정 다수에게 주는 것을 공모 방식 이라고 하며
특정 개인이나 기업에게 매각하는 방식을 3호 방식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삼성전자 사모 전환사채 는 특정 개인이나 기업에게 매각하기 위해
발행된 전환사채의 인 것입니다
이렇게 발행된 600억원 엣지의 사모 전환사채 중 150억 원 어치를
삼성그룹 계열사인 삼성물산이 인수했고 나머지 450억 원 어치를 재 웅
인수하게 됩니다
당시 삼성전자 주가가 5만 5천원 정도 했는데 채용은 그 보다 저렴하게
주당 5만 원 의구심 만주를 매입해 씁니다
그리고 1997년 9월 29일 3호 전환사채를 주식으로 전환 하며 그 때
기준으로 삼성전자의 지분율 0.97% 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1996년 제 흉은 당시 중앙 개발
삼성 에버랜드에 전환 사체 도 매입해 씁니다 중앙 개발의 주식은 장애
시장에서 20만 원을 호가하던 상황이었는데 전환 차트는 고작 7,700원
으로 정해지며 96억 원 치인 125만 사촌 여주가 발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면 무조건 이득인 채권을 삼성 계열사들이 사진에서
포기해버립니다 그리고 중앙 개발의 전환 사체는 재용이 48억 3091
만원어치 서현 부진 윤영 세 자매가 48억 3091 만원 어치를 나눠서
인수했습니다
그리고 재용 은 이를 주식으로 전환하는 데 중앙 개발 지분의 31.9%
를 확보하며 최대주주로 등극했습니다 그리고 1997년의 조항 개발이
삼성에버랜드 로 사명을 변경하게 됩니다
이때 확보한 삼성에버랜드의 지분은 재용이 삼성그룹의 경영권을 확보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1997년 까지만 해도 삼성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은 삼성생명이 하고 있었으나 1998년 12월
에버랜드는 삼성생명의 주식 343 안주를 9천 원이라는 헐값에 매입해
씁니다
그리고 에버랜드가 삼성생명 을 지배하고 삼성생명이 삼성전자를 지배하고
삼성전자가 다시 에버랜드를 지배하는 순환출자 고리
한마디로 에버랜드 만 장악하면 삼성그룹 전체를 장악하는 구조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또한 1999년 채용은 삼성 sds 주식을 취득할 수 있는
신주인수권부사채 를 주당 7,150 원 의 가격으로 20.4% 에
해당하는 47억 원 어치를 사드렸는데 당시 sts 주식은 5만 4천원
정도 했다고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이 재용 26억 세금을 내고 44억 으로 시작하여 삼성전자
전략기획실 상 후보가 되기 전에 마무리한 일입니다
이후 군은 2003년의 삼성전자 상무 2007년에 삼성전자 최고 고객
책임자 겸 전무 2009년에 삼성전자 최고운영책임자 겸 부사장
2010년의 삼성전자 사장 그리고 2012년의 삼성전자 부회장 에 까지
오르게 됩니다
한편 2008년 4월 거니는 삼성 비자금 특검 조사를 통해 차명계좌 와
1000억원 때 의 세금 포탈 혐의 가 적발되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참 100억 원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런데 2009년 12월 31일 이명박 대통령은 건의를 단독 특별사면
복권 하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 됩니다
[음악]
2013년 정부의 금산분리 규제가 강화되면서 그러니까 쉽게 말해 산업
자본과 금융자본을 불리하게 되면서 삼성은 순환출자 고리를 끊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게다가 2014년 05월 건이가 급성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쓰러지게 됩니다
삼성그룹 경영권 의 핵심은 삼성전자의 경영권을 확보하는 데 있었는데
만약에 거니까 소유하고 있던 3% 이상의 삼성전자 지분이 사망으로 인해
자녀들에게 상속될 경우 상속세 만해도 수조 원에 이르는 상황이었습니다
2014년 6월 조용히 최대주주로 있던 삼성에버랜드는 제일모직 으로
사명을 변경했습니다
그리고 재용 은 제일모직의 주식 23.2% 를 가지고 삼성전자의 경영권을
확보하게 됩니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2015년 삼성전자의 지분 4% 이상을
소유하고 있던 삼성물산과 재용이 최대주주로 있는 제일모직의 합병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합병을 앞두고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서로 다른 가치 평가를 받게
됩니다
래미안 아파트 등 삼성그룹의 토목 건설 사업을 담당하며 아주 잘 나가던
삼성물산은 2015년 상반기에 갑자기 영업이익이 급감했고 있는 삼성물산의
주가가 떨어지도록 만들었습니다
물론 정말 매출이 좋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해외에서 2조원 규모의
