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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istory of Samsung, 당신이 몰랐던 삼성의 역사 4편 | 삼성 반도체의 탄생 [브랜드 스토리]

당신이 몰랐던 삼성의 역사 4편 | 삼성 반도체의 탄생 [브랜드 스토리]

지난 영상에 이어 삼성 4편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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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용인자연농원 각종 사업을 하고 있던 병철은 평소에 해외를 자주 다녀오곤 했습니다.

그렇게 해외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그가 꼭 보게 되는 풍경이 있었습니다.

유난히 헐벗은 우리나라의 산지였습니다.

국토의 60% 정도가 산지로 되어 있었지만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가 군수물자와 연료용으로 나무를 다 베어 버려

산림이 많이 훼손된 상태였습니다.

병철은 그 광경을 볼 때마다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삼성의 경영 일선에 물러난 병철은

산을 가꾸어보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1968년

병철의 농원 조성사업은 국토개발의 시범사업으로 선정되며 본격적인 착수에 들어갔습니다.

토질, 강우량, 온습도 등을 검토하여 이곳저곳을 살펴보던 그는

경기도 용인군 포목면에 있던 450만 평 규모의 야산에다가

농원을 세울 계획을 세웠습니다.

문제는 그 야산을 2천 명이 넘는 소유자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꽤 오랜 기간에 걸쳐 설득하며 사들였다고 합니다.

1971년부터

다양한 종의 묘목을 심기 시작했고

나무에 필요한 퇴비 생산을 위해 돼지 600두를 수입해왔습니다.

농원 조성에 필요한 물을 위해서 5만 평 규모의 저수지를 만들어

잉어와 붕어 등 양어를 하는 동시에 낚시터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많은 동물들도 데려와 동물원도 세팅했는데

국내 최초로 사자 사파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1976년 4월 18일

국내 최초 가족놀이동산 용인자연농원이 개장되었습니다.

1985년에는

국내 꽃 축제의 효시라 불리는 장미 축제를 처음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1996년

용인자연농원은 명칭을 변경하여 운영되는데

이곳이 바로 지금의 용인 에버랜드입니다.

2. 삼성중공업 삼성전자를 설립하고 기초를 다진 병철은 어느샌가 또 다른 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제일제당 제일모직 등 경공업 계열의 산업을 해오고 있었지만

일본을 자주 오가며 일본이 세계를 장악하고 있던 중화학 분야

바로 조선업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항상 세계 최대 규모를 외쳤던 병철은 이번에도 세계에서 가장 큰 조선소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1973년 5월

선진 기술의 도입을 위해 일본의 대표적인 조선사 IHI를 찾아갔습니다.

이후 IHI와 삼성이 각각 50%씩 투자하여 합작회사를 설립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조선소를 짓기 위해

경남 통영군 안정리에 150만평의 부지도 확보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 이집트와 시리아가 주축이 된 아랍 연합군과 이스라엘의 전쟁

제4차 중동전쟁이 일어납니다.

이는 전 세계적인 원유 가격 폭등으로 이어지며 세계 경제가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이를 1차 오일쇼크라 부릅니다.

1차 오일쇼크는 전세계 신규 선박의 발주를 몽땅 끊어버렸습니다.

심지어 이미 계약했던 것들도 계약금을 포기하며 취소했습니다.

결국 병철도 통영의 안정리조선소 착공을 연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경남 죽도에는 한창 공사를 진행하다가 오일쇼크로 인해 공사가 중단된 중형조선소,

우진조선이 있었습니다.

이도 저도 못하고 있던 이 조선소를 살리기 위해

박정희 정부와 은행은 삼성에게 인수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그 조선소는 병철이 생각했던 세계 최대 규모가 아니었기 때문에 배경

인수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1977년 4월

정부의 강한 요청으로 인해 삼성은 조선소를 인수하게 됩니다.

그리고 1979년 9월

최대 6만 5천톤의 건조능력을 갖춘 첫 번째 도크가 완공되며 선박건조를 시작했습니다.

이 조선소는 비록 병철이 의도치 않게 떠맡은 조선소였지만

지금은 세계적인 조선소 중 하나가 되는데

이곳이 바로 지금의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입니다.

한편 IHI와 합작으로 진행하려던 조선소 사업 계획이 틀어지면서

기계공업으로 사업을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삼성중공업 창원 1공장, 창원 2공장입니다.

하지만 1997년 imf 외환 위기 당시

창원1공장 창원 2공장은 볼보에 매각되어 현재는 볼보그룹의 소유가 됩니다.

3. 반도체 사업의 시작 1974년

병철의 셋째 아들 건희는 동양방송 TBC의 이사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1973년에 발생한 오일쇼크 이후

한국이 새로운 첨단 산업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시기

건희는 오일쇼크로 인해 한 회사가 파산할 위기에 처했다는 얘기를 듣게 됩니다.

바로 한국반도체라는 회사였습니다.

건희는 우선 '반도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고 합니다.

