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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라의 오디오북 (Novella Audio Books), 가을과 산양 이효석 ㅣ한글자막(CC), 한국단편, 소설읽기, 오디오명작, Korean Novel, Korean Audio Book,

가을과 산양 이효석 ㅣ한글자막(CC), 한국단편, 소설읽기, 오디오명작, Korean Novel, Korean Audio Book,

이효석의 가을과 산양

화단 위 해바라기 송이가 칙칙하게 시들었을 젠

벌써 가을이 완연한 듯하다

해바라기를 비웃는 듯 국화가 한창이다

양지쪽으로 날아드는 나비

그림자가 외롭고

풀숲에서 나는 벌레소리가

때를 가리지 않고 물 쏟아지듯 요란하다

아침이나 낮이나 밤이나 그 어느 때를 가릴까

사람의 오장육부를 가리가리 찢으려는 심산인 듯하다

애라에게는 가을같이 두려운시절이 없고

벌레소리같이 무서운 것이 없다

지난 칠년 동안

준보를 알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 어느 가을인들

애라에게 쓸쓸하지 않은 가을이 있었을까

자리에 이불을 쓰고 누우면

눈물이 되로 흘러 베개를 적신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스스로 묻는다

외롭고 적적하고 얄궂은 것

칠년 동안에 얻은 결론이 이것이었다

여러해 동안 적어온 사랑의 일기가 홀로 애태우고 슬퍼한

피투성이의 기록이었다

준보는 언제나 하늘 위에 있는 별이다

만질 수 없고 딸 수 없고

영원히 자기의 것이 아닌 하늘 위 별이다

한 마리의 여우가

딸 수 없는 높은 시렁 위 포도송이를 바라보고

딸 수 없음으로

그 아름다운 포도 를 떫은 것이라고 비난하고 욕질한

옛날 이야기를 생각하며

애라는 몇 번이나 그 여우를 흉내 내서

준보를 미워해 보려고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 보아도 헛일이어서

준보는 날이 갈수록에 더욱 그립고 성스럽고

범하기 어려운 것으로 만 보였다

이 세상은 왜 있으며 자기는 왜 태어났으며

자기와 인연 없는 준보는 왜 나타났을까

준보의 마음과 자기의 마음은 왜 그다지도 어긋나며

준보가 그다지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데도

왜 자기의 마음은 한결같이 그에게로 기울을까

자나깨나 애라에게는 이것이 큰 수수께끼였다

준보가 옥경이와 결혼한다는 발표가 났을 때가

애라에게는 가장 무서운 때였다

친구인 옥경이의 애꿎은 야유였을까

결혼의 청첩은 왜 보내 왔을까

애라에게는 여러 날 동안의 무서운 밤이 닥쳐왔다

자기의 육체를 저주하고

얼굴을 비쳐주는 거울을 깨뜨려버렸다

칠년 동안의 불행을 실어 온다는 거울을 깨뜨려버리고는

어두운 방 안에서

죽음을 생각했다

몸이 덥고 가슴이 답답하고

불 냄새가 흘러오면서

세상이 금방 바서지는 듯했다

그 괴로운 죽음의 환영에서 벗어나는데는

일주일이 넘게 걸렸다

준보를 얼마나 미워하고 옥경이를 얼마나 저주했을까

그런 고패를 겪었건만 그래도 여전히

준보에 대한 미련과 애착이 끊어 지지 않음은 웬일일까

준보는 자기를 위해 태어난 꼭 한 사람일까

전세에서부터 미래까지

자기가 찾는 사람은 단 한 사람

준보라는 지목을 받아 온 것일까

너무도 고전적인 자기의 사랑에 애라는 싫증이 나면서도

한편

여전히 그 사랑에 매어 가는 스스로의 감정을

어쩌는 수 없었다

준보 외에 그의 영혼을 한꺼번에 끌어당길 사람은

다시는 그의 앞에 나타날 성싶지는 않았고

그런 추잡한 생각을 하는 것부터가 싫었다

준보는 무슨 일이 있었던 간에

그에게는영원의 꿈이요 먼 나라이다

준보의 아름다운 환영을 가슴속에 간직한 채

평생을 지내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애라에게는 절망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이 솟아올랐다

