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나날, 스물 여덟 번째-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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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날, 스물 여덟 번째
테리의 표정은 아주 근심스러워 보였고 진지했다. 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그의 표정에 나는 지레 겁을 먹었고 마지막 가는 길을 향해 떠나는 심정이 되었다.
여자 경찰과 간호사가 테리의 지시에 따라 옷을 갈아입혔다. 마리아가 선물로 준 단복을 입히고 신발을 신겼다. 나는 두 사람이 입히고 신기고 하도록 몸을 내 맡긴 채 테리의 소매를 붙들었다.
“Am I supposed to return to here?”
나의 관심을 오로지 한곳에 집중되었다. ‘죽으러 가는 것인가? 남조선에 가는 것인가?' 라고는 차마 묻지 못했다. 테리는 내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럼, 너에 대한 심문이 끝난 뒤에 다시 이곳으로 오도록 해주겠다.”
그의 대답은 힘이 없었다.
여자 경찰과 간호사도 손을 부지런히 놀려 내 옷을 입히면서 눈물을 참느라고 애쓰는 빛이 역력했다. 나는 그녀들의 허리라도 껴안고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길 떠나는 사람의 버릇처럼 무엇을 잊은 듯 방안을 자꾸 둘러보자 간호사가 얼른 뜨개옷을 집어 어깨에 걸쳐 주었다. 내가 병원에서 경찰사무소로 옮긴 뒤 몸이 허약해 추위를 타자 경찰들이 자기들 제복인 국방색 뜨개옷을 내게 주었던 것이다. 옷 갈아 입히는 일이 끝나자 억센 남자 경찰들이 들어와 내 양 팔을 낀 채 끌고 나갔다. 이들이 나를 아득한 낭떠러지로 밀어 넣기 위해 벼랑 끝으로 끌고 가는 착각마저 들었다.
‘엄마! 살려주세요' 목구멍까지 넘어오는 그 말을 나는 꿀꺽 삼켰다. 복도로 끌려 나가 뒤를 돌아보니 그간 정들었던 간호사와 여자 경찰이 눈이 빨개져서 내다보고 있었다. 내가 뒤돌아보자 그들이 손을 흔들었다. 그녀들과 작별의 말도 나누지 못한 채 이끌려 나온 것이 후회가 되었다.
밖은 이미 어두워져 지척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캄캄했다. 사막의 밤은 해가 났을 때의 무더위와는 달리 선뜻할 정도로 시원했다. 오랜만의 바깥 공기는 새롭게 내 몸을 감싸는 느낌이었으나 그것을 만끽할 틈도 없이 대기하던 군용차들이 일제히 시동을 걸었다. 엔진 소리는 나를 삼키려는 야생동물의 포악한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내 팔을 끼고 있던 경찰은 나를 번쩍 안아서 차 뒤로 쓸어넣었다. 차 안에는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검은 제복의 경찰들이 타고 있었다. 내가 차에 태워지자 테리가 출발 신호를 보냈다. 테리는 나와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딴청을 부렸다. 자동차는 시가지를 벗어나 캄캄한 어둠속을 달렸다.
자동차는 3대였다. 나를 태운 차는 가운데 서고 앞 차가 유도하는 대로 어둠속을 헤치고 나갔다. 나는 온 신경을 집중하여 바깥 동정을 알아내려 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당장 눈앞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캄캄할 뿐이었다. 그래도 나는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밖에서 들리는 작은 벌레의 울음소리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긴장했다.
‘이들이 나를 과연 어디로 끌고 가는 것일까. 설마 이대로 처형하려는 건 아니겠지. 차라리 이대로 죽여준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 충직하고 굳센 혁명전사로서, 조국의 자랑스런 딸로서 가야 할 길을 갔다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으련만. 이쯤에서 죽어져야 해.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 나는 나를 믿을 수 없다고 또다시 생각했다. 보름간의 시련은 잘 넘겼지만 그보다 더 본격적이고 구체적인 심문이 시작되고 육체적 고문이 가해지면 과연 그것을 견뎌낼지 의문이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