반도체 산업은 미세한 작업이 요구되며

먼지 한 톨도 용납할 수 없는 아주 깨끗한 환경에서 작업을 해야 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젓가락을 사용하기 때문에 손재주가 뛰어나며

집에서는 신발을 벗고 생활하는 문화를 가졌기 때문에 청결면에서도 강점이 있다고 판단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 병철에게

“아버지, 반도체는 주식회사와 원자력과 함께 인류의 역사를 바꾼 3대 발명품 입니다."

"전자사업을 하려면 반도체 사업도 당연히 해야 합니다." 라며

삼성 그룹이 반도체 산업에 진출하기를 건의했습니다.

당시 반도체 산업은 초기 투자비용이 5조~6조 원이 필요했으며

1개의 반도체 라인을 만드는 데만 해도 1조 원이나 들었습니다.

계속해서 새로운 반도체가 개발되고 있기 때문에

타사보다 조금 더 빠르게 개발하면 초대박이 날 수도 있었지만

타사보다 조금만 늦어도 완전 쪽박이 나는 리스크가 아주 큰 사업이었습니다.

그래서 병철은 아직 반도체 산업에 진출하기엔 이르다고 판단하여

건희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974년 12월 6일

건희는 자신의 개인 자산 4억 원으로 대뜸 한국반도체 주식 50%를 매입하며

건희는 자신의 개인 자산 4억 원으로 대뜸 한국반도체 주식 50%를 매입하며

한국반도체를 인수해 버렸습니다.

건희는 '반도체라는 씨앗은 결코 남에게 빼앗길 수 없는 종자'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아직 한국반도체의 기술이 부족해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던 겁니다.

비실비실한 상태로 겨우 버티고 있던 한국반도체는

결국 1977년 12월

삼성그룹에 인수되어 삼성반도체 주식회사가 되었다가

1980년 1월

삼성전자에 흡수되어 반도체사업부로 개편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체 설계 기술이 없었던 탓에 반도체사업부는 계속 적자상태를 유지하며

삼성그룹 내에서도 미운 오리로 낙인찍혀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병철은 직접 나서서 반도체 사업부를 살려보기로 결정했습니다.

먼저 병철은 잘 알고 지내던 일본의 한 반도체회사 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후 그 반도체회사 회장은 직원들을 보내 삼성반도체의 부천공장을 방문 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공장을 방문한 이후 어떠한 피드백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머지않아 경쟁상대가 될 업체에게 정보를 주고 싶지 않았을 거라고 추정됩니다.

"아니, 도대체 반도체가 뭐고?! 반도체가 얼마나 중요하길래..."

이날 이후로 병철은 반도체에 대해 파헤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1977년

한국반도체가 삼성그룹의 애물단지 노릇을 하고 있던 무렵이었습니다.

1년 전 위암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던 병철은

급히 건희를 삼성그룹의 후계자로 결정한 것으로 보이는 행동을 취합니다.

일반적으로 재산을 상속할 때 부모가 살던 집은 장남이 물려받는데

병철은 자신이 살고 있던 장충동 본가를 건희에게 넘겨준 것입니다.

그렇게 1979년 2월

건희는 삼성그룹의 부회장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1983년 2월 8일

반도체에 대해 오랜 기간 공부하며 고민해 온 병철은

도쿄에서 한국에 있던 중앙일보 사장 홍진기에게 전화하여

"누가 뭐래도 반도체를 밀고 나가겠다."고 선언했고 이 소식은 중앙일보를 통해 전해지게 됩니다.

이것을 '도쿄선언'이라고 부릅니다.

삼성전자의 첫 번째 반도체 사업 목표는

당시 세계 D램 시장의 주력 제품이던 '64K D램'을 양산하는 것이었습니다.

삼성전자는 설계도면을 마이크론으로부터 들여온 뒤

나머지 모든 공정 프로세스를 독자적인 기술로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1983년 12월 1일

본격적으로 개발에 들어간지 6개월 만에

세계에서 세 번째로 64k D램 개발에 성공하면서 전세계를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4. 2대 회장 이건희 1984년 8월부터

삼성전자는 64k D램을 본격적으로 출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마이크론 등 선진 반도체 회사는 256K D램을 출시했고

삼성을 의식하며 64K D램의 가격을 확 낮춰버렸습니다.

결국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는 수년간 무려 1200억원의 적자를 내게 되었습니다.

병철은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면서 이미 각오했던 일이기에

담담히 다음 개발을 진행다고 합니다.

그렇게 1984년 10월에 256K D램 양산에 성공했으며

1986년 7월에는 1M D램을 설계부터 모든 공정까지 독자기술로 개발하게 됩니다.

이 무렵 병철은 더이상 일을 할 수 있는 건강상태가 아니었습니다.

1976년에 위암수술, 1979년에 뇌수술을 받았던 그는

1986년부터는 집에서 요양하며 손주들을 돌봤다고 하는데

그래서 많은 업무가 건희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1986년은 삼성, 현대, 금성이 4M D램을 공동 개발하기 시작한 해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각 기업이 별도로 개발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반도체는 웨이퍼라는 원판 위에

트랜지스터 다이오드 저항 등의 많은 소자를 쌓아서 만듭니다.