일르는 말은 안 듣구 언제까지든지 어쩌자는 심사니

늙어 빠질 때까지

사람이 홀몸으로 지낼 수 있을 줄 아나부다

어머니는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혼인 말을 되풀이하고는

딸의 마음을 야속히 여기고 때때로 보챈다

그러나 애라는 자기 방에 묻힌 채 책을 읽거나

무료해지면 염소를 끌고 풀밭으로 나간다

고요한 마음의 생활을 보내며

준보들의 동정을들으면서

가을을 보내고 가을을 맞이해 왔다

며칠 전 준보에게서 편지를 받고

애라는 가라앉았던 가슴이 다시 설레기 시작하고

마음의 상처가 다시 살아났다

준보 부부가 별안간 음악수업차로 미주로 떠나게 되어

그들의 송별회를 친구들이 발기 한 것이었다

인쇄된 청첩에 준보는 기어이 참석 해 달라는 뜻을

따로 적어서 보냈던 것이다

초문의 소식에 애라는 놀라며

곧 옷을 차리고 나섰다가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머뭇거려도 보았지만

결국 참석하기로 했다

오후의 호텔은 고요하면서도

그 어디인지 인기척을 감추고

수떨스런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손님들의 자태는 그리 보이지 않건만

연회를 준비하는 중인지

직원들이 오락가락하는 모양이 눈에 삼삼거린다

복도를 들어가 바른편 객실을 기웃거렸을 때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인 듯한 사오인이

웅얼거리고들 앉았다

낯설은 속에 어울리기도 겸연해서

애라는 복도를 돌아 왼편 객실로 들어갔다

카운터에서 한 사람의 직원이 계산에 열중하고 있을 뿐

객실은 고요하다

애라는 차 한잔을 주문하고 창가까이 자리를 잡았다

창밖의 조그만 뜰에는

여름 한철 깊은 그늘 속에서 이슬을 뿜고 있었을

몇 포기의 깨끗한 백양나무가

어느덧 가을을 맞이해서

차차 병 들어 가는 잎들이 바람도 없건만

애잔하게 흔들리고 있다

가을은 어느 구석에든지 숨어 드는구나

여기도 밤에는 벌레소리가 얼마나 요란할까

생각하면서 찻잔을들려고 할 때

공교롭게도 문득 눈 앞에 나타난 것이 준보였다

그날 모임의 주빈답게 검은 예복으로 단장한 그의 자태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신선하게 눈을 끌었다

그렇게 가깝게 면대하기는 오랫 만이었다

언제든지 그의 앞이 어렵고 스스럽고 부끄러운 애라였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고개를 숙여 버렸다

진작 만나 뵙고 여러 가지 얘기 드리려던 것이

갑작스레 떠나게 돼서 이제야 기회를 얻었습니다

옥경이의 희망도 있구 해서

별안 간 미주행을 계획한 것인데 한 일년 지내구

내년 가을에는 유럽 으로 건너갈 작정입니다만

준보의 당황한 설명에

애라는 한 참이나 말이 없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러실 줄 알았죠

별일 없으면서두 떠나신다니 섭섭해요

어디를 가시든지 편안하셔야죠

두 분의 행복을 비는 것이 이제는 제 행복이 됐어요

행복이구 불행이구 간에

어쩌는 수없이 그것만이 밟아야 할 길이 된걸요

다음 말까지는 또 한참이나 걸렸다

남의 집 창밖에 서서 안을 기웃거리는

가난한 마음을 짐작하실 수 있으세요

안에는 따뜻한 불이 피고 평화와 단란이 있죠

밖에 서 있는 마음은 춥고 떨리고

준보가 그 대답을 하는데 역시 한참이 걸린다

경우가 어떻게 됐든 간에 그 동안의 애라씨 심정을

나는 감사의 생각 없이는 받을 수 없었습니다

칠년 동안의 변함없는 정성에

값 갈 만한 사내가 아닌 것을요

감사란 말같이 싫은 말은 없어요

제가 요구할 권리가 없듯이 감사 하실 것은 없으세요

감사는 하면서도

요구에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슬퍼합니다

일이 애꿎게 그렇게 되는군요

솔직하게 말하면 처음엔 무심했던 것이

차차 그 곧은 열정을 알게 됐을 때 난 무서워도 졌습니다

그래요 전 남을 무섭게만 구는 허수아빈지두 몰라요

운명이라는 것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슬픈 것 기쁜 것 어쩌는 수없는 운명이라는 것

