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고백, 첫 번째-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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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고백, 첫 번째
수사관은 내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당부하는 듯한 충고의 말을 잊지 않았다. 나는 그가 하는 말의 뜻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동안 내가 너무 많은 말로 그들을 속여 왔기 때문에 신용을 잃었지만 조선말을 시작한 이제부터는 나를 믿어주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고마운 일이었다.
“나 역시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내 의사를 밝히며 수사관의 충고에 동의했다. 나의 이야기는 출생과 성정 과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저는 함경남도 풍산이 고향인 아버지와 개성이 고향인 어머니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누구 앞에서나, 어느 장소에서나 ‘함경도 풍산이 고향입니다' 하고 자신 있게 말했지만 어머니는 고향 이야기가 나오면 쭈뼜거리다가 개성이라고 대답하곤 했더랬습니다. 북에서는 함경도 출신을 가장 성분 좋은 출신으로 인정하고 개성 출신은 성분이 가장 불순하다고 말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개성이 해방전쟁 전까지는 남조선이었기 때문에 지주사상과 반동사상에 물든 인민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아버지는 처가 덕을 못 보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평양시 대동강 구역 동신동이지만 젖먹이 때 어머니 등에 업혀 꾸바에 가서 세상살이를 시작했습니다. 외교부에 복무하던 아버지가 꾸바 대사관으로 조동되었기 때문입니다. 꾸바에서 동생 현옥이와 현수가 태어나 1967년도에 우리 식구는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쿠바에서 걸음마를 시작하고 쿠바에서 말을 배웠습니다. 그때부터도 제 인생은 평범하지가 않을 조짐을 보인게 아닌가 싶습니다.
조국에 돌아오자마자 평양 하신동 유치원에 입학했습니다. 그 후 하신인민학교 4년, 중신 중학교 5년을 거쳐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하여 1년을 다녔습니다. ‘현대는 외국어가 꼭 필요한 세상이다'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1978년도에 평양외국어대학 일본어과에 다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만약 제가 김일성종합대학 생물과에 그냥 다녔더라면 공작원에 소환되지 않았을까 해섭니다. 그렇지만 이 모두가 타고난 운명이였다면 결국 저는 지금처럼 여기에 와 있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대학 2학년 때인 1980년 3월 어느 날 갑자기 저는 로동당 조사부 공작원으로 선발되어 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 정도로 나의 출생과 성장 과정, 학력에 대한 포괄적인 이야기는 끝을 맺었다. 다음은 공작원으로 선발된 경위와 초대소에서 교육받은 내용에 대해 설명할 차례였다. 내 개인 신상 문제를 밝힐 때는 이야기만 들어 주던 수사관이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보충 질문도 던지고 빠뜨린 부분은 보완해 주기도 했다.
수사관은 북조선 사정을 살다 온 사람처럼 너무도 훤히 알고 있었다. 아니 그곳에서 인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보다 더 잘 알았다. 우리 어머니도 내가 어디에 있으며 그곳에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실정이었다. 공작 교육을 받을 때 어찌나 비밀을 강조하는지 휴가를 받아서 집에를 가더라도 일체 공작원 생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중국 광주에 나가 1년 반씩 살다 집에 다니러 갔어도 그것을 알리지 못했다. 차림새나 들고 간 선물을 보고 대충 눈치 채거나 짐작을 하는 정도였다. 또 그러한 사회에서 살다 보니 그들도 묻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 앉아서도 북의 공작원 생활과 훈련 내용을 한눈에 보듯이 훤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이 먼 곳 남조선에서까지도 다 알고 있는 것을 무슨 크나큰 비밀이라고 그렇게 ‘비밀비밀' 하며 겁을 주었는지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