1M D램까지는 웨이퍼에 단층으로 칩을 쌓아서 제작이 가능했지만

4M D램때부터는 반도체 용량이 커지며

단층으로만 쌓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4M D램 개발을 위해서는 2가지 제작 방식중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웨이퍼 표면을 아래로 파고 내려가서 집적도를 높이는 트렌치 공법과

웨이퍼 표면에 새로운 층을 쌓아서 집적도를 높이는 스택 공법.

이 두 가지 공법은 각각의 장단점이 있었습니다.

트렌치 공법은 안전하기는 하지만 밑으로 파낼수록 회로가 보이지 않아서

공정이 까다롭고 경제성이 떨어졌으며

스택 공법은 작업이 쉽고 경제성이 있지만 품질을 확보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건희는 개발 방식의 선택을 위해

전자공학 박사 두 명을 불러 두 공법에 차이에 대해 물었다고 합니다.

"트렌치 공법은 하자가 발생하면 속수무책이지만"

"스택은 아파트처럼 위로 쌓기 때문에 그 속을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트렌치는 검증할 수 없지만 스택은 검증이 가능합니다."

"이 점이 핵심 차이입니다."

이 얘기를 건희에게 전한 이들은 권오현 박사와 진대제 박사였습니다.

참고로 권오현 박사는 2018년 3월부터 2020년 1월까지 삼성전자 회장을 지내고

현재 삼성전자 고문으로 있는 인물이며

진대제 박사는 노무현 정부 당시 제9대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내고

현재 한국블록체인협회 회장을 지내고 있습니다.

어쨌든 건희는 이들의 얘기를 듣고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미국과 일본의 기업들은 스택공법보다 트렌치 공법을 선택했으며

우리나라의 현대전자도 트렌치 공법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건희는 위로 쌓는 방식인 스택 방식을 선택하게 됩니다.

문제가 생기더라도 쉽게 고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해서였습니다.

그렇게 삼성전자는 스택 공법으로 4M D램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1987년 11월 19일

삼성그룹 1대 회장 병철이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1987년 12월 1일

병철의 셋째 아들 건희는 46살의 나이로 삼성그룹의 2대 회장이 됩니다.

건희는 취임식에서 "삼성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입니다."라며 강한 의지를 밝혔습니다.

1988년 2월

1988년 2월

삼성전자는 스택 공법을 이용한 4M D램 개발에 성공하며

반도체 선두업체와의 격차를 상당히 좁힐 수 있었습니다.

1988년 3월 22일

삼성상회가 세워지며 시작된 삼성의 50주년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이날 건희는 이렇게 말합니다.

"본인은 거대한 생명체, 위대한 내일을 약속하는 제2창업을 엄숙히 선언합니다."

이것을 제2 창업 선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건희는 자신의 생각대로 삼성그룹의 사업구조를 재편하기 시작합니다.

연관성이 있었던 가전, 반도체, 휴대폰 계열사 등을 삼성전자로 한데 묶은

통합 삼성전자가 출범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우주산업과 유전공학 등 새로운 사업 진출 의지도 밝혔습니다.

1988년

4M D램을 개발한 삼성전자는 스택 공법으로 결정한 것에 대한 성적표를 받았습니다.

전년 대비 무려 176%나 성장하며 매출액 6천 7백억 원

누적적자를 제한 순 이익이 1600억원에 이를만큼 성장했던 겁니다.

그리고 1990년 8월

세계 선두 업체들과 거의 동시에 16M D램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후발주자였던 삼성이 선두주자들을 따라잡을 수 있었던 이유가

트렌치 공법 대신 스택 공법을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많은 이들이 얘기 합니다.

그렇게 삼성은 안정적으로 체제 변화가 이뤄지고 점점 더 성장해가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던 1993년 6월 7일

건희는 명언을 남깁니다.

브랜드백과사전 삼성 5편에서 계속됩니다.


당신이 몰랐던 삼성의 역사 4편 | 삼성 반도체의 탄생 [브랜드 스토리] 4 Things You Didn't Know About Samsung's History | The Birth of Samsung Semiconductor [Brand Story]

지난 영상에 이어 삼성 4편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Following our last video, we are going to continue with Samsung, episode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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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용인자연농원 1\. Yongin Farmland 각종 사업을 하고 있던 병철은 평소에 해외를 자주 다녀오곤 했습니다. Byung-chul who was doing a variety of business frequently traveled abroad.

그렇게 해외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그가 꼭 보게 되는 풍경이 있었습니다. There was a scenery he couldn't help notice on flights back to Korea.

유난히 헐벗은 우리나라의 산지였습니다. That was the bare mountains.

국토의 60% 정도가 산지로 되어 있었지만 Sixty percent of the lands are mountains.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가 군수물자와 연료용으로 나무를 다 베어 버려 During the WWII, Japanese cut down all the trees for war supplies and fuels.

산림이 많이 훼손된 상태였습니다. As a result, the forests were severely damaged.

병철은 그 광경을 볼 때마다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Byung-chul thought that was very regrettable whenever he saw that scenery.