운명을 생각할 때 진저리가 나구 울음이 나요 거역하구 겨뤄봐두 할 수 없는 것

고지식이 항복할 수밖엔 없는 것

결국 그렇게 돌리구 그렇게 생각할 수밖엔 없겠죠

슬픈 일이긴 하지만

시간이 가까워 오면서

그 객실에까지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게 되었을때

두 사람은 대화를 그쳤으나

이윽 고 다른 방에서 연회가 시작 되었을 때에도

애라에게는 은근히 준보의 모습만이 바라보였다

그의 옆에 앉은 옥경이의 자태까지도

범하기 어려운 하늘 위의 존재로 보임은 웬일이었을까

연회가 끝난 후

여흥으로 부부의 피아노 듀엣 연주가 있었다

건반 앞에 나란히 앉아

가벼운 곡조를 울리는 두 사람의 자태는

그대로 가 바로 곡조에 맞춰 승천하는

한쌍의 천사의 자태이지

속세의 인간의 모습들이 아니었다

그렇듯 아름다운 두 사람의 모양 은

애라와는 너무도 먼 지경에 놓여 있었다

그 거리가 구만리일까 십만리일까

애라는 그날 밤 같이 준보들과의 사이에

큰 거리를 느껴 본 적은 없었다

이것이 준보가 말한 운명이란 것인가

애라는 새삼스레 서러운 생각이 들면서

그날 밤 참석을 후회하며

될 수 있으면 그 자리를 물러나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런 무례를 범할 수도 없어

그 괴로운 운명의 시간을

그대로 참을 수밖에는 없었다

가슴속은 보이지 않는 눈물로 젖었다

괴로운 시간에서 놓여서

사람들과 함께 식당을 나오게 되었을 때

그 다음 괴로움이 준비되어 있었다

옥경이가 긴한 듯이 달려와서 옆에 서는 것이다

이렇게 와 주어서 고맙긴 하지만 한편 미안두 해요

그러나 옥경이의 태도는 자랑에 넘치는 태도였지

미안하다는 태도는 아니었다

애라두 소풍 겸 저리로 떠나 보면어때

좁은 데서 밤낮 속만 태우지말구

조롱인지 충고인지

그러나 애라는 그것을 충고로 듣는 것이 옳을 듯 했다

목적두 없이 가서 뭘하게

그렇게 또렷한 목적 가진 사람이 어디 있겠어

목적을 가졌다고 다이루어지는 것두 아니구

그냥 맘속에 늘 무엇을 생각하고만 있으면

그것이 목적이 아닐까

무얼 생각하게

가령 고향을 생각해도 좋지

외국에 가서 고향을 생각하는 속에 목적은 아니지만

그 무엇이 있을 법 하잖아

어서 무사히 다녀들이나 와요

유럽으로나 떠나 봐요

내년 가을 쯤 파리에서 같이 만나게

애라에게는 옥경이와의 대화가

마냥 괴로운 것이었다

준보들과 작별하고

그 괴로운 분위기를 떠나

한 걸음 먼저 거리로 나왔을 때

지옥을 벗어난 듯도 했지만

한편

거리의 등불이 왜 그리 쓸쓸하게 보이고

오고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왜 그리 무의미하게 보였을까

찻집에 들렀을 때

레코드에서는 베토벤의 운명교향악이 흘렀다

열리지 않는 운명의 철문을 두드리는

답답하고 육중한 음향이

거의 육체를 협박해 오는 지경이었다

운명교향악은 음악이 아니오 운명 그것이다

운명교향악을 작곡한 베토벤은 음악가가 아니오

미치광이나 그렇지 않으면 조물주다

애라는 운명교향곡을 들을 때마다 몸에 소름이 돋고

금방이라도 미칠 듯이 몸이 떨리곤 한다

찻집에서까지 운명교향악을 틀 필요가 뭐야

즐겁게 차 먹으러 오는 곳에

미치광이 음악이 어울리기나 한가

애라는 중얼거리며 주문했던 차도 마시는 둥 만 둥

찻집을 뛰어나와 버렸다

등줄기를 밀치는 듯 등뒤에서

교향악 이 애꿎게 울려오는 것을 들으며

거리를 걷는 애라의 마음속에는

무거운 구름이 겹겹으로 드리웠다

이튿날 역에서 준보 부부를 떠나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애라는

한꺼번에 세상이 허물어진 것 같은 생각이 들며

눈알이 둘러 패일 지경으로어두웠다

두 번째 죽음을 생각하고

약국에서 사온 약병을 밤새도록 노리면서 한 생각을

되하고 또 되풀이 하는 동안

마침내 죽음 역시 쓸데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어차피 짓궂은 운명이라면

그 운명과 겨뤄 보는 것이 어떨까

진 줄은 뻔히 알지만 그 패배의 결론과

다시 대항하는 수도 있지 않은가

즉 두 번째 싸움이다

이번이야말로 사생결단의 무서운 싸움이다

이렇게 깨닫자 애라에게는 절망 속에서도

다시 한 줄기의 빛이 돋아오며

문득 옥경이의 권고가 생각 났다

유럽으로나 떠나 봐요

내년 가을쯤 파리에서 같이 만나게

또렷한 목적 가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냥 마음속에 늘 무엇을 생각하구만 있으면

