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고백, 스물 아홉 번째-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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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고백, 스물 아홉 번째
임무를 수행할 목표물인 KAL 858기, 이제 우리는 무사히 과업을 끝내고 조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생각만 해도 눈꺼풀이 떨렸다. 나는 남조선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는게 두려워 눈을 감았다.
‘이런 간고한 환경일수록 맡겨진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는데 대하여만 생각해야 해.' 나는 그 일념으로 임무에만 몰두하려고 애썼다. 간혹 김 선생을 홀깃 쳐다보면 그는 태연한 척했지만 입술이 타는지 계속 혀를 내밀어 침을 바르고 다리를 흔드는 버릇으로 자신을 진정시키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김 선생이 화장실을 한 번 다녀왔다. 나도 화장실에 가고 싶었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끌 것이 두려워 그냥 앉아 참았다.
김 선생이 KAL기에 탑승하기 20분 전인 22시 40분쯤 라디오를 꺼내 밧데리를 넣고 방송을 한 번 틀어본 뒤 9시간 후에 폭발하도록 하는 알람 스위치를 중간지점에 맞추고 다시 비닐봉지 속에 넣었다. 나는 그가 라지오를 작동시키는 손놀림을 보며 거의 숨이 멈추는 것 같은 긴박감을 느꼈다.
스위치를 조작하는 김 선생의 손끝은 바르르 떨렸다. 그 스위치 하나가 그 많은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고, 그 큰 충격과 슬픔을 주리라고는 당시에는 상상조차 못했다. 단지 우리가 무사히 과업을 수행함으로써 당과 김일성, 김정일의 신임과 배려에 보답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그의 손이 떨리고 내가 숨소리를 죽인 것은 그저 들키지 않고 임무를 끝내려는 두려움일 뿐 죄책감은 아니었다.
그는 공작 장비품으로 가져온 일제 강심제인 ‘구심'을 꺼내 자신이 먼저 몇 알을 입에 털어 넣고 나에게도 두 알을 주며 먹으라고 한다. 심장 박동소리가 남한테까지 들릴 것 같아 얼른 구심을 삼켰다.
비행기에 탑승하려는 승객들로 대기실 안이 부산해지자 김선생이 “이제 우리도 가지” 하고 나를 재촉했다. 그때 나는 그 자리에 그냥 주저앉은 채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공작원 훈련을 받으면서 통 크게 활동할 수 있는 담력과 배짱을 키웠지만 너무나 큰일이 앞에 닥치니 두려움만 앞섰다. 나는 앞장서 가는 김 선생의 등에 바싹 붙어 거의 발만 보고 따라갔다. 비행기로 가는 버스에 탔을 때는 완전히 남조선 사람들 속에 둘러싸였다. 비행기까지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꽤 긴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았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환한 불빛을 받고 있는 KAL 기의 자태를 바라보니 아주 멋있게 보이는 비행기였다.
비행기 입구에는 남녀 승무원이 서서 조선말로 “어서 오세요. 감사합니다.” 하며 상냥하게 인사를 했다. 우리는 고개만 끄덕 목례를 하고 좌석을 찾는데 여승무원 한명이 와서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우리 옆 좌석에는 다행히도 남조선 사람이 아닌 30대 중반쯤의 서양 여자가 앉았다. 남조선 사람이면 더 곤혹스러울 뻔했는데 다행이었다.
김승일은 좌석 위에 있는 선반에 폭발물이 들어 있는 쇼핑백과 우리의 가방을 올려놓았다. 허약해 보이는 노인이지만 역시 남자는 다른 데가 있었다. 나는 그가 노련한 공작원이라는 실감을 여러번 하면서 그가 존경스러워졌다.
나는 좌석에 앉자마자 안전벨트를 매고 눈을 감아 버렸다. 비행기는 정시에 이륙했다. 남조선 탑승객의 대부분은 근로자들인 모양인데 귀국하는 것이 즐거운지 옆 사람들과 이야기하느라고 기내가 약간 소란스러웠다. 얼마쯤 지나자 음료수와 기내식이 나왔다. 우리 두 사람 다 식사에는 손을 대는 시늉만 했을 뿐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또 먹을 마음도 없었다. 남조선 괴뢰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불쾌한 일이었다. 더구나 조국의 자랑스런 임무를 수행하러 온 혁명전사가 그들의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을 수는 없었다.
식사 후에 옆 좌석 서양여자가 화장실을 가려 하여 자리를 비켜주는 김에 나도 화장실을 다녀왔다. 화장실을 다녀오면서도 비행기 바닥만 보고 걸었지 도무지 선반을 올려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레이션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