그러다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삼성의 경영 일선에 물러난 병철은 After the Saccharin Smuggling Incident, he was forced to step down from Samsung's management

산을 가꾸어보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so he decided to start managing forests.

1968년 In 1968,

병철의 농원 조성사업은 국토개발의 시범사업으로 선정되며 본격적인 착수에 들어갔습니다. Byung-chul's forest management business got designated as a pilot project of the national land development policy and started its operation.

토질, 강우량, 온습도 등을 검토하여 이곳저곳을 살펴보던 그는 He went around the country and analyzed soil quality, precipitation, temperature, moisture, and etc.

경기도 용인군 포목면에 있던 450만 평 규모의 야산에다가 and made a plan to create a farmland on a 4500k-pyeong-hill

농원을 세울 계획을 세웠습니다. located in Mokpo-myeon, Yongin-gun, Gyeonggi-do.

문제는 그 야산을 2천 명이 넘는 소유자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The problem is that the ownership of that piece of land was shared by over 2000 people.

그래서 꽤 오랜 기간에 걸쳐 설득하며 사들였다고 합니다. It took a long time for him to convince everyone to sell him the land.

1971년부터 Since 1971,

다양한 종의 묘목을 심기 시작했고 he planted a variety of seedlings

나무에 필요한 퇴비 생산을 위해 돼지 600두를 수입해왔습니다. and imported 600 pigs to produce manures needed to grow trees.

농원 조성에 필요한 물을 위해서 5만 평 규모의 저수지를 만들어 He built a 50k-pyeong-reservoir that could hold enough water needed to operate the forestland

잉어와 붕어 등 양어를 하는 동시에 낚시터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and raised carps in it while allowing fishing.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많은 동물들도 데려와 동물원도 세팅했는데 He also brought a variety of animals from around the world to set up a zoo.

국내 최초로 사자 사파리를 만들었습니다. He made the country's first lion safari.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1976년 4월 18일 With all the preparations, on April 18, 1976,

국내 최초 가족놀이동산 용인자연농원이 개장되었습니다. the country's first family amusement park opened its door at Yongin Farmland.

1985년에는 In 1985,

국내 꽃 축제의 효시라 불리는 장미 축제를 처음 시작했습니다. it hosted the country's first flower festival called Rose Festival.

그러다 1996년 And then in 1996,

용인자연농원은 명칭을 변경하여 운영되는데 Yongin Farmland changed its name

이곳이 바로 지금의 용인 에버랜드입니다. to Everland which is still in use today.

2\. 삼성중공업 2\. Samsung Heavy Industries 삼성전자를 설립하고 기초를 다진 병철은 어느샌가 또 다른 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After establishing Samsung Electronics, Byeong-chul started to turn his attention other business opportunities.

지금까지는 제일제당 제일모직 등 경공업 계열의 산업을 해오고 있었지만 So far, he had been in light industry with Cheil Jedang and Cheil Industries.

일본을 자주 오가며 일본이 세계를 장악하고 있던 중화학 분야 However, he frequented Japan which dominated the world in heavy industry

바로 조선업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and got interested in shipbuilding industry.

항상 세계 최대 규모를 외쳤던 병철은 이번에도 세계에서 가장 큰 조선소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Byeong-chul always wanted the world's largest size and this time he wanted to make the world's largest shipbuilding yard.

그래서 1973년 5월 So in May 1973,

선진 기술의 도입을 위해 일본의 대표적인 조선사 IHI를 찾아갔습니다. He went to IHI, Japan's flagship shipbuilder to learn most developed technology.

이후 IHI와 삼성이 각각 50%씩 투자하여 합작회사를 설립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He reached an agreement with IHI to invest 50% of shares to make a joint company.

세계 최대 규모의 조선소를 짓기 위해 To make the world's largest shipbuilding yard,

경남 통영군 안정리에 150만평의 부지도 확보했습니다. he purchased 1500k-pyeong-land in Anjeong-ri, Tongyeong-gun, Gyeongsangnam-do.

그런데 However, around this time,

그 시기 이집트와 시리아가 주축이 된 아랍 연합군과 이스라엘의 전쟁 the Yom Kippur War broke out between

제4차 중동전쟁이 일어납니다. Israel and the Arab coalition with Egypt and Syria being the main force.

이는 전 세계적인 원유 가격 폭등으로 이어지며 세계 경제가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As a result, the oil price skyrocketed and the world economy fell into chaos.

이를 1차 오일쇼크라 부릅니다. This was the First Oil Shock.

1차 오일쇼크는 전세계 신규 선박의 발주를 몽땅 끊어버렸습니다. Because the First Oil Shock. the world's new orders for ships came to a sudden halt.

심지어 이미 계약했던 것들도 계약금을 포기하며 취소했습니다. The orders that were already contracted also got cancelled with deposits given up.

결국 병철도 통영의 안정리조선소 착공을 연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Byeong-chul couldn't help but to delay the beginning of the construction of the shipbuilding yard at Anjeong-ri.