그것이 목적이 아닐까

옥경이가 무슨 뜻으로 했던지 간에

이제 애라에게는 이것이 한 줄기의 암시였다

애라는 머리 속에 가 보지 못한 외국을 환상하며

책시렁에서 한권의 책을 뽑아 기행문의 구절구절을

마음속에 외어 보는 것이었다

시월을 잡아들면

파리는 벌써 아주 겨울 기분이 돈다

나뭇잎새는 죄다 떨어지고

안개 끼는 날이 점점 늘어가서

그 안개 속을 사람의 그림자가 어렴풋하게

거무스름하게 움직이게 된다

그 사람의 그림자를 마치 자기의 그림자인 듯 상상하고

그 파리의 한 구석에서 준보를 만나게 될 것을생각하면서

기행문의 구절구절을 아끼면서

두 번 읽고 다시 되풀이했다

그날부터 애라에게는 또렷한 구체적 계획도 없으면서

다시 먼 곳을 꿈꾸는 버릇이 시작 되었다

외국의 풍경을 상상하고

준보의 뒷일을 궁금히 여기면서

그러나 사실

하루하루가 더욱 쓸쓸 하고 적막해 갈 뿐이었다

외로운 꿈에서 깨어서는 게같이 방 속에서 나와

뜰에 맨 흰 염소를 데리고 집 앞 풀밭을 거닌다

턱아래 불룩하게 수염을 붙인 흰 염소는

그 용모만으로도

벌써 이 세상에 쓸쓸하게 태어난 나그네다

초점 없는 흐릿한 시선을 풀밭에 던지면서

그 어느 낯설은 나라에서 이 세상에 잘못 온 듯이

쓸쓸하게도 운다

울면서 풀을 먹고 풀에 지치면 종이를 좋아 한다

그 애잔한 자태에 애라는 자기 자신의 모양을 비쳐 보고

운명을 생각하면서 종이를 먹인다

한 권의 잡지면 여러 날을 먹는다

백지를 먹을 뿐 아니라 인쇄된 글자까지를 먹는다

소설을 먹고 시를 먹는다

잡지 대신에 애라는

하루는 묵은 일기장을 뜯어서 먹이기 시작했다

칠년 동안의 사랑의 일기

이제는 쓸모 없는 운명의 일기

그 두터운 일곱 권의 일기장을 모조리 찢어서

염소의 뱃속에 장사지내기 시작 했던 것이다

흰 염소는 애잔한 목소리로 새침 하게 울면서

주인의 운명을

슬픈 역사를

싫어 하지 않고

꾸역꾸역 먹는다

염소 배가 불러지면

주인은 염소를 몰고 풀밭을 떠나 강가로 간다

물을 먹이면서 주인은 흰 돌 위에 서서

물소리 속에 흘러간 지난날을 차례차례로 비추어 본다

해가 꼬박 져서 집으로 돌아오면

다시 게같이

꿈의 보금자리인 방으로 기어든다

방에서는 가을 화단이 하늘같이 맑게

그러나 쓸쓸하게 내다보인다

해바라기 송이가 칙칙하게 시들고 국화가 한창이다

양지쪽으로 날아 드는 나비

그림자가 외롭고 풀숲에서 나는 벌레소리가

때를 가리지 않고 물 쏟아지듯 요란하다

아침이나 낮이나 밤이나 그 어느 때를 가릴까

사람의 오장육부를 가리가리 찢으려는 심사인 듯도 하다

애라에게는 가을같이 두려운 시절이 없고

벌레소리같이 무서운 것이 없다

자리에 이불을 쓰고 누우면

눈물이 되로 흘러

베개를 적시고야 만다

가을과 산양 이효석 ㅣ한글자막(CC), 한국단편, 소설읽기, 오디오명작, Korean Novel, Korean Audio Book, Autumn and the Goat Lee Hyo-seok ㅣ Korean subtitles (CC), Korean short stories, reading novels, audio masterpieces, Korean Novel, Korean Audio Book, L'automne et la chèvre de montagne par Hyo-Seok Lee ㅣ한글막(CC), nouvelle coréenne, roman lu, livre audio, roman coréen, livre audio coréen, Autumn and the Mountain Goat by Hyo-Seok Lee ㅣ한글막(CC), Korean Short Story, Novel Read, AudioBook, Korean Novel, Korean Audio Book,

