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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의 고백 (Kim Hyun-hee's confession), 절망의 나날, 스물 한 번째-117

절망의 나날, 스물 한 번째-117

[...]

절망의 나날, 스물 한 번째

그 일본 여자는 나를 약 올리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수치스럽고 로골적인 질문을 해서 내 분노를 샀다. 결국 옆에 있던 핸더슨이 이제 됐다고 제지한 후에야 그 질문은 끝을 맺었다. 나는 그 일본 여자가 너무 밉살스럽고 괘씸해서 화를 삭일 수가 없었다. 내가 죄지어 심문당하는 입장이 아니라면 따귀라고 한 대 올려붙여야 속이 후련할 것 같은 심정이었다. 분을 참느라 한참을 씩씩대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남조선에 와 시간이 흐른 지금 생각하면 그런 오해는 당연히 가질 수 있는 것이었으며 누가 보아도 그런 점을 한 번쯤은 의심해 볼 만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해외려행 실습의 첫 임무를 받고 떠나면서 담당 과장에게 자본주의 국가에 갔을 때 호텔방을 어떻게 쓰냐고 물었었다. 아무리 공작 임무라지만, 또 아무리 김승일이 나이가 많고 유능한 공작원이라지마 그는 남자였고 나는 여자임에 틀림없었다. 더구나 산전수전 다 겪은 아낙네도 아니고 22살의 과년한 처녀로서는 그것이 큰 걱정이었다.

나는 김승일과 호텔방을 잡을 때 방을 한 개만 잡는다며 꺼린 적이 있었다.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과장은 “방을 두 개씩이나 쓸 돈이 어딨어.” 하고 호통을 치며 오히려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사상이 불순하다는 식이었다. 다 큰 처녀더러 남자와 함께 방을 쓰라는 데에는 더 할 말도 없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그 쪽 형편이 그렇고 사고방식이 그런 데야 어쩔 도리가 있겠는가. 더구나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공작원 신분이니 방법이 없었다. 그저 내 스스로 몸 간수를 잘 하는 길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러한 형편이고 보면 일본 여자가 그처럼 두 사람을 이상한 관계로 보는 것도 지극히 정상적인 생각이었으리라.

공작원 두 사람 이상이 조를 꾸며 임무를 받으면 임무 수행후 복귀하였을 때 그간 임무 수행 과정을 같이 협의하여 총화보고를 올리는 절차가 있다. 또 한편으로는 각자 상대방 공작원이 임무 수행 과정에서 3대 혁명 규률을 제대로 지켰는가, 혁명성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았는가, 사업을 형식주의로 소홀히 하고 자유주의를 하지 않았는가 등을 호상 비판하는 총화도 갖게 되어 있다. 말하자면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조를 묶어 사업을 하게되면 서로 약점을 잡히지 않으려고 행동을 조심하고 몸가짐에 신경을 쓴다. 더구나 조원이 보는 앞에서는 더 열성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척하려고 애쓰는 일도 허다하다. 그런 총화보고 때문에 조금은 김승일과의 관계에 대해서 안심이 되었다.

염려와는 달리 김승일은 해외여행 중 나를 친딸처럼 대해주었을 뿐 이성으로 생각하는 그런 기미는 엿보이지 않았다. 호상 비판하는 총화 보고 때문만은 아님이 확실했다. 그는 몸이 허약해 자기 몸 하나 이끌어 나가기도 힘들어했고 나는 가끔 ‘할아버지' 하며 부를 정도로 그의 나이가 들어있기도 했다. 핸더슨과 일본 여자의 지긋지긋한 심문이 끝나고 나니 조사실 안에는 간호사와 여자 경찰만 남아 조용한 시간이 주어졌다. 심문 당할 때는 어서 그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리지만 막상 한가하고 고요한 정적이 들면 그 시간은 또 불안과 초조에 떤다. 잡념이 많아져 고민은 고민을 낳고 불안은 불안을 만들면서 방정맞은 생각이 꼬리를 문다.

“마유미!”