한편 경남 죽도에는 한창 공사를 진행하다가 오일쇼크로 인해 공사가 중단된 중형조선소, Meanwhile, in Jukdo, Gyeongnam, there was a mid-sized shipbuilding yard of Woojin Shipbuilding,

우진조선이 있었습니다. the construction of which was halted due to the oil shock.

이도 저도 못하고 있던 이 조선소를 살리기 위해 To save this shipbuilding yard left hanging in the air,

박정희 정부와 은행은 삼성에게 인수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President Park Chung-hee and banks requested Samsung to take it over.

하지만 그 조선소는 병철이 생각했던 세계 최대 규모가 아니었기 때문에 배경 However, Byeong-chul didn't want to take it over

인수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because it wasn't the world's largest which was what he wanted.

그런데 1977년 4월 However, in April 1977,

정부의 강한 요청으로 인해 삼성은 조선소를 인수하게 됩니다. Samsumg took it over at the strong request of the government.

그리고 1979년 9월 In September 1979,

최대 6만 5천톤의 건조능력을 갖춘 첫 번째 도크가 완공되며 선박건조를 시작했습니다. the first dock with a capacity of 65k ton was finished and shipbuilding officially began.

이 조선소는 비록 병철이 의도치 않게 떠맡은 조선소였지만 This was a yard that Byeong-chul did not intend to establish in the beginning,

지금은 세계적인 조선소 중 하나가 되는데 but it turned out to be one of the world-class shipbuilding yards.

이곳이 바로 지금의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입니다. This is what is now known as Geoje Shipbuilding Yard.

한편 IHI와 합작으로 진행하려던 조선소 사업 계획이 틀어지면서 Meanwhile, the plan to establish a joint company with IHI fell through

기계공업으로 사업을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and was changed into a machine business.

그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삼성중공업 창원 1공장, 창원 2공장입니다. This is how Samsumg Heavy Industries' Changwon First Factory and Changwon Second Factory were established.

하지만 1997년 imf 외환 위기 당시 However, during the IMF crisis in 1997,

창원1공장 창원 2공장은 볼보에 매각되어 현재는 볼보그룹의 소유가 됩니다. Changwon First and Second Factories were sold to Volvo and are now owned by Volvo Group.

3\. 반도체 사업의 시작 3\. The beginning of the semiconductor business 1974년 In 1974,

병철의 셋째 아들 건희는 동양방송 TBC의 이사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Byeong-chul's eldest son, Kun-hee, was serving on the board of the TBC broadcasting company.

그는 1973년에 발생한 오일쇼크 이후 In 1973, after the oil shock,

한국이 새로운 첨단 산업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he realized that Korea needed a high-tech business.

그런데 그 시기 Right at that time,

건희는 오일쇼크로 인해 한 회사가 파산할 위기에 처했다는 얘기를 듣게 됩니다. Kun-hee heard that a company was on the verge of bankruptcy due to the Oild Shock.

바로 한국반도체라는 회사였습니다. It was a company called Korea Semiconductors.

건희는 우선 '반도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고 합니다. He liked that name "Semiconductors."

반도체 산업은 미세한 작업이 요구되며 Semiconductor business requires very detailed work.

먼지 한 톨도 용납할 수 없는 아주 깨끗한 환경에서 작업을 해야 했는데 It must be made in an ultra-clean environment without a single stain or dusk.

우리나라 사람들은 젓가락을 사용하기 때문에 손재주가 뛰어나며 Because Korean people use chopsticks, he though they could be very clever with hands.

집에서는 신발을 벗고 생활하는 문화를 가졌기 때문에 청결면에서도 강점이 있다고 판단 했습니다. He also though that Korean people are good at maintaining hygiene since they have been living without shoes indoors.

그래서 그는 아버지 병철에게 Therefore, he told his after Byeong-chul,

“아버지, 반도체는 주식회사와 원자력과 함께 인류의 역사를 바꾼 3대 발명품 입니다." "Semiconductors are going to be one of the three inventions that would change the world and the humanities along with corporation and nuclear energy" and

"전자사업을 하려면 반도체 사업도 당연히 해야 합니다." 라며 "if we want to do electronics businesses, we must also do semiconductors."

삼성 그룹이 반도체 산업에 진출하기를 건의했습니다. So he recommended Samsung Group to extend its business to semiconductor business.

당시 반도체 산업은 초기 투자비용이 5조~6조 원이 필요했으며 An initial investment of 5-6 trillion won was needed to start semiconductor business.

1개의 반도체 라인을 만드는 데만 해도 1조 원이나 들었습니다. To make one line of production of semiconductors, it required 1 trillion.

계속해서 새로운 반도체가 개발되고 있기 때문에 Because new semiconductor technology was constantly being developed,

타사보다 조금 더 빠르게 개발하면 초대박이 날 수도 있었지만 it could be a big success if they could develop faster than other companies.

타사보다 조금만 늦어도 완전 쪽박이 나는 리스크가 아주 큰 사업이었습니다. However, if they were lagged behind, they could have lost a lot of money. It was a very risky business.