이효석의 가을과 산양 Hyo-seok Lee's Autumn and the Goat

화단 위 해바라기 송이가 칙칙하게 시들었을 젠 The sunflowers on the flower bed must have faded and withered

벌써 가을이 완연한 듯하다

해바라기를 비웃는 듯 국화가 한창이다

양지쪽으로 날아드는 나비

그림자가 외롭고

풀숲에서 나는 벌레소리가

때를 가리지 않고 물 쏟아지듯 요란하다

아침이나 낮이나 밤이나 그 어느 때를 가릴까

사람의 오장육부를 가리가리 찢으려는 심산인 듯하다

애라에게는 가을같이 두려운시절이 없고

벌레소리같이 무서운 것이 없다

지난 칠년 동안

준보를 알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 어느 가을인들

애라에게 쓸쓸하지 않은 가을이 있었을까

자리에 이불을 쓰고 누우면

눈물이 되로 흘러 베개를 적신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스스로 묻는다

외롭고 적적하고 얄궂은 것

칠년 동안에 얻은 결론이 이것이었다

여러해 동안 적어온 사랑의 일기가 홀로 애태우고 슬퍼한

피투성이의 기록이었다

준보는 언제나 하늘 위에 있는 별이다

만질 수 없고 딸 수 없고

영원히 자기의 것이 아닌 하늘 위 별이다

한 마리의 여우가

딸 수 없는 높은 시렁 위 포도송이를 바라보고

딸 수 없음으로

그 아름다운 포도 를 떫은 것이라고 비난하고 욕질한

옛날 이야기를 생각하며

애라는 몇 번이나 그 여우를 흉내 내서

준보를 미워해 보려고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 보아도 헛일이어서

준보는 날이 갈수록에 더욱 그립고 성스럽고

범하기 어려운 것으로 만 보였다

이 세상은 왜 있으며 자기는 왜 태어났으며

자기와 인연 없는 준보는 왜 나타났을까

준보의 마음과 자기의 마음은 왜 그다지도 어긋나며

준보가 그다지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데도

왜 자기의 마음은 한결같이 그에게로 기울을까

자나깨나 애라에게는 이것이 큰 수수께끼였다

준보가 옥경이와 결혼한다는 발표가 났을 때가

애라에게는 가장 무서운 때였다

친구인 옥경이의 애꿎은 야유였을까

결혼의 청첩은 왜 보내 왔을까

애라에게는 여러 날 동안의 무서운 밤이 닥쳐왔다

자기의 육체를 저주하고

얼굴을 비쳐주는 거울을 깨뜨려버렸다

칠년 동안의 불행을 실어 온다는 거울을 깨뜨려버리고는

어두운 방 안에서

죽음을 생각했다

몸이 덥고 가슴이 답답하고

불 냄새가 흘러오면서

세상이 금방 바서지는 듯했다

그 괴로운 죽음의 환영에서 벗어나는데는

일주일이 넘게 걸렸다

준보를 얼마나 미워하고 옥경이를 얼마나 저주했을까

그런 고패를 겪었건만 그래도 여전히

준보에 대한 미련과 애착이 끊어 지지 않음은 웬일일까

준보는 자기를 위해 태어난 꼭 한 사람일까

전세에서부터 미래까지

자기가 찾는 사람은 단 한 사람

준보라는 지목을 받아 온 것일까

너무도 고전적인 자기의 사랑에 애라는 싫증이 나면서도

한편

여전히 그 사랑에 매어 가는 스스로의 감정을

어쩌는 수 없었다

준보 외에 그의 영혼을 한꺼번에 끌어당길 사람은

다시는 그의 앞에 나타날 성싶지는 않았고

그런 추잡한 생각을 하는 것부터가 싫었다

준보는 무슨 일이 있었던 간에

그에게는영원의 꿈이요 먼 나라이다

준보의 아름다운 환영을 가슴속에 간직한 채

평생을 지내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애라에게는 절망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이 솟아올랐다

