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es naudojame slapukus, kad padėtume pagerinti LingQ. Apsilankę avetainėje Jūs sutinkate su mūsų cookie policy.


image

작가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Reading Time podcast), Episode 27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Part 3

Episode 27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Part 3

그때 그는 거의 알지 못했던 이 처녀에 대해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을 느꼈다.그에게는 그녀가 마치 어느 누가 까맣게 콜타르를 칠한 바구니 속에 넣어 강물에 띄워 버린 아기처럼 생각되었다. 그가 이 아기를 자기 침대의 강둑에서 구조하도록 말이다.

그녀는 일주일 동안 그의 곁에 머물렀다. 그리고 다시 건강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프라하에서 2백 킬로미터 떨어진 그녀의 시골도시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이제 내가 바로 앞서 이야기했던 그 순간이 이어진다. 바로 나는 토마스의 삶을 열어줄 열쇠를 본다.토마스는 창가에 서서 안마당 너머 건너편에 있는 거주구획의 담벽을 바라보고 곰곰이 생각한다. 그녀를 영원히 프라하로 데려올 것인가? 그가 그녀를 초청한다면 그녀는 자기의 온 삶을 그에게 바치기 위해 올 것이다. 아니면 그녀애개 자신의 소식을 더 이상 아무것도 전하지 않을 것인가? 이는 테레사가 쓸쓸한 시골도시에서 식당 종업원으로 머물고, 그가 그녀를 다시는 못 보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녀가 그에게 오기를 그는 원하는가? 아니면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가? 그는 안마당 너머 건너편 담벽을 바라보며 대답을 구한다.

계속 그에게는 자기 침대에 누워 있던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그녀가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동안의 기억으로는 어느 누구와ㅏ도 닮지 않았다. 그녀는 연인도 부인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가 까맣게 콜타르 칠을 한 광주리에서 주워올려 자기 침대의 강둑에 내려놓은 아이였다. 그녀는 잠이 들었다. 그는 그녀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열기 있는 그녀의 호흡은 보다 빨라졌다. 그리고 그는 약한 신음소리를 들었다.그는 자기 얼굴을 그녀의 얼굴에 갖다대고 잠들어 있는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속삭였다. 얼마 후 그는 그녀의 숨결이 조용해지는 것을 느꼈다.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얼굴을 그의 얼굴을 향해 치켜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녀의 입술에서 열기의 씁쓸한 냄새를 맡았다. 마치 그녀 육체의 친밀감을 완전히 빨아들이려는 듯 오는 이 냄새를 들이켰다. 그에게는 그녀가 이미 여러 해 동안 그의 곁에 있었고 이제 임종의 자리에 누워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갑자기 그는 그녀가 죽은 뒤 자신이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 곁에 누워 그녀와 함께 죽고싶있다. 그는 얼굴을 그녀 머리 옆 베개에 묻었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이런 자세를 머물렀다. 이제 그는 창가에 서서 바로 그 순간을 생각한다.그것이 이런식으로 그에게 나타났던 사랑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있을가? 하지만 그것이 사랑이었던가? 그녀의 곁에서 죽고 싶었던 느낌은 명백히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그때 그녀를 자기 삶에서 겨우 막 두번째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히스테리가 아니었을까? 자기 마음의 밑바닥에서는 자기가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의식하고도 자신을 속여 이것이 사랑임을 믿도록 하기 시작한 인간의 히스테리 말이다. 이때 그의 잠재의식은 너무도 비겁하여 자기 희극을 위해 근본적으로 자기의 삶에 뛰어들 기회가 전혀 주어져 있지 않은 지방 출신의 이 가련한 식당 종업원을 하필이면 선정했던 것이다!

그는 안마당 너머 더러운 담벼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히스테리인가 아니면 사랑인가를 자기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을 책망했다. 정상적인 남자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즉각 알았을 상황에서 자기는 주저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기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의 의의를 송두리째 빼앗아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책망했다. 그는 이러한 자신과 다투었다. 결국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은 실은 아주 정상적이라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단 하나의 삶이 있기 때문이다.우리는 이것을 이전의 삶과 비교할 수도 없거니와 이후의 삶에서 교정할 수도 없다.

테레사와 사는 것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혼자 있는 것이 나은 것인지? 어떤 결단이 올바른 것인가를 검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비교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체험한다. 최초로, 준비없이 체험한다. 미리 앞서 연습도 해보지 않고 무대에 등장하는 배우와 같다. 하지만 삶을 위한 최초의 시연이 이미 삶 자체라면 삶은 어떤 가치가 있을 수 있는가? 이러한 근거에서 삶은 언제나 스케치와 같다. 스케치 또한 적합한 말이 아니다. 스케치는 언제나 어떤 것에 대한 초안, 어떤 그림의 준비인 데 반해 우리들 인생의 스케치는 무에 대한 스케치로서 그림 없는 초안이기 때문이다.