그래서 병철은 아직 반도체 산업에 진출하기엔 이르다고 판단하여 That's why Byeong-chul thought it was too early to get in semiconductor business

건희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and rejected Kun-hee's request.

그런데 1974년 12월 6일 However, in December 6, 1974,

건희는 자신의 개인 자산 4억 원으로 대뜸 한국반도체 주식 50%를 매입하며 Kun-hee used his own personal assets that worth 400 million won to purchase the 50% of the shares of Korea Semiconductors.

건희는 자신의 개인 자산 4억 원으로 대뜸 한국반도체 주식 50%를 매입하며 Kun-hee used his personal asset of 400 million won to purchase 50% of the shares of Korea Semiconductors,

한국반도체를 인수해 버렸습니다. thereby acquiring the company.

건희는 '반도체라는 씨앗은 결코 남에게 빼앗길 수 없는 종자'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Kun-hee thought that semiconductors were a seed that he should not let others to take over.

문제는 아직 한국반도체의 기술이 부족해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던 겁니다. The problem is that South Korea was still lacking in technology when it came to semiconductors.

비실비실한 상태로 겨우 버티고 있던 한국반도체는 Korea's semiconductor businesses were maintaining themselves with much difficulty.

결국 1977년 12월 Finally, in December 1977,

삼성그룹에 인수되어 삼성반도체 주식회사가 되었다가 the company was acquired by Samsung Group and incorporated as Samsung Semiconductors.

1980년 1월 In January 1980,

삼성전자에 흡수되어 반도체사업부로 개편되었습니다. it was absorbed into Samsung Electronics' semiconductor group.

하지만 자체 설계 기술이 없었던 탓에 반도체사업부는 계속 적자상태를 유지하며 However, because the semiconductor group was lacking in technology, it kept running deficit.

삼성그룹 내에서도 미운 오리로 낙인찍혀 있었다고 합니다. It was stigmatized in Samsung Group as a money loser.

결국 병철은 직접 나서서 반도체 사업부를 살려보기로 결정했습니다. In the end, Byeong-chul decided to step up himself to save the semiconductor group.

먼저 병철은 잘 알고 지내던 일본의 한 반도체회사 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First, he sought help from the president of a Japanese semiconductor company that he knew very well.

이후 그 반도체회사 회장은 직원들을 보내 삼성반도체의 부천공장을 방문 하도록 했습니다. Afterwards, that president sent his employees to visit Samsung Semiconductors' factories in Bucheon.

그런데 공장을 방문한 이후 어떠한 피드백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However, they didn't give any feedback after visiting the factory.

아마도 머지않아 경쟁상대가 될 업체에게 정보를 주고 싶지 않았을 거라고 추정됩니다. Perhaps, they knew that it would very soon grow into a strong competitor, so they didn't want to give away any intelligence.

"아니, 도대체 반도체가 뭐고?! 반도체가 얼마나 중요하길래..." "What on earth is semiconductor? How important is it?"

이날 이후로 병철은 반도체에 대해 파헤치기 시작했습니다. Since that day, Byeong-chul started to learn more about semiconductors.

한편 1977년 Meanwhile, in 1977,

한국반도체가 삼성그룹의 애물단지 노릇을 하고 있던 무렵이었습니다. when Korea Semiconductors were still regarded as a headache to Samsung Group,

1년 전 위암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던 병철은 Byeong-chul who was in recovery from a cancer surgery he got one year ago

급히 건희를 삼성그룹의 후계자로 결정한 것으로 보이는 행동을 취합니다. suddenly started to show actions that could be interpreted as designation of the heir of Samsung Group.

일반적으로 재산을 상속할 때 부모가 살던 집은 장남이 물려받는데 Normally, the house was passed down to the eldest son.

병철은 자신이 살고 있던 장충동 본가를 건희에게 넘겨준 것입니다. However, Byeong-chul passed his house in Jangchoong-dong to Kun-hee.

그렇게 1979년 2월 In February 1979,

건희는 삼성그룹의 부회장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Kun-hee became the vice-president of Samsung Group. 1983년 2월 8일 In February 8, 1983,

반도체에 대해 오랜 기간 공부하며 고민해 온 병철은 Byeong-chul who studied and thought about semiconductors for a long time

도쿄에서 한국에 있던 중앙일보 사장 홍진기에게 전화하여 called the president of Joongang Ilbo, Hong Jin-ki who was in Tokyo and announced that

"누가 뭐래도 반도체를 밀고 나가겠다."고 선언했고 he was going to push the semiconductor business no matter what other people said. 이 소식은 중앙일보를 통해 전해지게 됩니다. This news was announced to everyone through Joongang Ilso.

이것을 '도쿄선언'이라고 부릅니다. This was called "Tokyo Announcement."

삼성전자의 첫 번째 반도체 사업 목표는 Samsung's first goal in semiconductor business was

당시 세계 D램 시장의 주력 제품이던 '64K D램'을 양산하는 것이었습니다. to produce 64K D-ram which was the flagship product in the world's D-ram markets.