일르는 말은 안 듣구 언제까지든지 어쩌자는 심사니

늙어 빠질 때까지

사람이 홀몸으로 지낼 수 있을 줄 아나부다

어머니는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혼인 말을 되풀이하고는

딸의 마음을 야속히 여기고 때때로 보챈다

그러나 애라는 자기 방에 묻힌 채 책을 읽거나

무료해지면 염소를 끌고 풀밭으로 나간다

고요한 마음의 생활을 보내며

준보들의 동정을들으면서

가을을 보내고 가을을 맞이해 왔다

며칠 전 준보에게서 편지를 받고

애라는 가라앉았던 가슴이 다시 설레기 시작하고

마음의 상처가 다시 살아났다

준보 부부가 별안간 음악수업차로 미주로 떠나게 되어

그들의 송별회를 친구들이 발기 한 것이었다

인쇄된 청첩에 준보는 기어이 참석 해 달라는 뜻을

따로 적어서 보냈던 것이다

초문의 소식에 애라는 놀라며

곧 옷을 차리고 나섰다가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머뭇거려도 보았지만

결국 참석하기로 했다

오후의 호텔은 고요하면서도

그 어디인지 인기척을 감추고

수떨스런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손님들의 자태는 그리 보이지 않건만

연회를 준비하는 중인지

직원들이 오락가락하는 모양이 눈에 삼삼거린다

복도를 들어가 바른편 객실을 기웃거렸을 때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인 듯한 사오인이

웅얼거리고들 앉았다

낯설은 속에 어울리기도 겸연해서

애라는 복도를 돌아 왼편 객실로 들어갔다

카운터에서 한 사람의 직원이 계산에 열중하고 있을 뿐

객실은 고요하다

애라는 차 한잔을 주문하고 창가까이 자리를 잡았다

창밖의 조그만 뜰에는

여름 한철 깊은 그늘 속에서 이슬을 뿜고 있었을

몇 포기의 깨끗한 백양나무가

어느덧 가을을 맞이해서

차차 병 들어 가는 잎들이 바람도 없건만

애잔하게 흔들리고 있다

가을은 어느 구석에든지 숨어 드는구나

여기도 밤에는 벌레소리가 얼마나 요란할까

생각하면서 찻잔을들려고 할 때

공교롭게도 문득 눈 앞에 나타난 것이 준보였다

그날 모임의 주빈답게 검은 예복으로 단장한 그의 자태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신선하게 눈을 끌었다

그렇게 가깝게 면대하기는 오랫 만이었다

언제든지 그의 앞이 어렵고 스스럽고 부끄러운 애라였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고개를 숙여 버렸다

진작 만나 뵙고 여러 가지 얘기 드리려던 것이

갑작스레 떠나게 돼서 이제야 기회를 얻었습니다

옥경이의 희망도 있구 해서

별안 간 미주행을 계획한 것인데 한 일년 지내구

내년 가을에는 유럽 으로 건너갈 작정입니다만

준보의 당황한 설명에

애라는 한 참이나 말이 없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러실 줄 알았죠

별일 없으면서두 떠나신다니 섭섭해요

어디를 가시든지 편안하셔야죠

두 분의 행복을 비는 것이 이제는 제 행복이 됐어요

행복이구 불행이구 간에

어쩌는 수없이 그것만이 밟아야 할 길이 된걸요

다음 말까지는 또 한참이나 걸렸다

남의 집 창밖에 서서 안을 기웃거리는

가난한 마음을 짐작하실 수 있으세요

안에는 따뜻한 불이 피고 평화와 단란이 있죠

밖에 서 있는 마음은 춥고 떨리고

준보가 그 대답을 하는데 역시 한참이 걸린다

경우가 어떻게 됐든 간에 그 동안의 애라씨 심정을

나는 감사의 생각 없이는 받을 수 없었습니다

칠년 동안의 변함없는 정성에

값 갈 만한 사내가 아닌 것을요

감사란 말같이 싫은 말은 없어요

제가 요구할 권리가 없듯이 감사 하실 것은 없으세요

감사는 하면서도

요구에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슬퍼합니다

일이 애꿎게 그렇게 되는군요

솔직하게 말하면 처음엔 무심했던 것이

차차 그 곧은 열정을 알게 됐을 때 난 무서워도 졌습니다

그래요 전 남을 무섭게만 구는 허수아빈지두 몰라요

운명이라는 것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슬픈 것 기쁜 것 어쩌는 수없는 운명이라는 것