수주를 따낸 호재를 뒤늦게 공시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한편 제일모직이 소유하고 있던 삼성 에버랜드에 땅값은 2015년에 갑자기
최고 307 10% 까지 오른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렇게 제일모직은 일차적으로 가치가 올라갑니다
한편 제일모직의 자외 4 중에는 2011년에 설립된 바이오 c 의 모회사
일명 쌈바 삼성바이오로직스 가 있었습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는 설립 이유 최소치 19억 에서 1400 7월까지 매년
적자를 내던 기업이 얻습니다
그러던 2015년 갑자기 1조 9천 49억원 의 흑자를 기록하게 됩니다
뭐 기업 이란게 사업이 대박나면 그럴 수 있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흑자를 기록한 이유가 사업 대박이 아니라 회계기준의 변경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제가 이 부분에 대해 전문가가 아닌지라 이 부분에 대해
전문적이고 정확한 설명을 원하시는 분은 오른쪽 상단 링크로 추천영상
걸어두겠습니다 아무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사실 삼성바이오로직스 가 지분의 91% 를 소유한 삼성 바이오 에 피스
라는 자회사가 있었는데 당시 2009 100억 같이 어떤 삼성 바이오 에
피스 는 삼바의 의해 지배력이 행사될 수 있는 종속회사 였읍니다
그런데 2015년에 갑자기 에 피스가 지력은 약해지지 만 어느 정도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관계회사 로 전환됩니다
일반적으로 종속회사에 서강 계사로 전환 되거나 관계 회사에서 종속회사로
전환되는 경우 새롭게 신고를 하고 가치를 재평가 받게 됩니다
때문에 피스는 다시 재평가를 받게 되고 에 피스는 4조 8000억원으로
가치를 평가 받으며 여기서 어마어마한 평가 이익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발생한 에 피스 의 학자는 삼바의 흑자로 더해지고 삼바의 흑자
덕분에 제일모직의 가치가 올라가게 됩니다
문제는 에 피스가 종속회사 에서 관계의 4 로 전환한 이유가 정당한 야
아니 나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해서 현재까지도 분식 회계 관련
재판이 진행 중입니다
어쨌든 이런 상황들을 종합하여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의 합병 비율은 1대
0.35 로 정해지게 됩니다
하지만 무언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제일모직에 가치는 올라가고 삼성물산에
같이 내려가서 합병 비율이 3분의 1 정도가 되자 삼성물산 의 주주들은
합병 조건이 공정하지 않다 며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5년 07월 삼성물산 의 1대 주주 어떤 바로
국민연금이 합병의 찬성하면 서 결국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은 합병 됩니다
이로써 삼성물산 지분이 전혀 없던 재용 은 17% 가 넘는 삼성물산
지분을 소유한 최대주주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덕분에 삼성전자를 비롯한 삼성그룹의 경영권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2016년 의 박근혜 전 대통령과 채 손실의 국정 농단 사태가
터지면서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의 합병의 정치권력이 작용한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리고 박근혜 전 대통령 최순실 에서 개명한 채 소원 운영
표 전 복지부장관 홍안 선정 국민연금관리공단 기금 운영 위원장 등 그와
관련된 많은 이들이 대법원에서 유죄를 확정 받거나 2심 까지 유죄를 받고
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병 차리 세웠던 전경련 에서 삼성을 포함한 재계 총수들이
탈퇴를 선언했고 삼성그룹의 컨트롤타워 였던 미래전략실 도 해체 되었습니다
재용 역시 경영권 승계 관련 뇌물 혐의로 재판이 진행 중입니다
그리고 2020 년 5 월 6 이 재용 은 대국민 사과를 하며 더 이상
경영권 승계 문제로 논란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 며 또한 자신의
아이들에게 회사 경영권을 물려 주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1편을 시작할 때 길 거라 생각은 했지만 팔에 까지 제작 될 지 꿈에도
몰랐던 브랜드 백과사전 삼성 편
워낙 내용이 많다보니 누락된 부분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정리했다 는 점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 브랜드의 까서 전 삼성 편이었습니다
으 5
my rou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