삼성전자는 설계도면을 마이크론으로부터 들여온 뒤 After Samsung Semiconductors got its design plan through Micron,

나머지 모든 공정 프로세스를 독자적인 기술로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it started to develop its own proprietary technology for the rest of the process.

그러던 1983년 12월 1일 And then, in December 1, 1983,

본격적으로 개발에 들어간지 6개월 만에 after developing and researching for six months,

세계에서 세 번째로 64k D램 개발에 성공하면서 전세계를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it surprised the world by succeeding in inventing the 64k D-ram as the third company in the world able to do so.

4\. 2대 회장 이건희 4\. The second president, Lee Kun-hee 1984년 8월부터 Starting from August, 1984,

삼성전자는 64k D램을 본격적으로 출하하기 시작했습니다. Samsung Electronics started to officially deliver 64k D-ram.

그런데 However,

미국의 마이크론 등 선진 반도체 회사는 256K D램을 출시했고

삼성을 의식하며 64K D램의 가격을 확 낮춰버렸습니다. and lowered its price to compete with Samsung.

결국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는 수년간 무려 1200억원의 적자를 내게 되었습니다. Samsung Electronics' semiconductor group ended up making 120 billion won deficits.

병철은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면서 이미 각오했던 일이기에 Byeong-chul already made up his mind when he jumped into semiconductor business,

담담히 다음 개발을 진행다고 합니다. so he stayed calm and continued with the next stage of research and development.

그렇게 1984년 10월에 256K D램 양산에 성공했으며 In October 1984, Samsung succeeded in producing 256k D-ram.

1986년 7월에는 1M D램을 설계부터 모든 공정까지 독자기술로 개발하게 됩니다. In July 1986, it developed its own technology from design to production for 1m D-ram.

이 무렵 병철은 더이상 일을 할 수 있는 건강상태가 아니었습니다. Around this time, Byeong-chul realized that his health condition did not allow him to work anymore.

1976년에 위암수술, 1979년에 뇌수술을 받았던 그는 In 1976, he underwent a surgery for his gastric cancer. In 1979, he got a surgery in his brain.

1986년부터는 집에서 요양하며 손주들을 돌봤다고 하는데 Since 1986, he rested at home, taking care of his grandchildren.

그래서 많은 업무가 건희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Therefore, a lot of work was allocated to Kun-hee.

1986년은 삼성, 현대, 금성이 4M D램을 공동 개발하기 시작한 해였습니다. In 1986, Samsung, Hyundai and Kumgsung started a joint project to develop 4m D-ram.

하지만 실제로는 각 기업이 별도로 개발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However, in fact, each company pursued their own research and development.

반도체는 웨이퍼라는 원판 위에 Semiconductor is a wafer with

트랜지스터 다이오드 저항 등의 많은 소자를 쌓아서 만듭니다. with numerous elements with transistor diode on top of it.

1M D램까지는 웨이퍼에 단층으로 칩을 쌓아서 제작이 가능했지만 Up until 1m D-Ram, it is enough to build the chips with a single layer.

4M D램때부터는 반도체 용량이 커지며 But starting from 4m D-ram, as the capacity of semiconductors grow,

단층으로만 쌓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a single layer becomes physically impossible.

그래서 4M D램 개발을 위해서는 2가지 제작 방식중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Therefore, in order to make 4m D-ram, one must choose from two ways of design.

웨이퍼 표면을 아래로 파고 내려가서 집적도를 높이는 트렌치 공법과 First is the trench method which is to dig down from the wafer's surface, thereby increasing the degree of integration.

웨이퍼 표면에 새로운 층을 쌓아서 집적도를 높이는 스택 공법. The second is the stick method which is to build up a new layer on the top of wafer's surface, thereby increasing the degree of integration.

이 두 가지 공법은 각각의 장단점이 있었습니다. Each method has its upsides and downsides.

트렌치 공법은 안전하기는 하지만 밑으로 파낼수록 회로가 보이지 않아서 The trench method is safer but it is harder to see the circuits as digging deeper into the wafer.

공정이 까다롭고 경제성이 떨어졌으며 The procedure is very complicated and therefore less economic.

스택 공법은 작업이 쉽고 경제성이 있지만 품질을 확보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The stack method is easier and more economic; however, it is difficult to maintain the quality.

건희는 개발 방식의 선택을 위해 Kun-hee, in order to choose a method,

전자공학 박사 두 명을 불러 두 공법에 차이에 대해 물었다고 합니다. asked two PhDs in electric engineering about differences between these two methods.

"트렌치 공법은 하자가 발생하면 속수무책이지만" "There is no way out if something goes wrong with the trench method,"

"스택은 아파트처럼 위로 쌓기 때문에 그 속을 볼 수 있습니다." "but you can see the inside with the stack method."

"한마디로 트렌치는 검증할 수 없지만 스택은 검증이 가능합니다." "In other words, it is possible to check the quality with stack method, but not with the other method."

"이 점이 핵심 차이입니다." "That is the key difference."

이 얘기를 건희에게 전한 이들은 권오현 박사와 진대제 박사였습니다. They were Doctor Kwon Oh-hyun and Doctor Jin Tae-jae.