운명을 생각할 때 진저리가 나구 울음이 나요 거역하구 겨뤄봐두 할 수 없는 것

고지식이 항복할 수밖엔 없는 것

결국 그렇게 돌리구 그렇게 생각할 수밖엔 없겠죠

슬픈 일이긴 하지만

시간이 가까워 오면서

그 객실에까지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게 되었을때

두 사람은 대화를 그쳤으나

이윽 고 다른 방에서 연회가 시작 되었을 때에도

애라에게는 은근히 준보의 모습만이 바라보였다

그의 옆에 앉은 옥경이의 자태까지도

범하기 어려운 하늘 위의 존재로 보임은 웬일이었을까

연회가 끝난 후

여흥으로 부부의 피아노 듀엣 연주가 있었다

건반 앞에 나란히 앉아

가벼운 곡조를 울리는 두 사람의 자태는

그대로 가 바로 곡조에 맞춰 승천하는

한쌍의 천사의 자태이지

속세의 인간의 모습들이 아니었다

그렇듯 아름다운 두 사람의 모양 은

애라와는 너무도 먼 지경에 놓여 있었다

그 거리가 구만리일까 십만리일까

애라는 그날 밤 같이 준보들과의 사이에

큰 거리를 느껴 본 적은 없었다

이것이 준보가 말한 운명이란 것인가

애라는 새삼스레 서러운 생각이 들면서

그날 밤 참석을 후회하며

될 수 있으면 그 자리를 물러나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런 무례를 범할 수도 없어

