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나날, 스물 아홉 번째-125
[...]
절망의 나날, 스물 아홉 번째
나는 나를 믿을 수 없다고 또다시 생각했다. 보름간의 시련은 잘 넘겼지만 그보다 더 본격적이고 구체적인 심문이 시작되고 육체적 고문이 가해지면 과연 그것을 견뎌낼지 의문이었다.
‘난 조국을 등진 더러운 배신자가 되기는 싫어. 내가 비밀을 지킨 채 죽어야만 우리 가족이 안전해. 내가 죽고 나면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은 모두 혁명가의 가족으로 최상의 대우를 받게 될거야.' 이런 생각에 잠겨 비장한 각오를 새로이 다지고 있는데 귀에 익은 소리가 멀리서 바람결에 들려왔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틀림없이 비행기 발동 거는 소리였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비행기로 나를 실어가는 곳이라면 가까운 곳은 아니겠지?' 자동차는 철조망 담을 달리다가 오른쪽으로 꺾어들어 멈추었다. 경찰은 나를 끌어 내렸다. 눈앞에 거대한 비행기가 괴물처럼 버티고 있는데 그 비행기를 보는 순간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하였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비행기에는 남조선 려객기 표시인 KAL기 마크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 비행기로 남조선에 끌려간다는 생각을 미처 하기도 전에 KAL기 마크를 보고 그렇게 놀라버렸던 것이다.
아부다비공항에서 KAL 858기에 폭발물을 올려놓고 내린 다음부터는 외국 잡지에서 KAL기 광고를 보기만 해도 질겁하고 덮어버리곤 했었다. KAL기를 보고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난 다음, 내가 그 비행기로 남조선에 인도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바레인 경찰들에게서 조사받는 동안 제일 겁을 내고 걱정하던 현실이 눈앞에 실지 상황으로 나타난 것이다. 설마설마하던 일이 눈앞에 닥쳤을 때 그 참담한 심경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두려움과 슬픔 이전에 나를 속인 핸더슨과 마리아, 그리고 바레인 경찰 간부들에 대한 야속하고 분한 마음에 잠시 두려움과 공포감도 잊어버렸다.
비행기 탑승 계단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조선 특무들이 달려들더니 우악스럽게 내 팔짱을 끼고 동시에 내 입에 무엇인가를 틀어넣고 접착테이프로 봉해 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는 날랜 동작으로 나를 짐짝처럼 비행기로 끌어올렸다. 그들은 날쌔게 움직이면서도 계속 ‘빨리, 빨리' 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해댔다. 그들에게 매어달려 비행기에 끌려 올라가면서 ‘이제는 모든 것이 끝장이구나' 하는 절망에 빠져 눈을 감아 버렸다. 그렇게도 중국인라고 주장하던 내가 ‘빨리, 빨리' 라는 조선 말을 듣는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일어서는 기분이었다. 그 기분은 아주 묘했다. 반가움만도 아니었고 두려움만도 아니었다. 귀에 익숙한 우리의 조선 말이 반가우면서도 반가움을 느끼는 순간에 맞이하는 공포와 절망감이 한꺼번에 뭉쳐진 그런 느낌, 갈 데 없는 조선인이라는 증거일지도 몰랐다.
입 속에 있는 것을 깨물어 보니 플라스틱 제품으로 혀를 깨물어 자해할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자해를 예방하기 우해 이와 혀를 분리시켜 놓는 물건이었다. 나는 내심 놀랐다. 그렇게 철저하던 바래인 경찰에서도 생각지 못했던 것을 준비한 남조선의 주도면밀한 조직에 새삼 두려움도 일었다.
비행기에 올려져 가운데쯤 되는 좌석에 앉혀지고 왼쪽에는 여자가, 오른쪽에는 남자가 내 팔을 껴안다시피 꼭 끼고 앉았다. 나는 꼼짝달싹할 수 없어 눈을 꼭 감고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이제부터는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하자. 그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이겨나가야 한다. 정말 죽지 못한 것이 원통하다.' 아무리 마음을 강하게 먹어도 자꾸 터져 나오는 울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눈물과 콧물로 뒤범벅이 된 얼굴을 누군가가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