참고로 권오현 박사는 2018년 3월부터 2020년 1월까지 삼성전자 회장을 지내고 Noe that Doctor Kwon was the president of Samsung Electronics from March 2018 to January 2020.

현재 삼성전자 고문으로 있는 인물이며 He is now an advisor for Samsung Electronics.

진대제 박사는 노무현 정부 당시 제9대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내고 Doctor Jin was the ninth Minister of Technology and Communication during President Roh Moo-Hyun's administration.

현재 한국블록체인협회 회장을 지내고 있습니다. Now he is the president of the Korean Block Chain Association.

어쨌든 건희는 이들의 얘기를 듣고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Anyway, Kun-hee were split for choice after hearing from the two doctors.

그런데 However,

대부분의 미국과 일본의 기업들은 스택공법보다 트렌치 공법을 선택했으며 most American and Japanese companies chose the trench method over the stack method,

우리나라의 현대전자도 트렌치 공법을 택했습니다. and so did South Korea's Hyundai Electronics.

하지만 건희는 위로 쌓는 방식인 스택 방식을 선택하게 됩니다. However, Kun-hee decided to go for the stack method.

문제가 생기더라도 쉽게 고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해서였습니다. He thought that it would be possible to fix problems if they ever arose.

그렇게 삼성전자는 스택 공법으로 4M D램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So Samsung Electronics started to develop its 4m D-ram using the stack method.

그러던 1987년 11월 19일 However, in November 19, 1987,

삼성그룹 1대 회장 병철이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the first president of Samsung Group, Byeong-chul passed away from lung cancer.

그리고 1987년 12월 1일 In December 1, 1987,

병철의 셋째 아들 건희는 46살의 나이로 삼성그룹의 2대 회장이 됩니다. the third eldest son of Byeong-chul, Kun-hee became Samsung Group's second president at the age of 46.

건희는 취임식에서 "삼성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입니다."라며 Kun-hee said at his inauguration ceremony that he would make Samsung the world's leading company 강한 의지를 밝혔습니다. with strong determination.

1988년 2월 On February, in the year 1988

1988년 2월

삼성전자는 스택 공법을 이용한 4M D램 개발에 성공하며 Samsung Electronics succeeded in developing 4M DRAM using the stack method

반도체 선두업체와의 격차를 상당히 좁힐 수 있었습니다. and was able to lessen the gap with the frontier leaders of semiconductor production

1988년 3월 22일 Year 1988, March 22nd

삼성상회가 세워지며 시작된 삼성의 50주년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Samsung started with the Samsung Chamber of Commerce and the 50th anniversary ceremony was held.

이날 건희는 이렇게 말합니다. That day, Gunhee says these words:

"본인은 거대한 생명체, 위대한 내일을 약속하는 제2창업을 엄숙히 선언합니다." "I solemnly declare my second start-up will be promising in creating a giant creature, creating a better tomorrow"

이것을 제2 창업 선언이라고 합니다. This is called the second start-up declaration.

그리고 건희는 자신의 생각대로 삼성그룹의 사업구조를 재편하기 시작합니다. Gunhee starts to reorganize Samsung Groups's business structure according to his ideas.

연관성이 있었던 가전, 반도체, 휴대폰 계열사 등을 삼성전자로 한데 묶은 Home appliances, semiconductors, and mobile phone affiliates all combined

통합 삼성전자가 출범한 것이었습니다. was the launch of an integrated Samsung Electronics grouped together .

또한 우주산업과 유전공학 등 새로운 사업 진출 의지도 밝혔습니다. Also, he revealed his willingness to enter a new business in space industry and genetic engineering.

1988년 Year 1988

4M D램을 개발한 삼성전자는 스택 공법으로 결정한 것에 대한 성적표를 받았습니다. Samsung Electronics, which developed 4M DRAM, received a report on what was used with the stack method.

전년 대비 무려 176%나 성장하며 매출액 6천 7백억 원 It had a growth nearly 176% times its previous year. The total sales was KRW 67 billion

누적적자를 제한 순 이익이 1600억원에 이를만큼 성장했던 겁니다. Net profit limiting cumulative deficit amounted to 160 billion won.

그리고 1990년 8월 And in August of 1990

세계 선두 업체들과 거의 동시에 16M D램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They also had a successful development of 16M DRAM almost simultaneously with the world's leading companies

후발주자였던 삼성이 선두주자들을 따라잡을 수 있었던 이유가 The reason Samsung, a latecomer, was successful in catching up with the frontier and leaders

트렌치 공법 대신 스택 공법을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많은 이들이 얘기 합니다. is said to be so because they used what is called the stack method instead of the trench method

그렇게 삼성은 안정적으로 체제 변화가 이뤄지고 점점 더 성장해가는 듯 보였습니다. Samsung seemed to be steadily changing the system and developing more and more.

그러던 1993년 6월 7일 But, in 1993, June 7th,

건희는 명언을 남깁니다. Gunhee leaves a quote

브랜드백과사전 삼성 5편에서 계속됩니다. To be continued in Brand Encyclopedia Samsung 5th episode