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고백, 마흔 두 번째-210
눈물의 고백, 마흔 두 번째
여 수사관 1명이 내 바로 곁에 서고 남수사관 2명이 내 뒤 또는 앞으로 나가 호위하며 사람의 물결로 비좁은 명동 길을 걸어 내려갔다.
우리가 맨 처음 들어간 곳은 롯데백화점이었다. ‘롯데' 라는 말이 <베르테르의 슬픔> 이라는 책에 나오는 여주인공의 이름이라는 수사관의 설명을 귓전에 흘리면서 나의 관심은 오로지 한 가지뿐이었다. 그곳에 쌓인 물건들이 과연 외국 제품인지 남조선 제품인지가 관심사였다. 물건의 질이나 모양이나 이름으로 보아도 틀림없이 외국 제품이 분명한데 수사관들은 남조선 제품이라고 우기는 것이다.
“믿지 못하겠으면 직접 아무 코너에나 가서 확인해 봐. 하나 사보기도 하고.”
그들은 만원 짜리 두 장과 천원 짜리 석 장을 나에게 쥐여 주고 내 등을 떠밀며 슬쩍 뒤로 빠졌다. 나는 별로 판매원들 앞에 나서고 싶지 않았지만 궁금증을 참지 못해 용기를 내었다. 마침 화장품 코너가 가까이에 있어 나는 쭈뼛쭈뼛 망설이며 그곳으로 다가갔다.
“어서오세요. 뭘 찾으세요. ?”
너무나도 상냥하고 친절한 판매원의 인사에 나는 벌써 주눅이 들었다.
“그 ...그냥 구경좀 하려고 합니다.”
내 목소리는 어느새 안으로 안으로 기어들었다. 아모레, 쥬리아. 미네르바, 럭키, 브레뉴....눈에 보이는 것마다 외국 이름으로 된 제품이었다. 한쪽에는 영문으로 표기되었고 한쪽에는 조선말로 표기되어 있을 뿐 ‘장미'니 ‘목란' 이니 ‘해당화'니 하는 순수한 조선 상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것은 외제인가요?”
‘드봉' 이라고 쓰여진 로션 한 개를 집어 들고 판매원에게 물었다. 그러자 판매원은 내 아래위를 훑어보고 잠바 차림의 내 모습이 어느 먼 시골 여잔가 하다가 웃으면서,
“어머, 외국에 오래 계시다 오셨나봐. 이건 럭키 제품이에요.” 한다. 나는 ‘럭키가 남조선의 제조회사냐? '고 한번더 묻고 싶었지만 너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까봐 묻지 못했다. 내가 비행기에서 내릴 때 마스크를 하고 있는 모습만 보아서 그런지 그때는 다행히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이거 얼마죠?” 포장이나 병 디자인이 워낙 고급스러워 보여 꽤 고가품일 거라고 생각하며 조심스레 가격을 물어 보았다.
“그건 싸요. 6천 5백원인데요.”
나는 수사관이 나에게 준 돈을 생각해 보았다. 수사관이 준 2만 3천원이 엄청난 돈인 줄 알았는데 화장품 1개에 6천 5백원이라면 그리 대단한 돈도 아니구나 싶었다. 도대체 화폐단위가 북과는 너무 달라서 돈 가치를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우물쭈물 하다가 결국 화장품을 사지 못하고 그냥 물러 나왔다.
“뭘 샀어?”
여수사관이 묻다가 내 빈손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이런 상품들이 한국 제품이라면 왜 모두 외국이름을 붙였습니까?”
나는 궁금하고 의문이 가는 점을 그 당장에 묻고 말았다.
“그건 말이야. 우리 상품을 외국 시장에 내보내려면 그들과도 뜻이 통하는 상표를 붙여야 하기 때문이지.”
나는 언젠가 파리에서 옷을 구입하다가 ‘made in korea' 를 보고 질겁하던 일이 생각났다. 그렇다면 의류뿐 아니라 화장품도 수출을 한단 말인가?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수사관들 앞에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내심 이 많은 상품들이 외제가 아니라는 사실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나레이션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