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지하 조사실, 열 두 번째-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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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지하 조사실, 열 두 번째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곳에서는 사탕가루 사용이 지나쳐 당뇨병이 생긴다 하여 가능한 한 먹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탕가루가 남아돈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낯이 뜨거웠는지 모른다.
과자와 음료수를 벌여 놓고 먹으면서 수사관들은 잡담하듯이 여러 가지를 물었다. 주로 가벼운 질문이었다.
“마카오에서 본 영화의 주인공 중 생각나는 사람 없어?” “이소룡.” “신이찌와는 한동안 같은 방을 썼는데 별다른 남녀 관계는 없었어?” “없었다.” “려과 담배는 신이찌가 씹으라고 해서 씹은 거야?” “........” “중국인이며 조선족들도 많이 만나 보았을 텐데 조선욕 좀 아는 게 있어?” “간나.”
그들이 이런 질문을 하면 나는 짧게 대답하곤 했다. 독약이 든 려과 담배에 대한 질문이 나왔을 땐 답변을 할 수 없었다. 혹시 내가 답변을 하지 않으면 좋은 분위기가 깨어질까봐 울먹이며 넘겼다. 조선 욕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얼른 ‘간나'라고 대답했다.
저녁식사 후에는 나에게 다시 백지를 주면서 학력과 경력을 상세히 적어 내라고 한다. 나는 하는 수없이 바레인 경찰들에게 진술했던 내용을 토대로 좀 자세하게 적어 제출하였다. 그들은 별말 없이 내가 적어 준 것을 훑어보았다. 저녁 늦게는 백지에 ‘김일성'이라고 적어 와서 나에게 물었다.
“이 사람 본 적이 있어요?”
내가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다고 말해 주자 중국어로 읽어보라고 한다. 나는 ‘진르청'하고 읽었다. 내가 쉬겠다고 자리에 누워 잠이 아직 들지 않은 채 눈을 감고 있는데 수사관들끼리 또 수군대기 시작한다.
“저런 고운 애를 정치 도구로 삼다니 김일성은 정말 나쁜놈이야.” “죄는 죄지만 인간은 불쌍하다.” “김일성이가 죽일 놈이지, 뭐.”
나는 이 담화 내용을 듣다가 강한 반발심을 느꼈다.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수사관들의 따귀를 한 대씩 올려붙여 주고 싶었다.
‘야이, 간나 새끼들아. 어디다 대고 나쁜 놈, 나쁜 놈 하는 게냐? 감히 우리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 못하는 말이 없구나.' 입술에까지 터져 나온 그 말을 참고 있자니 가슴이 마구 떨렸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절대적인 존재, 민족의 태양과 같으신 분으로 배우며 믿어 왔고 그를 부를 때는 항상 많은 수식어를 붙여 불러 왔던 분의 이름을 수식어 없이 함부로 불러대다니, 불경스러운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술 더 떠서 ‘나쁜 놈, 죽일 놈'이라고 하니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너무 놀라고 분대로 못해서 가슴이 쿵쿵 뛰었다. 만일 내가 당 중앙의 중대한 비밀을 고수해야 하는 책임이 없다면 그때 나는 무슨 일을 저지르고 말았으리라. 내 위장 신분이나 정체가 탄로나는 것 따위의 사소한 일은 안중에도 없을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단지 남조선 려객기 칼기 폭파에 관한 크나큰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간신히 참았다. 그 수사관들과는 다음 날부터 쳐다보기도 싫었고 묻는 말에 대답도 하기 싫었다.
잠을 청했으니 흥분한 탓인지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았다. 짤막한 조사였지만 낮에 있었던 질문이 심문의 시작인 듯했다. 그날이 남조선에 끌려온 지 사흘째 되던 12월 17일이었다.
내일부터는 내가 적어 준 학력과 경력을 가지고 더 세부적으로 묻고 고아대고 사람을 들볶으면서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할 모양이었다. 나는 잠들지 못한 채 몸을 뒤척이며 이런 대책 저런 대책을 궁리해 보았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