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지하 조사실, 스물 아홉 번째-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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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지하 조사실, 스물 아홉 번째
외출에 다녀와서 내가 한 거짓말을 하나하나 꼬집어 이야기 해보자는 수사관의 말을 듣고는 가벼운 마음으로 외출 할 수 없었다. 사실은 내 마음 속에는 서울이 도대체 어떤지에 대해 호기심이 가득했다. 처음 서울에 도착하던 날 남산까지 오며 자동차 속에서 들었던 노래 가사가 생각났다.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렵니다.' 그때도 서울이 정말 아름다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외출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거부감이 들었으나 막상 외출을 하기 위해 새로 사다 준 검정 투피스를 차려 입을 때는 약간 흥분되었다. 새 옷을 입고 첫 등교하는 학생마냥 마음이 들떴다.
바레인에서 15일, 그리고 이곳에 와서 일주일 이상 바깥세상과 단절되어 살았다. 불안과 공포에 떨며 나 자신의 갈등에 사달리다나니 내일 죽을 때 죽더라도 바깥 세상에 나가 햇볕을 쬐며 마음껏 호흡이라도 해보고 싶었다. 말로만 듣던 서울 거리를 나선다는 것이 조금은 가슴 설레었다.
북에서 듣던 대로 서울이 지저분하고, 거지와 몸 파는 여자가 득실대고, 파쇼가 판을 치고, 외국인이 들끓고 하는 모습만 보이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나의 투쟁이 더욱 견결해질 수 있을테니 말이다. 여태까지 나 혼자만의 고독한 투쟁에서도 잘 견뎌 왔다. 그것은 ‘혁명의 한길을 걸으면 끝까지 잘 투쟁하여 우리 민족의 가장 큰 염원인 조국통일의 위업을 기어이 완성하겠다' 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교시의 힘 덕분이었다. 서울 첫 나들이....그것이 나에게 결정적인 함정이 될 줄을 나는 예상하지 못했다. 단 한 번의 서울 외출이 내 굳은 심지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줄이야.
나를 태운 승용차가 서울의 호젓한 산길을 달리고 있을 때 나는 ‘지금 평양에서 초대소를 옮기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졌다. 그만큼 외국여행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처음 남조선 비행기에서 서울에 내릴 때도 그런 느낌을 받았었다. 나는 괜히 외출에 나선 것이 아닌가 후회했다. 북조선과 남조선에 대해 동질감을 느낀다는 것은 지금의 나에게 이로울 것이 없었다.
산 속에 소나무와 잡목들, 화강암 바위들, 그리고 붉은 황토 흙....어느 것 하나 다를 게 없고 새로운 것이 없었다. 어쩌면 이렇게 같은 수가 있을까. 산 뒤로 보이는, 구름이 걸려 있는 푸른 하늘 역시 내가 살다 온 평양의 하늘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시내로 접어들면서 잠깐 동안의 착각은 쉽게 깨어져 버렸다.
자동차의 물결, 이건 정말 말 그대로 물결이었다. 서구사회를 돌아보면서도 이렇게 큰 길을 다 덮어 버릴 만큼 많은 자동차의 행렬은 본 적이 없었다. 입을 다물지 못하고 놀라움에 빠져서 차를 운전하고 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모두 다 외국인이 아닌 조선 사람들이었다. 그때 수사관이 옆에서 거들었다.
“저건 버스, 저기 차 위에 표시가 있는 건 택시, 그리고 저건 자가용. 자가용도 돈 있는 사람들은 운전기사를 고용하지만 대부분은 자기가 직접 운전하고 있어. 저 자동차들은 다 우리가 직접 생산한거야. 요즈음은 거지들도 차를 가지고 다니며 구걸다닌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집집마다 차 한 대씩은 다 있어. 이렇게 되다 보니 이제는 도로와 주차장 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등장했어.”
수사관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탄 차는 도로에 가득한 차들에 밀려 가다가 서고 가다가 서고를 반복 했다. 운전자 중에는 멋진 여자들도 꽤 많이 있어 또 한번 놀랐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