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나날, 스물 일곱 번째-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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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날, 스물 일곱 번째
나는 마리아에게 작별 인사를 해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감사하다고 말하자 마리아는 “천만에, 천만에.” 하며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나는 마리아의 호들갑스러운 행동에 수상한 낌새를 느끼고 그녀를 떠보기 위해 말했다.
“마리아, 제발 나를 남조선에 보내지 않도록 해주세요. 부탁입니다.”
나는 애원해 보았다. 전 같으면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해야 내가 도와줄 수 있지' 할 텐데 오늘은 그냥 측은하게 바라만 보다가 이내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그 모든 것을 나는 곧 어떤 변화가 나에게 일어나리라는 암시로 받아들였다. 똑부러지게 무엇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알 수 없었지만 현 상황과 달라지리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또 최악의 경우에는 남조선으로 보내어지리라는 사실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12월 5일. 이날도 영국인 경찰 간부 테리가 내 방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범한 하루였다. 여자 경찰과 간호사가 내 곁을 지키고 있었고 외부인 방문은 전혀 없었다. 매일 근무자의 교대 시간과 식사 시간으로 하루가 지나갔다는 것을 짐작하며 살았는데 그날 아침에는 하도 답답하여 오늘이 며칠이냐고 간호사에게 물었다.
“오늘은 12월 15일이야.”
처음으로 날짜를 알았다.
“내가 이곳 조사실에 온 지 얼마나 된 거죠?”
찬찬히 날짜를 계산해 볼 만한 여유가 내겐 없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평범하게 쫓기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은 공항에서 쓰러지고 사흘만에 깨어났어. 깨어난 뒤 곧바로 병원에서 이곳으로 옮긴 거야.”
나는 바레인 공항에서 자살을 하려 했던 날로부터 보름이나 지났음을 알았다. 얼른 생각하면 겨우 보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스러울 정도였다. 내 느낌으로는 몇 달이나 지난 것 같은 기나긴 시간으로 여겨졌는데.... 보름동안 바레인 경찰의 끈질긴 심문과 회유작간, 그리고 나 자신과의 싸움으로 내 고초는 나의 20여년 생활과 맞먹을 정도였다. 그런데다가 내 문제가 여기서 끝난 것도 아니었다.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얼마나 험준할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어쩌면 지난 보름은 사건 이후 그나마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더 고통스러운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이런 생각은 참으로 나를 견뎌내기 힘들게 만들었다. 캄캄한 절벽이 나를 기다리는 심정이었다.
저녁 식사로 볶음밥과 국물이 나왔다. 나는 몇 술 뜨는 등 마는 등 숟가락을 놓았다. 밥도 국도 입안에 모래알처럼 굴러다니고 목구멍에서는 넘어가지가 않았다. 숟가락을 놓기가 바쁘게 테리가 왔다. 테리는 내 곁에 앉아 한참동안 아무말 없이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름다워. 너는 틀림없이 아름다운 일본 사람중에 한 사람일 것이다.”
그의 영어는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테리는 이어서 찬찬히 타이르듯 나에게 말했다.
“우린 지금 너를 다른 장소로 옮길 것이다. 당신에 관한 완벽한 심문 자료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 당신이 그곳에 도착하면 어떤 사람이 역시 너를 심문할 것이다. 만약 너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나를 찾아라. 내 이름은 테리이다. 그것을 잊지 말도록.”
그의 표정은 아주 근심스러워 보였고 진지했다. 곁에 있던 여자 경찰과 간호사의 표정도 굳어져 있었다. 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테리의 표정에 나는 지레 겁을 먹었고 마지막 가는 길을 향해 떠나는 심정이 되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