중국어 통역을 맡았던 홍콩 여자가 구세주처럼 조사실로 들어섰다. 그래도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 주고 뭔가 도움이 될 길을 찾으러 애쓰는 사람은 그 여자 뿐이었다. 그녀는 나를 찾아 올 때는 나의 고통과 슬픔을 위로하는 뜻으로 평소에는 짙게 하던 화장을 지우고 어두운 색의 옷을 입고 나타났다. 그런 세심한 잔신경까지 써주는 그녀가 난 감동스러웠지만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

절망의 나날, 스물 한 번째-117 Tage der Verzweiflung, einundzwanzig - 117 Days of Despair, Twenty-one - 117 絶望の日々、二十一回目-117 Дни отчаяния, двадцать один -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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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날, 스물 한 번째

그 일본 여자는 나를 약 올리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수치스럽고 로골적인 질문을 해서 내 분노를 샀다. 결국 옆에 있던 핸더슨이 이제 됐다고 제지한 후에야 그 질문은 끝을 맺었다. 나는 그 일본 여자가 너무 밉살스럽고 괘씸해서 화를 삭일 수가 없었다. 내가 죄지어 심문당하는 입장이 아니라면 따귀라고 한 대 올려붙여야 속이 후련할 것 같은 심정이었다. 분을 참느라 한참을 씩씩대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남조선에 와 시간이 흐른 지금 생각하면 그런 오해는 당연히 가질 수 있는 것이었으며 누가 보아도 그런 점을 한 번쯤은 의심해 볼 만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해외려행 실습의 첫 임무를 받고 떠나면서 담당 과장에게 자본주의 국가에 갔을 때 호텔방을 어떻게 쓰냐고 물었었다. 아무리 공작 임무라지만, 또 아무리 김승일이 나이가 많고 유능한 공작원이라지마 그는 남자였고 나는 여자임에 틀림없었다. 더구나 산전수전 다 겪은 아낙네도 아니고 22살의 과년한 처녀로서는 그것이 큰 걱정이었다.

나는 김승일과 호텔방을 잡을 때 방을 한 개만 잡는다며 꺼린 적이 있었다.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과장은 “방을 두 개씩이나 쓸 돈이 어딨어.” 하고 호통을 치며 오히려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사상이 불순하다는 식이었다. 다 큰 처녀더러 남자와 함께 방을 쓰라는 데에는 더 할 말도 없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그 쪽 형편이 그렇고 사고방식이 그런 데야 어쩔 도리가 있겠는가. 더구나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공작원 신분이니 방법이 없었다. 그저 내 스스로 몸 간수를 잘 하는 길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러한 형편이고 보면 일본 여자가 그처럼 두 사람을 이상한 관계로 보는 것도 지극히 정상적인 생각이었으리라.

공작원 두 사람 이상이 조를 꾸며 임무를 받으면 임무 수행후 복귀하였을 때 그간 임무 수행 과정을 같이 협의하여 총화보고를 올리는 절차가 있다. 또 한편으로는 각자 상대방 공작원이 임무 수행 과정에서 3대 혁명 규률을 제대로 지켰는가, 혁명성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았는가, 사업을 형식주의로 소홀히 하고 자유주의를 하지 않았는가 등을 호상 비판하는 총화도 갖게 되어 있다. 말하자면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조를 묶어 사업을 하게되면 서로 약점을 잡히지 않으려고 행동을 조심하고 몸가짐에 신경을 쓴다. 더구나 조원이 보는 앞에서는 더 열성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척하려고 애쓰는 일도 허다하다. 그런 총화보고 때문에 조금은 김승일과의 관계에 대해서 안심이 되었다.

염려와는 달리 김승일은 해외여행 중 나를 친딸처럼 대해주었을 뿐 이성으로 생각하는 그런 기미는 엿보이지 않았다. 호상 비판하는 총화 보고 때문만은 아님이 확실했다. 그는 몸이 허약해 자기 몸 하나 이끌어 나가기도 힘들어했고 나는 가끔 ‘할아버지' 하며 부를 정도로 그의 나이가 들어있기도 했다. 핸더슨과 일본 여자의 지긋지긋한 심문이 끝나고 나니 조사실 안에는 간호사와 여자 경찰만 남아 조용한 시간이 주어졌다. 심문 당할 때는 어서 그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리지만 막상 한가하고 고요한 정적이 들면 그 시간은 또 불안과 초조에 떤다. 잡념이 많아져 고민은 고민을 낳고 불안은 불안을 만들면서 방정맞은 생각이 꼬리를 문다.

“마유미!”

중국어 통역을 맡았던 홍콩 여자가 구세주처럼 조사실로 들어섰다. 그래도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 주고 뭔가 도움이 될 길을 찾으러 애쓰는 사람은 그 여자 뿐이었다. 그녀는 나를 찾아 올 때는 나의 고통과 슬픔을 위로하는 뜻으로 평소에는 짙게 하던 화장을 지우고 어두운 색의 옷을 입고 나타났다. 그런 세심한 잔신경까지 써주는 그녀가 난 감동스러웠지만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