한 번은 없는 것과 같다라고 토마스는 자신에게 말한다. 여하튼 우리가 단 한 번만 살 수 있다면 그것은 도대체가 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네, 잘 들으셨습니까? 네, 이 부분이 그 소설에서는 상당히 앞부분에 있습니다. 완전히 앞은 아니고요. 앞에 니체의 '영혼재귀사상'에 대한 얘기가 잠깐 나오고요. 두 번째 부분부터 제가 읽기 시작했는데, 우리 삶이 계속 반복된다면 우리는 영원이라는 것에 못박히게 된다는 것이고, 즉 네.. 이 사상이 상당히 무섭다고 얘길하는데요. 이것은 우리가 영원히 사는 삶, 흡혈귀들의 얘기, 이런 것에서 보게되는 것입니다. 그렇게되면 순간의 삶이라는 것이 너무나 무가치해지죠. 영원히 살기때문에 어떤 의미를 생성하지 못하게 되는데요. 여기서 좀더 나아가서 밀란 쿤데라는 파르메니데스 얘기를 하면서요, 가벼움과 무거움의 어떤 이항대립에 대해서 얘기를 합니다. 가벼운 것이 양이고 무거운 것이 음이다라고 말한 파르메니데스 얘기를 전하면서요. 이것이 맞는 얘기냐 틀린 얘기냐 그러면서 뭐 이런 얘기들을 끌어냅니다. 여기서 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실은 에세이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밀란 쿤데라는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죠. 이것은 등장인물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다른 작가들은 아직은 생각해보지 못한 아주 다른 방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뒤에 바로 토마스라는 인물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 소설을 처음 읽는 분들은 이 부분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읽게 되죠. 그런데 이 부분을 다시 읽어보면 대단히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여러해 전 부터 나는 토마스를 생각해왔다. '라고 얘기하는데 여기서 나가 누구냐는 거죠. 나가 누구냐. 소설을 다시 읽을 때는요 이런 시점에 주의하면서 읽으면 상당히 재밌는 발견들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나가 누구냐? 이 발화자가 누구냐? 예을 들면 [마담 보바리]의 그 앞부분도 아주 이상합니다. 그 앞부분에 샤를 보바리가 학교에 나타나는 장명이 있는데요. 마담 보바리의 남편이 되죠. 그런데 이 샤를 보바리를 보고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어요. 샤를 보바리의 모자에 대해서 얘기하는 사람이 있고요. 그런데 그게 누구냐는 거죠. 그 사람은 끝까지 나오지 않습니다. 그 뒤에는 바로 시점이 바귀면서요 소설이 끝날 때 까지 그 시점은 다시 반복되지 않습니다. 그 부분을 주의해서 앞부분을 읽어보면 재미있으실 텐데요. 이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라는 것은 사실은 작가죠. 작가입니다. 작가가 자기 등장인물을 보고 있습니다. '이미 여러해 전부터 나는 토마스는 생각해 왔다. '고 합니다. 여기서 이 토마스는 누구냐 하면, 주인공이죠. 주인공 남자입니다. 주인공에 대해서 생각을 해왔는데, 다음 문장을 보시죠. '그러나 이같은 철학적 숙고의 조명 아래에서야 비로소 나는 그들 명백히 내 앞에 보게되었다.' 즉, 등장인물을 생각하지만 확실하게 구체화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모든 작가들이 그 과정을 거치죠. 등장인물을 생각합니다. 어떤 인물일까? 키가 몇 cm 일까? 그다음에 뭐 뚱뚱할까, 말랐을까 .. 여러가지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밀란 쿤데라의 경우에는 이런 가벼움과 무거움, 여기 소설 제목에도 연연했을 텐데요. 가벼움, 그리고 영원히 산다는 것, 긔고 어떤 찰나적인 삶과 사랑의 문제, 죽음,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비로소 토마스가 실체를 가지고 자기에게 나타났다는 겁니다. 등장인물이 그야말로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그가 자기 집 창가에 서서 앞바당 넘어 건너편 거주구회의 담벽을 바라보며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하는 것을 나는 본다.' 여기서 '나'는 작가입니다. 작가가 이렇게 자기를 완전히 드러내고 소설의 그 뭐랄까 존재를 현시하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Episode 27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Part 3 Episode 27 - Milan Kundera "The Irresistible Lightness of Being" - Part 3 Episode 27 - Milan Kundera "L'Irrésistible Légèreté de l'Être" - Partie 3

그때 그는 거의 알지 못했던 이 처녀에 대해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을 느꼈다.그에게는 그녀가 마치 어느 누가 까맣게 콜타르를 칠한 바구니 속에 넣어 강물에 띄워 버린 아기처럼 생각되었다. 그가 이 아기를 자기 침대의 강둑에서 구조하도록 말이다.