그 괴로운 운명의 시간을

그대로 참을 수밖에는 없었다

가슴속은 보이지 않는 눈물로 젖었다

괴로운 시간에서 놓여서

사람들과 함께 식당을 나오게 되었을 때

그 다음 괴로움이 준비되어 있었다

옥경이가 긴한 듯이 달려와서 옆에 서는 것이다

이렇게 와 주어서 고맙긴 하지만 한편 미안두 해요

그러나 옥경이의 태도는 자랑에 넘치는 태도였지

미안하다는 태도는 아니었다

애라두 소풍 겸 저리로 떠나 보면어때

좁은 데서 밤낮 속만 태우지말구

조롱인지 충고인지

그러나 애라는 그것을 충고로 듣는 것이 옳을 듯 했다

목적두 없이 가서 뭘하게

그렇게 또렷한 목적 가진 사람이 어디 있겠어

목적을 가졌다고 다이루어지는 것두 아니구

그냥 맘속에 늘 무엇을 생각하고만 있으면

그것이 목적이 아닐까

무얼 생각하게

가령 고향을 생각해도 좋지

외국에 가서 고향을 생각하는 속에 목적은 아니지만

그 무엇이 있을 법 하잖아

어서 무사히 다녀들이나 와요

유럽으로나 떠나 봐요

내년 가을 쯤 파리에서 같이 만나게

애라에게는 옥경이와의 대화가

마냥 괴로운 것이었다

준보들과 작별하고

그 괴로운 분위기를 떠나

한 걸음 먼저 거리로 나왔을 때

지옥을 벗어난 듯도 했지만

한편

거리의 등불이 왜 그리 쓸쓸하게 보이고

오고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왜 그리 무의미하게 보였을까

찻집에 들렀을 때

레코드에서는 베토벤의 운명교향악이 흘렀다

열리지 않는 운명의 철문을 두드리는

답답하고 육중한 음향이

거의 육체를 협박해 오는 지경이었다

운명교향악은 음악이 아니오 운명 그것이다

운명교향악을 작곡한 베토벤은 음악가가 아니오

미치광이나 그렇지 않으면 조물주다

애라는 운명교향곡을 들을 때마다 몸에 소름이 돋고

금방이라도 미칠 듯이 몸이 떨리곤 한다

찻집에서까지 운명교향악을 틀 필요가 뭐야

즐겁게 차 먹으러 오는 곳에

미치광이 음악이 어울리기나 한가

애라는 중얼거리며 주문했던 차도 마시는 둥 만 둥

찻집을 뛰어나와 버렸다

등줄기를 밀치는 듯 등뒤에서

교향악 이 애꿎게 울려오는 것을 들으며

거리를 걷는 애라의 마음속에는

무거운 구름이 겹겹으로 드리웠다

이튿날 역에서 준보 부부를 떠나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애라는

한꺼번에 세상이 허물어진 것 같은 생각이 들며

눈알이 둘러 패일 지경으로어두웠다

두 번째 죽음을 생각하고

약국에서 사온 약병을 밤새도록 노리면서 한 생각을

되하고 또 되풀이 하는 동안

마침내 죽음 역시 쓸데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어차피 짓궂은 운명이라면

그 운명과 겨뤄 보는 것이 어떨까

진 줄은 뻔히 알지만 그 패배의 결론과

다시 대항하는 수도 있지 않은가

즉 두 번째 싸움이다

이번이야말로 사생결단의 무서운 싸움이다

이렇게 깨닫자 애라에게는 절망 속에서도

다시 한 줄기의 빛이 돋아오며

문득 옥경이의 권고가 생각 났다

유럽으로나 떠나 봐요

내년 가을쯤 파리에서 같이 만나게

또렷한 목적 가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냥 마음속에 늘 무엇을 생각하구만 있으면

그것이 목적이 아닐까

옥경이가 무슨 뜻으로 했던지 간에

이제 애라에게는 이것이 한 줄기의 암시였다

애라는 머리 속에 가 보지 못한 외국을 환상하며

책시렁에서 한권의 책을 뽑아 기행문의 구절구절을

마음속에 외어 보는 것이었다

시월을 잡아들면

파리는 벌써 아주 겨울 기분이 돈다

나뭇잎새는 죄다 떨어지고

안개 끼는 날이 점점 늘어가서

그 안개 속을 사람의 그림자가 어렴풋하게

거무스름하게 움직이게 된다

그 사람의 그림자를 마치 자기의 그림자인 듯 상상하고

그 파리의 한 구석에서 준보를 만나게 될 것을생각하면서

기행문의 구절구절을 아끼면서

두 번 읽고 다시 되풀이했다

그날부터 애라에게는 또렷한 구체적 계획도 없으면서

다시 먼 곳을 꿈꾸는 버릇이 시작 되었다

외국의 풍경을 상상하고

준보의 뒷일을 궁금히 여기면서

그러나 사실

하루하루가 더욱 쓸쓸 하고 적막해 갈 뿐이었다

외로운 꿈에서 깨어서는 게같이 방 속에서 나와

뜰에 맨 흰 염소를 데리고 집 앞 풀밭을 거닌다

턱아래 불룩하게 수염을 붙인 흰 염소는

그 용모만으로도

벌써 이 세상에 쓸쓸하게 태어난 나그네다

초점 없는 흐릿한 시선을 풀밭에 던지면서

그 어느 낯설은 나라에서 이 세상에 잘못 온 듯이

쓸쓸하게도 운다

울면서 풀을 먹고 풀에 지치면 종이를 좋아 한다

그 애잔한 자태에 애라는 자기 자신의 모양을 비쳐 보고

운명을 생각하면서 종이를 먹인다

한 권의 잡지면 여러 날을 먹는다

백지를 먹을 뿐 아니라 인쇄된 글자까지를 먹는다

소설을 먹고 시를 먹는다

잡지 대신에 애라는

하루는 묵은 일기장을 뜯어서 먹이기 시작했다

칠년 동안의 사랑의 일기

이제는 쓸모 없는 운명의 일기

그 두터운 일곱 권의 일기장을 모조리 찢어서

염소의 뱃속에 장사지내기 시작 했던 것이다

흰 염소는 애잔한 목소리로 새침 하게 울면서

주인의 운명을

슬픈 역사를

싫어 하지 않고

꾸역꾸역 먹는다

염소 배가 불러지면

주인은 염소를 몰고 풀밭을 떠나 강가로 간다

물을 먹이면서 주인은 흰 돌 위에 서서

물소리 속에 흘러간 지난날을 차례차례로 비추어 본다

해가 꼬박 져서 집으로 돌아오면

다시 게같이

꿈의 보금자리인 방으로 기어든다

방에서는 가을 화단이 하늘같이 맑게

그러나 쓸쓸하게 내다보인다

해바라기 송이가 칙칙하게 시들고 국화가 한창이다

양지쪽으로 날아 드는 나비

그림자가 외롭고 풀숲에서 나는 벌레소리가

때를 가리지 않고 물 쏟아지듯 요란하다

아침이나 낮이나 밤이나 그 어느 때를 가릴까

사람의 오장육부를 가리가리 찢으려는 심사인 듯도 하다

애라에게는 가을같이 두려운 시절이 없고

벌레소리같이 무서운 것이 없다

자리에 이불을 쓰고 누우면

눈물이 되로 흘러

베개를 적시고야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