그녀는 일주일 동안 그의 곁에 머물렀다. 그리고 다시 건강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프라하에서 2백 킬로미터 떨어진 그녀의 시골도시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이제 내가 바로 앞서 이야기했던 그 순간이 이어진다. 바로 나는  토마스의 삶을 열어줄 열쇠를 본다.토마스는 창가에 서서 안마당 너머 건너편에 있는 거주구획의 담벽을 바라보고 곰곰이 생각한다. 그녀를 영원히 프라하로 데려올 것인가? 그가 그녀를 초청한다면 그녀는 자기의 온 삶을 그에게 바치기 위해 올 것이다. 아니면 그녀애개 자신의 소식을 더 이상 아무것도 전하지 않을 것인가? 이는 테레사가 쓸쓸한 시골도시에서 식당 종업원으로 머물고, 그가 그녀를 다시는 못 보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녀가 그에게 오기를 그는 원하는가? 아니면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가? 그는 안마당 너머 건너편 담벽을 바라보며 대답을 구한다.

계속 그에게는 자기 침대에 누워 있던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그녀가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동안의 기억으로는 어느 누구와ㅏ도 닮지 않았다. 그녀는 연인도 부인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가 까맣게 콜타르 칠을 한 광주리에서 주워올려 자기 침대의 강둑에 내려놓은 아이였다. 그녀는 잠이 들었다. 그는 그녀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열기 있는 그녀의 호흡은 보다 빨라졌다. 그리고 그는 약한 신음소리를 들었다.그는 자기 얼굴을 그녀의 얼굴에 갖다대고 잠들어 있는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속삭였다. 얼마 후 그는 그녀의 숨결이 조용해지는 것을 느꼈다.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얼굴을 그의 얼굴을 향해 치켜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녀의 입술에서 열기의 씁쓸한 냄새를 맡았다. 마치 그녀 육체의 친밀감을 완전히 빨아들이려는 듯 오는 이 냄새를 들이켰다. 그에게는 그녀가 이미 여러 해 동안 그의 곁에 있었고 이제 임종의 자리에 누워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갑자기 그는 그녀가 죽은 뒤 자신이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 곁에 누워 그녀와 함께 죽고싶있다. 그는 얼굴을 그녀 머리 옆 베개에 묻었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이런 자세를 머물렀다. 이제 그는 창가에 서서 바로 그 순간을 생각한다.그것이 이런식으로 그에게 나타났던 사랑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있을가? 하지만 그것이 사랑이었던가? 그녀의 곁에서 죽고 싶었던 느낌은 명백히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그때 그녀를 자기 삶에서 겨우 막 두번째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히스테리가 아니었을까? 자기 마음의 밑바닥에서는 자기가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의식하고도 자신을 속여 이것이 사랑임을 믿도록 하기 시작한 인간의 히스테리 말이다. 이때 그의 잠재의식은 너무도 비겁하여 자기 희극을 위해 근본적으로 자기의 삶에 뛰어들 기회가 전혀 주어져 있지 않은 지방 출신의 이 가련한 식당 종업원을 하필이면 선정했던 것이다!

그는 안마당 너머 더러운 담벼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히스테리인가 아니면 사랑인가를 자기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을 책망했다. 정상적인 남자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즉각 알았을 상황에서 자기는 주저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기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의  의의를 송두리째 빼앗아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책망했다. 그는 이러한 자신과 다투었다. 결국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은 실은 아주 정상적이라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단 하나의 삶이 있기 때문이다.우리는 이것을 이전의 삶과 비교할 수도 없거니와 이후의 삶에서 교정할 수도 없다.

테레사와 사는 것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혼자 있는 것이 나은 것인지? 어떤 결단이 올바른 것인가를 검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비교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체험한다. 최초로, 준비없이 체험한다. 미리 앞서 연습도 해보지 않고 무대에 등장하는 배우와 같다. 하지만 삶을 위한 최초의 시연이 이미 삶 자체라면 삶은 어떤 가치가 있을 수 있는가? 이러한 근거에서 삶은 언제나 스케치와 같다. 스케치 또한 적합한 말이 아니다. 스케치는 언제나 어떤 것에 대한 초안, 어떤 그림의 준비인 데 반해 우리들 인생의 스케치는 무에 대한 스케치로서 그림 없는 초안이기 때문이다.

한 번은 없는 것과 같다라고 토마스는 자신에게 말한다. 여하튼 우리가 단 한 번만 살 수 있다면 그것은 도대체가 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네, 잘 들으셨습니까? 네, 이 부분이 그 소설에서는 상당히 앞부분에 있습니다. 완전히 앞은 아니고요. 앞에 니체의 '영혼재귀사상'에 대한 얘기가 잠깐 나오고요. 두 번째 부분부터 제가 읽기 시작했는데, 우리 삶이 계속 반복된다면 우리는 영원이라는 것에 못박히게 된다는 것이고, 즉 네.. 이 사상이 상당히 무섭다고 얘길하는데요. 이것은 우리가 영원히 사는 삶, 흡혈귀들의 얘기, 이런 것에서 보게되는 것입니다. 그렇게되면 순간의 삶이라는 것이 너무나 무가치해지죠. 영원히 살기때문에 어떤 의미를 생성하지 못하게 되는데요. 여기서 좀더 나아가서 밀란 쿤데라는 파르메니데스 얘기를 하면서요, 가벼움과 무거움의 어떤 이항대립에 대해서 얘기를 합니다. 가벼운 것이 양이고 무거운 것이 음이다라고 말한 파르메니데스 얘기를 전하면서요. 이것이 맞는 얘기냐 틀린 얘기냐 그러면서 뭐 이런 얘기들을 끌어냅니다. 여기서 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실은 에세이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밀란 쿤데라는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죠. 이것은 등장인물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다른 작가들은 아직은 생각해보지 못한 아주 다른 방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뒤에 바로 토마스라는 인물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 소설을 처음 읽는 분들은 이 부분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읽게 되죠. 그런데 이 부분을 다시 읽어보면 대단히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여러해 전 부터 나는 토마스를 생각해왔다. '라고 얘기하는데 여기서 나가 누구냐는 거죠. 나가 누구냐. 소설을 다시 읽을 때는요 이런 시점에 주의하면서 읽으면 상당히 재밌는 발견들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나가 누구냐? 이 발화자가 누구냐? 예을 들면 [마담 보바리]의 그 앞부분도 아주 이상합니다. 그 앞부분에 샤를 보바리가 학교에 나타나는 장명이 있는데요. 마담 보바리의 남편이 되죠. 그런데 이 샤를 보바리를 보고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어요. 샤를 보바리의 모자에 대해서 얘기하는 사람이 있고요. 그런데 그게 누구냐는 거죠. 그 사람은 끝까지 나오지 않습니다. 그 뒤에는 바로 시점이 바귀면서요 소설이 끝날 때 까지 그 시점은 다시 반복되지 않습니다. 그 부분을 주의해서 앞부분을 읽어보면 재미있으실 텐데요. 이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라는 것은 사실은 작가죠. 작가입니다. 작가가 자기 등장인물을 보고 있습니다. '이미 여러해 전부터 나는 토마스는 생각해 왔다. '고 합니다. 여기서 이 토마스는 누구냐 하면, 주인공이죠. 주인공 남자입니다. 주인공에 대해서 생각을 해왔는데, 다음 문장을 보시죠. '그러나 이같은 철학적 숙고의 조명 아래에서야 비로소 나는 그들 명백히 내 앞에 보게되었다.' 즉, 등장인물을 생각하지만 확실하게 구체화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모든 작가들이 그 과정을 거치죠. 등장인물을 생각합니다. 어떤  인물일까? 키가 몇 cm 일까? 그다음에 뭐 뚱뚱할까, 말랐을까 .. 여러가지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밀란 쿤데라의 경우에는 이런 가벼움과 무거움, 여기 소설 제목에도 연연했을 텐데요. 가벼움, 그리고 영원히 산다는 것, 긔고 어떤 찰나적인 삶과 사랑의 문제, 죽음,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비로소 토마스가 실체를 가지고 자기에게 나타났다는 겁니다. 등장인물이 그야말로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그가 자기 집 창가에 서서 앞바당 넘어 건너편 거주구회의 담벽을 바라보며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하는 것을 나는 본다.' 여기서 '나'는 작가입니다. 작가가 이렇게 자기를 완전히 드러내고 소설의 그 뭐랄까 존재를 현시하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